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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감각과 사유의 매체, 전시

[Review] 김도연, 노혜리, 문이삭, 한진 <화이트스페이스>

by 지늘

긴 말이 필요 없다. 수림큐브에서 열린 <화이트스페이스>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고, 전에 알지 못했던 좋은 작가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수림큐브’는 종로구에 위치한 수림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갤러리로, 창덕궁 돈화문을 따라 난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화이트스페이스>는 2024년 11월부터 2025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오랜만의 그룹전이었다. 지하 1층부터 1층, 2층, 3층의 옥상까지 알차게 전시가 꾸려져 있었다. 실은 최근에 미술 전시 관람에 대한 개인적인 부침이 있었다. 전에는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별로 어려울 게 없었는데,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내가 이렇게 보는 게 맞는 건가? 개인적으로 권태기가 왔다. 감사하게도 이번 전시는 그 권태감을 말끔히 씻어준 전시였다.


<화이트스페이스>는 네 명의 작가 김도연, 노혜리, 문이삭, 한진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서문은 꽤 길다. 그중 서문에 써진 ‘화이트스페이스’에 대한 정의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화이트스페이스 White Space>는 변화의 과정을 사유할 시간이 점차 소멸하는 시대에, 전시는 여전히 감각과 사유의 시간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매체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 스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공백을 뜻하는 단어로, 특히 그래픽 디자인에서 과잉의 반작용을 피해 시각적인 조화를 꾀하는 비어있는 여백을 의미한다.

- 전시 서문 中 –

사실 ‘전시’라는 매체는 매우 능동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나도 모르게 작품과의 안전거리를 두면, 절대 전시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예열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작품을 본격적으로 관람하기 위한 준비운동이랄까? 필자에게도 꽤 시간이 필요했다. 1층의 김도연, 노혜리 작가의 작품은 전시를 다 보고 나서 다시 봤을 때야 그 의미를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예열을 마치게 해 준 가장 중요했던 작품은 한진 작가의 작품이었다. 지하 1층에 위치한 <저만치 벽> 연작과 <밤결 속에 머물다> 연작은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감각과 사유의 시간을 유효하게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오랜 시간 작품 앞에 머물렀다. 평면회화 앞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딱히 뚜렷한 형상과 구상은 없었다. 다만 반복되는 무언가가 그림에 드러났고, 그림 뒤에 숨겨진 갖가지 사유의 레이어들이 숙성된 채 내 앞에 다가왔다. 팸플릿의 설명을 들으니 더 좋았다.

한진의 <저만치 벽> 연작은 작가가 막다른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곰팡이, 못이나 페인트 자국에서 출발하여 벽화로 처음 그리기 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시간의 흔적이 남겨진 존재에서 자신의 기억 속 감정을 대입시킨다.

B1층의 오른쪽 공간 (사진: 수림문화재단 제공)

한진 작가 작품 옆에 덩그러니 놓인 흙덩어리의 존재도 문득 궁금해졌다. 공간이 좁아 마치 발에 챌 것 같이 놓인 흙덩어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제발 발로 치지 말아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존재의 시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 1층 반대편의 공간에 친구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문이삭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이상하게 문이삭 작가의 작품들은 아까 그 아이처럼 각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수다를 떠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올록볼록한 친구들은 살아있었다! 인공적인 작품이 아니고 자연에서 수집한 친구들이어서 그랬을까? 그중 눈에 띄는 작품은 마치 다보탑처럼 생긴 작품이었다. <무제(Between Father and Child)>(2021). '산에서 노는 딸아이의 움직임을 수직성으로, 밭일하는 부모의 움직임을 수평성으로 표현하며 자연과 신체의 근원적 관계를 탐구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딸아이와 부모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 그런가 투박한 외연과는 별개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B1층의 왼쪽 공간 (사진: 수림문화재단 제공)

비교적 환한 조명에 문이삭 작품들로만 구성된 이 공간이 난 퍽 마음에 들었다. 위압감이 전혀 없고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제 살포시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름이 아니라 한진 작가의 작품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롱한 자태로. 지하 1층보다는 사이즈가 조금 더 큰 작품 <밤은 아직 기다려야 하고 낮은 이미 아니다 Op.2>이 있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옆에 자리한 <still>이라는 영상작품도 묘하게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2F 한진 작가의 작품, <밤은 아직 기다려야 하고 낮은 이미 아니다 Op.2> (2023~2024) (중), (2024)(우) - 사진: 수림문화재단 제공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영상을 한참을 올려다봤다. 순간 이게 실제로 내 눈앞에 벌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들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흔들리는 낙엽,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 땅에 떨어지는 열매 등이 영상에 담겨있었다. 이런 폐쇄된 곳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이러한 미물의 순간에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언뜻 보면 별거 아니어 보이는데, 툭하고 내놓는 한진 작가의 시선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반대편 공간으로 향했다.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 있었다. 김도연 작가의 <감이야기>(2022). 순간 1층에서 봤던 알록달록한 작품과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자세히 보면 필체나 그림의 모양새(?)가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색감이 없으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히 조이트로프 방식으로 설치된 작품과 김도연 작가의 그림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 댁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출발한 작가 개인의 기억과 동아시아 신화 인물을 결합한 그림은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았다. 개인적으로 그림 속 이야기가 적힌 텍스트도 같이 곁들여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2층, 김도연, <감이야기(2022)>

실제로 돌려볼 수 있다고 해서 나무 막대기를 잡고 돌리는데, 마치 장난감 같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2층까지 관람하고 나면 3층 옥상 테라스까지 볼 수 있는데, 옥상에는 문이삭 작가의 작품이 놓여있었다. 날이 좋아 주변의 풍경과 퍽 잘 어울렸다.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른 탓에 바깥공기가 시원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감상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면서 다시 일층으로 내려오니 예열하느라 처음에는 감흥이 잘 오지 않았던 김도연 작가의 알록달록한 작품도 충분히 다시 스며들었다. '전시'라는 매체는 과연 감각과 사유의 시간을 선사해 준다.


수림문화재단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수림큐브는 꼭 한 번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좋은 전시를 만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주변에 먹을거리 놀거리도 많아 날씨가 좀 더 풀리면 누군가와 함께 다시 들려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화이트스페이스>는 정제되지 않아 까끌까끌하거나, 마치 고전영화의 지글거리는 화면처럼 미끈하지 않은 자리를 제안한다. 이 경험은 관람객이 몸을 움직여 무려 74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려, 1층-지하-2층-2층 테라스-옥상까지 다 둘려본 후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시 서문의 마지막 말처럼, '전시'라는 매체는 다분히 신체를 움직여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의미를 가져갈 수 있는, AI 시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매체라 생각했다. 잘 몰라서 그렇지 한국에는 정말 많은 전시공간이 있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면, 이번 기회에는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다가가보자. 좋은 작품이라면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작품이 말을 걸어올 테니까 말이다. 이번 <화이트스페이스>는 충분히 그런 좋은 전시임은 필자가 보증하니, 날 좋을 때 서순라길 데이트 겸 수림큐브를 한번 방문해 보자.



*수림아트에디터 수퍼(SOOP-er) 2기

*본 리뷰는 수림문화재단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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