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 <그을린 사랑, Incendies> 재개봉 리뷰
기술로 인해 세상이 아무리 확장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네 삶에 관여되는 일이 아니면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우리 삶에는 수많은 우선순위들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상상을 한다. 서울 하늘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상상을. 가끔 꿈을 꾼다. 언젠가는 경주를 가는 것처럼 북한의 개성을 건너가 보는 꿈을. 그러나 이러한 꿈들은 꿈일 뿐.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렇게 밀려난 꿈들은 어느새 뉴스에 등장하는 타인들에 의해 다시 마주하게 된다.
별처럼 수놓는 밤하늘의 미사일들. 전쟁으로 인해서 난민이 된 아이들. 도시 한복판에 탱크가 지나가는 모습들.... 그러나 뉴스는 정보를 전달하지, 체험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이를 돕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중 ‘영화’는 단연코 즉각적인 체험을 하게 하는 장르이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그런 영화이다. 바로 드니 빌뇌브 영화 <그을린 사랑>이다. 영어 제목 은 '화염'을 뜻한다. 캐나다 동명의 연극이 원작인데, 빌뇌브가 연극 관람 후 충격을 먹어 영화화를 했다고 한다. 그때 원작자로부터 들었던 조건은 단 하나였다.
연극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주세요!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장담컨대 영화 <그을린 사랑> 은 연극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임이 분명다. 영화만의 매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꽤 건조하게 그려낸다. 화면의 풍경처럼 텁텁하고 답답한 간극이 계속된다. 애초에 영화 속 도시명은 가상이다. 그래서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특히 중동의 내전의 참상에 관해서는 무지했던 나와 같은 관객이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영화가 제공하는 굉장히 최소한의 정보를 수집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처음엔 그래서 썸 타는 상대처럼,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화면 속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살육에 깜짝 놀라긴 했어도, 반대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의 상황이 굉장히 영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리를 두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야기 구조상, 영화는 관객을 점점 옥죄어 왔다. 처음에는 지난하게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면서 몰입감이 극대화되었다. 그렇게 처음엔 다 안 줄 것처럼 굴다가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향해 다다다 달려가다 마지막에 반전의 결말이 딱! 예상치 못했던 결말 때문에, 배신감까지 들 정도였다. 기구한 삶을 살았던 한 여인에 연민을 느끼게끔 훌륭하게 쌓아 올렸던 이 서사가, 이 모든 게 마지막 반전을 위한 도구였던 것인가! 하는 탄식이 자연히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일주일 동안 영화를 곱씹어 보면서, 또한 자료조사를 하면서 연극과는 아예 다른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영화화를 위해 수많은 디테일들이 더해졌구나를 알았고. 특히 JTBC <방구석 1열>에서 내전영화특집 '그을린 사랑'을 소개하는 편에서 게스트로 등장한 분쟁지역 전문 PD의 이야기를 듣고선 아예 새로운 감상에 빠졌다.
영화 <그을린 사랑>을 관람할 때 늘 언급되는 충격적인 반전 결말에 대해 PD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충격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이지만, 인격이 말살된 전쟁의 현장에서는 충격이 아닌 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네 삶의 깊숙이 관여되지 않아서 몰랐지만, 우리의 상식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 아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게 된 계기였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바논은 기독교, 이슬람이 거의 반반인 국가이고, 다양한 종파의 종교들이 공존하는 국가이다. 최근 이스라엘, 이란 관련 뉴스에도 레바논에 있는 이란파 무장조직 때문에 종종 나라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정치 종교적 갈등이 첨예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영화 속, 기독교 조직이 이슬람 평범한 시민이 탄 버스를 불질러 학살한 사건도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보복이 보복을 낳은 사건이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다 같은 뿌리일텐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이 아예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땅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영화에서 나왈 마르완은 버스 학살 사건을 겪고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때 적이었던 이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남편도, 아이도 죽고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며 적의 적이 되어 무력으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그녀는 행동했고 삶을 이어갔다. 사실상 영화의 큰 틀은 나왈 마르완이 죽고 난 이후, 자신의 아들 딸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 남긴 유언을 좇아가는 내용이다. 어머니의 과거에 담긴 진실을 추적하며, 남매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쌍둥이 남매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관객의 위치에 함께 서 있는 편이다. 카메라로 한 호흡 걸러내도, 서사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극과 다른 것은 화면에 담긴 장소성일 것이다. 건조한 풍경 속에 반복되는 총살과 살육은 마치 매일 일어나는 일처럼 일상적이다. 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당연하고, 십자가와 히잡 하나로 종교가 쉽게 구분된다. 이렇게 쉽게 구분될 것이었으면 도대체 왜 싸우는 걸까?
언젠가 책에서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에 살던 한국인의 삶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길 매일같이 떨어지는 폭격에 죽은 시체를 치우는 게 아침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쯤 되면 사람은 생명이 아닌 물건이었고 ‘죽음’이라는 것도 되려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점심 끼니를 뭐 먹을지 걱정하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는 삶과 죽음이 우선순위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결국 떠올려야 하는 건, 다 같은 인간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뿐이다. 세상에는 너무 다양한 삶이 있기 때문에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저. 아무리 죽음이 일상처럼 닥치더라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남아있다면 어떻게라도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마치 ‘나왈 마르난’처럼 말이다.
타인이 아니어도 된다. 가족으로 꿈꾸었던 사람이 다른 종교를 믿는다 해서 쉽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나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가족 사이에서도 사랑은 당연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뭐든지 이겨내게 한다. 끔찍한 진실도 버텨낼 힘을 주며, 냉소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가장 좋은 기능은, 진짜배기를 한번 받아 보면 그 누구에게라도 전달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것이다.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흔하면서도 이상적인 선순환을 낳는 보석이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에,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쌍둥이 남매는 다소 괴팍할 수 있었던 유언을 믿고 이행했으며 그 사랑은 결국 아버지와 형에게 전달이 되었다. 그 사랑은 또 그 사람을 살렸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이 참에 느끼는데, 영어 제목을 참 번역을 잘한 것 같다. 왠지 힘들 것 같아서 미루고 미뤘던 영화였다. 그런데 4K로 재개봉한다는 소식에 당장 관람했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소 충격적인 결말에 놀랄 수도 있는데, 기억에서 지우지 말고 꼭 한번 곱씹어 보길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