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잠든 동안에

by 꼼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만삭 때는 나만큼 둥글둥글했던 친구가 출산 반년만에 비쩍 말랐다. 얼굴은 아가씨 때보다 더 작아지고, 입고 온 청바지가 헐렁헐렁하다. 왜 이렇게 말랐냐 물었더니 밥을 잘 못 먹는단다.


“애기 잘 때 뭐하고 밥도 안 먹어?”

“나는 애기 잘 때 그냥 자. 너무 졸려.”


아기가 늦게 자고, 자주 깨서 늘 잠이 모자라다고 했다. 모유수유를 하는데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으니 마를 수밖에. 나는 딸이 통잠을 자서 살이 안 빠지나보다, 라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새삼 딸이 잘 자주는 게 고마웠다. 아기가 자는 시간만큼 소중한 시간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기가 잘 때 제일 예쁘다는 말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과 같은 급의 진리다.


딸이 잠들면 마음이 급하다. 해야 하는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기 때문이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끈다. 밥을 먹고, 씻고, 너저분한 집안을 정리한다. 딸에게 필요한 오만가지 물건들을 사들이고, 레시피를 뒤져 이유식을 만든다. 남편과의 깊은 대화 역시 딸이 잠든 시간에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다.


낮에는 먹고, 씻고 어영부영 하다보면 딸이 깬다. 하지만 밤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대부분의 밤에 나는 이유식을 만들고 있거나, 빨래를 개고 있거나, 휴대폰을 붙잡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밤도 있기 때문이다. 딸이 일찍 잠들었는데 이유식도 넉넉하고, 집안일도 다 해치웠는데 남편과 사이까지 좋다면 그날 밤은 자유다. 설렌다.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을 키우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 건 출산 후 백일 무렵부터였다. 아이를 낳고 아둥바둥 키우느라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에 백일잔치까지 없애버릴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때 브런치가 생각났다. 출산 후 잠정폐업 상태였던 나의 브런치 말이다. 딸이 태어난 이후로는 글을 올리지 않는데도 조금씩 독자가 늘어나고, 가끔은 댓글도 달렸다. 그 중에 아기가 태어난 이후의 이야기도 글로 써달라는 댓글이 있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던 마음 속에 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생겼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다행히 딸이 통잠을 자기 시작한 덕분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다이어리에 끄적여놓은 메모를 보고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임신했을 때는 3주에 하나씩 글을 썼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을 따라잡으려면 열흘에 한번은 글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열흘에 한편은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글이라는 게 그렇게 뚝딱 써지는 게 아니었다. 첫문장만 썼다 지웠다 하다가 노트북을 덮기도 하고,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며칠을 끙끙거리기도 했다. 글이 잘 안 풀려서 잠깐 스마트폰을 잡았다가 순식간에 열두시를 넘기고 쓰린 마음으로 잠드는 날도 많았다.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하는지, 어느 지역에 맛집이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데 그걸 왜 몇시간씩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날은 글이 술술 풀린다 싶은데 딸이 자다가 일어나 우는 바람에 접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헤매다보니 A4 2장짜리 글 한 편을 완성하는데 두 달이 걸린 적도 있다. 글 속의 딸과 현실의 딸 사이의 간격이 점점 멀어져갔다.


빨리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글쓰기를 접었다. 누가 쓰라고 한 글도 아니고,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애 키우는 것만 해도 힘든데 글 쓰는 일로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딸이 잠들면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그런데 자꾸만 쓰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딸이 훌쩍 크는 걸 목격하는 순간에도, 남편과 싸워 속이 터질 때에도, 며칠씩 집밖을 못 나가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을 때에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글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쓰고 싶은 것들이 뒤엉켜있는 머릿속에서 글을 꺼내야 한다. 역시 첫 문장부터 어렵다. 그런데 신기한 건 쓰고 지우길 백번쯤 하다보면 또 어찌어찌 글이 써진다는 거다. ‘오늘도 재미있는 하루였습니다.’ 처럼 초등학생 일기 수준의 마무리를 하다가 토하면서 글을 지우기도 하고, 반성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글을 써놓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게 좋다. 쓰고 나면 뭔가 개운하다.


딸을 키우는 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가장 힘들고, 가장 외로운 동시에 가장 뿌듯한 일이다. 남들에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사소하고 찌질하지만 내게는 너무 중요한 순간들이 많아서 가슴에 다 담아놓을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찰떡같이 이해해주는 친구들과는 잘 만날 수가 없고, 유일한 친구이자 육아동반자인 남편에게 털어내는 걸로는 성이 안 찬다. 글을 써서라도 털어버려야 내일의 딸이 선물해줄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을 담아낼 자리가 생긴다.


딸을 재워놓고 글을 쓰다보면 종일 지치도록 붙어있었던 딸이 문득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철없을 때 징그럽게도 많이 싸웠던 친정엄마한테 갑자기 미안해지기도 하고, 미워죽겠던 남편을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잠든 딸의 얼굴을 한번 쓸어보기도 하고, 엄마에게 메세지를 보내기도 하고, 남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기도 한다.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단함과 외로움과 미움도 글을 쓰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진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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