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너는 아이가 되어

동생의 행복이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by 빈틈


학교로 돌아갔고,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기들은 졸업을 했다. 그 사이, 나는 나보다 한 학번 적은 후배들에게 그저 이름조차 알길 없는 어설픈 복학생이 되어 버렸다.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애써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되는 것, 누군가와 억지로 시간 맞춰 밥을 먹거나, 버스를 함께 타러 가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외롭다기보다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되면서 자유가 생겨났고, 언제나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 물론 학교가 끝나면 부리나케 버스를 타고, 신촌역에 내려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학교를 다니는 게, 내가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행복했다.


“A야. 너 혹시 조기 취업할 생각 있어?”


평소 자주 이야기 나누었던 학과 조교님의 제안이었다. 고작 내 나이 스물셋.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해왔지만 직업을 갖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상태였던 나는 그 제안이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학기 종강을 한 달 앞두고, 취업을 했다. 한 달 동안 학업과 학원 일을 병행해야 했지만 마지막 학기에 가장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수습 기간이었던 한 달 동안 매일 강의하는 법, 학원 시스템을 배웠다. 정신없고, 어려웠지만 빨리 적응해서 일을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 학기가 남은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쌍둥이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적성에도 잘 맞았는지 성적도 좋았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내가 자퇴하고 얼마 후, 동생도 자퇴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동생이 선택했던 과는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많은 공부량이 필요했는데, 아르바이를 하고 와서 학교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면 새벽 3시가 넘어가는 동생에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싶었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괴로워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공부를 했으면 했다.


그래서 1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었지만 나는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 첫 월급이었던 130만 원 중 학자금 대출금으로 60만 원을 갚고, 남는 돈 70만 원 중 30만 원을 동생에게 주었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동생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행복했다.


동생의 행복, 그것만이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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