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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메디아 Jan 20. 2022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출발했다

2019년 2월의 나

충성을 다하는 정직원은 아니지만, 인턴 겸 사무보조직으로서 처음으로 돈 받고 일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매일 같이 퇴근 후에 자기소개서를 무지성으로 써대기 바빴고, 하나라도 얻어걸리면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마냥 엄근진 마인드로 시험장 및 면접장에 다가섰다.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지만)을 열성으로 휘갈겨대고 입으로 뱉어대는 내가 한심하면서도 대견했던 이유는, 형체가 불분명하지만 내가 바라는 무언가를 향해 잘 걸어가고 있음을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체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나는 꽤 괜찮은 기업들의 최종 면접에 응시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중 한 군데에서 나에게 '최종 합격'을 안겨다주었다. 다름 아닌 '학교법인 의료원', 쉽게 말하면 대학병원의 교직원(행정직)으로 일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혹자는 신의 직장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라고 얘기하는 그 교직원 맞다. 한동안 나의 이야기는 대학병원에서의 나의 직장 생활에 관한 것이 될 계획이다. A매치 금융공기업 준비와 전혀 무관해보이지만, 꽤나 연관성이 있으므로 읽어주기를 부탁드린다.


우선, 내가 왜 대학병원 교직원에 응시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하고 싶다. 독자들이 알다시피 나는 A매치 금융공기업을 준비하는 응시생이었다. A매치 금융공기업을 준비했던 이유는 금융의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거창한 형이상학만이 아니었다. 돈도 잘 주고, 워라밸도 나쁘지 않으며, 안정적인 직장이었던 것이 크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곧, A매치 금융공기업만을 신봉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추동이 나에게는 없었다는 의미다. 나의 Plan B는 A매치 금융공기업에 준하는 훌륭한 직장에 가는 것이었고, 대학병원 교직원은 충분히 그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지성 서류지원의 와중에도 대학교/대학병원 교직원 공고가 뜨면 웬만한 곳에는 다 지원했다. 무차별적이고 무지성인 지원이었으나, 최종 합격한다면 그나마 잘 다닐 수 있는 직장들에 지원한 것이므로 아예 무차별적이고 무지성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이 뇌를 거치지 않고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합격한 대학병원 인사팀에게 나의 자기소개서가 나쁘지 않았나보다. 딱히 결격사유가 없는 자기소개서와 스펙이 아니었을까. 운좋게 NCS 비스무리한 시험을 응시하게 되었고, 성적이 괜찮았는지 한 번뿐이었던 면접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6명의 어르신들이 앉아 있는 면접이었고, 응시자들도 6명이었다. 6대 6. 아침에 정신이 없어 정장 구두를 신는다는게 캐주얼한 로퍼를 신고 면접장에 와버렸다. '그래도 뭐, 어떡해. 이미 와 버린 걸.'

 


다행히 면접관들은 나의 신발보다 나의 말과 행동에 주목해주었다. 대학병원에서 계약직 교직원으로 이미 1년 가량 일해본 지원자도 있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높은 학점으로 졸업을 앞둔 지원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이 내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주어진 것.'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앞에 도사리고 있는 면접관들도 역시나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주어진 것에 긴장하는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해 서글퍼하고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체가 긴장으로 반응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덜덜 떨면서도 안 그런 척, 면접관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이런 난관을 거쳤고, 저런 갈등을 해결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런 동기를 갖고 이 곳에 지원한 사람이라고. 나에게 '주어진' 그들에게 나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위에서 언급했듯이 최종합격 메시지를 받았다. 불과 한 달 전에 최종 불합격 글자를 목격한 내가, 대학병원 교직원으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뿌듯했다. 자만하지 말아야했지만, 그 순간을 즐겼다. 주변에 알렸고, 많은 축하를 받았다. 물론, 원하던 기업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실패한 Plan A보다 성공한 Plan B가 더 소중했다. 그러나 Plan A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마음 한 켠에 Plan A, 즉 A매치 금융공기업에 입사하기로 결심한 나 자신을 고이 간직해두었다.


약 3주 간 나에게 금융산업 및 금융사 분석이라는 소중한 업무를 맡긴 스타트업과의 인연도 불가피하게 종료되었다. 동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빨리 다시 공고를 올려야겠다며 정신없어 했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나의 2019년 1월은 일종의 종료와 출발로 마무리되었다.


2019년 2월의 되었고, 설 연휴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첫 출근을 앞두었고, 긴장감은 사라졌다. 졸업식을 열흘 정도 앞두고, 나는 대학병원에 출근했다.


(다음)


<A매치 금융공기업 입사 공유의 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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