[칼럼] 플랫폼 비즈니스가 부추긴 '자아'라는 이상의 뒷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없을 무(無), 나 아(我). 즉, ‘자아’가 없는 상태의 경지이다. 무아지경 하면, 악기 연주자가 신에 들린 듯 악기를 다루는 장면이 떠오른다. 제3자의 눈에는 그의 실재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자세히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놓아버렸다. 마치 번지점프 하듯, 줄 하나에 의지한 채 그는 '자아'를 잊어버렸다.
요즘엔 ‘자아’가 너무 많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되고, 유튜브에 배설되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자아’는 판매된다. ‘브랜드’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성공이라는 뚜렷한 지향점을 지니고. 전에는 ‘자아’를 표출하면 자의식 과잉에다 쓸데없다고들 했다. 그럴 거면 연예인을 하고, 예술을 하라고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쓸모”가 있어졌다. ‘자아’를 내세우면 돈이 되어 돌아온다.
위와 같은 보상체계가 만들어진 가장 큰 원인은 디지털 세상의 출현과 플랫폼의 등장에 있다. 방구석 예술가는 옛말이다. 자신을 혹은 자기 창작물을 가상의 공간(플랫폼)에 내놓으면, 시간적 물리적 제약 없이 관객과 혹은 소비자와 빠르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저작권의 문제, 개인정보 인증의 문제 등 기술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던 때에는 선뜻 창작물을 내놓기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부추겨진다. 왜? 플랫폼 시장은 규모의 경제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장은 커지고, 플랫폼이 가져가는 이익은 커진다. 그래서 이들은 솔깃한 보상체계를 미끼로 창작자들을 포섭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소비자와의 교류 시스템을 구축한다. (최근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 스토리의 창작자 후원제도 ‘응원하기’ 도입의 예를 들 수 있다.)
현대는 따라서 ‘자아’를 표출해야, 것도 진정성 있는 자아를 표출해야 돈이 되는 시대이다. ‘창작가’라는 보기 좋은 아우라의 빛깔을 띤 채, ‘보여지는 자아’는 점점 비대해진다. 이와 같은 변화가 창작자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소비자에게는 다양성에 대한 갈증의 해소를 가져다준 점은, 일정 부분 동의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필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기획영화 말고 더 다양한 영화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접근성이 낮은 예술영화관이나 다소 진입장벽이 있는 영화제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OTT(*Over The Top,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 넷플릭스, 티빙과 같은 콘텐츠 플랫폼)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영화를 찾아 감상할 수 있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어쨌든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계속해서 해야 할 원동력을 얻는다.
그렇다면 분명 창작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좋은 윈윈의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아름다운 생태계가 조성되는 듯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땐 ‘상품가치로서 유효한 자아’에게만 돈이 되고 창작자 역시 이에 갇힐 확률이 농후하다. 또 한편 고도로 발전하는 기술은 더 치밀하고 교묘하게 우리 삶에 침투한다. 기술과 자본은 최상의 경험만을 제공한다. 좋은 게 좋다며, 긍정의 힘을 좇게 만든다. 특히 플랫폼 기업들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을 좁혀 양쪽 모두를 편하게 만들지만 종국에는 그들에게 의존하게끔 만든다.
생산자 입장에서 거대자본과 글로벌 플랫폼은 무시 못할 존재다. 한 번의 미끼로 진입하게 된 시장에서 쉽게 발을 빼지도 못한다. 신문사들이 포털사이트에 기사 제공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도, 한국 콘텐츠 제작사들이 글로벌 플랫폼에 콘텐츠 제공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어떤 규제와 자각이 없으면 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혹자는 변화되는 흐름이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고, ‘K’ 자를 뺀 무언가를 논한 적이 있는가? ‘잘된다’는 결과만 보고서는, 흐름에 올라타 ‘멀리’ 갈 생각만 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결승선에 도착해 넘버원이 되길 희망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다양한 콘텐츠의 소비가 가능하여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다양한 양질의 콘텐츠인지는 한 번은 반문해봐야 하고, ‘보여지는 자아’의 범람 속에 개개인은 착각한다. 본인은 ‘자아’가 없는 것만 같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몸뚱이 하나로도 돈을 벌 수 있어 보이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디 ‘자아’란 허상이다. 고정적이지도, 뚜렷하지도 않다.
불안할수록 현대인은 자꾸만 매달린다. 지름길로 보이는 것에 올라타기 위해 효율성을 추구하고, 감정적 소비는 줄이며,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모두 차단시킨다. 이를 또 가능하게 해주는 건 단연 ‘플랫폼’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가능한 많은 것을 수월하게 해 주고, ‘시간이 돈’이라며 당신의 시간을 아껴주는 플랫폼들은 이제는 ‘구독’으로 우리를 영원히 ‘락인(Lock-in)’시키려 한다.
이로써 ‘원인’과 ‘결과’이 남는다. 불안하고 불행해서, 한 번의 클릭으로 무언가 쉽고 빠르게 얻는다. 끊임없이 채우고, 전시하고, 버리고 또 채우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과정’의 생략이다. 비효율의 이유만으로, 우리는 과정을 쉽게 생략한다.
도서관과 유튜브를 비교해 보자.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생각할 게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추우면 옷을 든든하게 입어야 하고, 대여증도 챙겨야 하고, 책을 빌려올지도 모르니까 가방도 챙겨야 한다. 그리고 내 두 다리로 걸어서 도서관으로 향한다. 반면, 유튜브는 핸드폰을 켜고 유튜브를 클릭한 채 필요한 걸 검색한다. 두 곳 모두 정보의 바다이지만,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의 지식을 얻는 ‘과정’은 훨씬 생략되어 있다. 이는 접근성이 좋다는 걸 의미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빠져나가기도 쉽다는 소리이다. 도서관은 준비해서 나간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몇 분을 더 있다가 나오지만 유튜브는 아니다.
이처럼 생략된 ‘과정’은 다른 의미로 ‘의식(Ritual)’이기도 하다. 도서관을 가기 위해 따뜻한 옷, 대여증, 가방을 챙기는 행위,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티켓을 사고 팝콘을 사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행위. 이 모든 것이 쓸모없어 보이지만 강제로 행해지는 루틴이자 의식이다. 요즘 루틴, 루틴 하지 않는가. 과정이 생략된 현대에서 ‘루틴’을 이제는 우리가 강제로 챙겨야 한다는 소리이다. 전에 같았으면 굳이 만들어도 되지 않을 의식들을, 우리는 신경 써서 정성스럽게 치러야 한다.
의식은 ‘나’를 잊어버리게 한다. 일련의 의식을 정성스럽게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나’를 잊어버릴 준비를 할 수 있다. 문턱만 넘어가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몸을 움직이고, 연기를 하고, 연주를 하며 이야기를 한다. 말 그대로 ‘무아(無我)’의 상태이다. ‘나’를 잊는다는 행위는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나’를 창작의 원천, 개성의 구심점으로 생각한다. 드러내야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나’를 잊는 것에서부터 온다. 단 다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번지점프도 나를 구해줄 생명줄이 있기에 (죽음에서 건져질 믿음이 보장되기에) 뛰어내릴 수 있듯. ‘나’를 잊지 않는다는 믿음 아래, ‘나’를 놓는 것이 중요하다.
무아지경. 가끔은 자신만의 제동장치를 만들어, ‘나’를 음미하고 놓기를 반복해 보자. 물론 너무 많은 생각도 금물이다. 생각이 많으면 의식(ritual)을 방해한다. 과정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꼭꼭 씹어 먹어야, 완전한 행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또한 개인에게 너무 요구하지는 않겠다. 분명 현재의 사회는 알게 모르게 개개인을 너무나도 쉽게 조작하기 때문이다. 이를 제동 할 사회적 구조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역시나 또다시, 지금 할 수 있는 행위를 우리는 “해야 하기에” 할 뿐이다. 씁쓸하지만 우리는 해야 한다. 어떠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함에 나 또한 통탄스럽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는 의식적으로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