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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연 Jul 30. 2024

전시 <작은 빛> 리뷰 : 아우라를 벗어나서

[Review] 김희수아트센터를 다녀오다

아우라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캡션 없이, 보이드를 꽉 채우는 신성한 기물. 
기물들이 압도하는 공간적 아우라가 분명 존재했다. 

서울시 동대문구 홍릉로에 위치한 ‘김희수아트센터’의 건물의 풍채 또한 아우라 그 자체였다. 바로 옆에 위치한 세종대왕 기념관 탓인지,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아트센터 앞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건물의 외관을 눈에 다 담지도 못한 채, 홀린 듯 아트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 시작이다. 


1층인지, 2층인지 알 수 없는 레이어가 섞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방향을 잃고 말았다. 사무실이 있는 곳인지, 전시공간이 있는지, 공연장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가장 뚜렷한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니 입구가 하나 보였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작은 빛’ 전시 포스터가 보였다. 아트 갤러리에서 열리는 <작은 빛> 전시는 여러 명의 개인 작가가 연합해 여는 전시처럼 보였다. 


서성협, 최영, 지희킴, 현우민, 서인혜


캡션(작품 설명이 되어 있는 안내문) 없는 전시는 상상만 했지, 실제로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물론 도슨트 설명이나, 제목을 보지 않고 작품 보는 것을 즐겨하긴 해서 오히려 반갑긴 했다. 그러나 애초에 여기까지 들어올 때까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터라, 캡션까지 없으니 조금은 힘이 빠지긴 했다.


캡션이 전시장에 없는 대신, 팸플릿에 작품 설명이 되어 있다. 설명이 되어 있는 지면에 글자들이 꽤 빽빽했다. 모처럼 학부시절 때 읽었던 텍스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 글에 익숙한 나도, 오랜만에 마주하니 좀 어려웠던 느낌이 있었다.


입구까지 와보니, 다시 한번 가늠되었다. “아우라가 점철된 공간”. 


이 아우라는 누구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러나 아우라의 문제는 이제 고리타분한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아우라의 힘은 다했다. 전시공간을 둘러싼 아우라의 힘은 관객을 압도하게 할 뿐, 예술작품의 주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는 방해가 된다. 


아우라를 벗겨내고 작품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인상이 깊었다. 요 근래 봤던 전시와는 다른 알맹이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사실 더 들여다보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 작품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어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러닝타임이 긴 현우민 작가의 영상작품도 그렇고 다른 작품들도 조금 더 깊숙하게 볼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 기준)
서성협, 〈위상경계: 밖과 안〉(#02), 2024, 나무에 먹, 우레탄 폼, 50×50×45cm
서성협, 〈free-form frame: 간첩〉(#04), 2024, 나무에스테인, 라탄, 우레탄 폼, 유채, 40×40cm
최영, 〈작은 빛〉, 2024, 소설 (영상: 강지윤)


그 와중에 크기로나 형태로 보나 가장 눈에 띈 작품은 서성협 작가의 방파제를 닮은 작품이었다. 함께 전시공간에 있던 아이도 공간을 돌고 돌아 자기 몸집 만한 서성협 작가의 작품을 향해 제일 먼저 돌진했다. 소리도 나는 것이 신기할 터. 팸플릿의 설명을 읽어보니 메시지적으로도 경계, 혼종, 사이공간을 이야기함이 직접적으로 잘 와닿았다.


그다음 눈길이 간 작품은 서인혜 작가의 비디오 작업물이었다. 개인적이어서 좋았다. 실은 <작은 빛> 전시는 수림문화재단을 만든 김희수 선생의 뜻을 기리는 동시에 재단 창립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이다. ‘김희수아트센터’의 아트센터만 알았지, 김희수 선생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내게 김희수라는 사람의 개인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서인혜, 〈희수의 비디오 카셋트〉, 2024, FHD Video, 8min 40sec
서인혜, 〈 _초근목피〉, 2024, 철사, 종이, 점토, 접착제, 잉크, 가변설치


그 외 작품들도 찬찬히 뜯어보니, 개인 특유의 경험이 물씬 묻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작품을 설치하는방식에 있어서는 최영의 작품이 눈길이 갔다. TV 모니터를 나란히 두고, 그가 쓴 소설의 글자들이 철도길 넘어가듯 모니터 경계를 넘어갔다. 모니터는 두 개이지만, 마치 한 화면처럼 말이다. 


작품의 알맹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작품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친절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아우라는 이제 힘이 없다. ‘소통’이라는 말도 진부한 말이 된 지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얼마나 간결하게 질문을 던지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김희수 선생님이 결국 남기고자 하는 ‘작은 빛’이 무엇인지. 


“태양과 같은 찬란한 빛은 아니더라도, 호롱불 같이 작은 빛으로 사회의 어두운 한구석을 밝히는 사람이 되자. – 동교 김희수-“


‘작음’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작은 빛도 결국 빛이다. 태양과 같은 ‘빛’을 낼 수 있음에,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 닥쳐올 혼란이 가득한 세상에서, 각 개인이 모두다 작은 빛을 낼 수 있음에, 우리는 그 태도를 굳건히 가져갈 수 있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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