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4전 5기'의 복서 홍수환이 애타게 엄마를 불렀다. 그의 어머니 황농선씨는 "수환아, 귀에 피는?"이라고 물은 뒤 대한국민 만세를 외쳤다. 1973년 7월3일 남아공 더반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 직후였다.
챔피언에 등극한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 황농선씨의 라디오 대화가 70년대 한국 스포츠의 존재 이유를 압축했다. 홍수환의 챔피언 등극을 현장에서 보던 20여 명의 한국인 원양어선 선원들이 육성으로 애국가를 부르자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현장 라디오 중계팀이 홍수환과 황농선씨를 전화로 연결해 이러한 장면이 탄생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가 울려 퍼진 장면은 정부가 꿰던 스포츠 정책에 꼭 맞는 단추였다.
1970년대 스포츠는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스포츠였다. 국가를 위한 스포츠의 처음과 끝은 애국심 고취였다. 국가를 위한 스포츠의 의무복무였는데 이런 기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복싱을 포함해 종목별 국가대항전이 벌어지면 이길만한 경기를 방송사들이 녹화해 중계했다. 국내 선수나 팀이 지기라도 하면 국민 사기에 저하만 가져올 뿐 하나도 이득이 안 된다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1973년의 홍수환도 만약 졌다면 영창에 끌려간 뒤 유격 훈련을 단내나도록 받고 "엄마, 나 짬밥 잘먹고 있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홍수환은 수도경기사령부 일병이었는데 경기에 지는 즉시 '영창행'과 '유격훈련행'이 예약돼 있었다.
국가복무에 입각한 스포츠는 1990년대 경제 발전과 신흥 소비문화가 싹트면서 난기류를 탔다. 정부 주도하에 1980년대 출범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10년여 세월을 넘기면서 '여가선용'의 기능을 수행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중심으로 스포츠 선수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으며 배고픈 이들이 일약 큰돈을 벌 수 있는 계급 상승의 직종이라고 인식됐다. 당시에도 최고급 선수는 아파트 몇 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뒤를 이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엔 프로농구와 프로배구까지 출범했다. 한국은 4계절 내내 프로스포츠가 벌어지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가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가 '국위 선양'을 위한 스포츠였다면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와 동시에 '여가 선용'을 위한 스포츠 시대였다. 아직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이 스포츠계에 남아있어서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공중파에서 야구나 축구 중계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그 성격이 남이 있는 국위 선양으로서의 스포츠와 소비 세대들의 '여가 선용'으로서의 스포츠가 혼재해 존재했다.
그리고 이는 2002년 "대~한민국"으로 정리되는 한일 월드컵에서 절정에 달해 국위선양과 국민 전체의 즐길 거리라는 가치관이 동시에 꼭짓점을 찍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경제 침체를 잇달아 겪으면서 모든 사회 이슈는 경제 문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뒷순위였던 스포츠는 이때를 기점으로 스포츠 전문 언론의 경영 악화와 함께 퇴로를 걸었다. "스포츠가 도대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데?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해?"라는 본질적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의하지 않고선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국내 프로스포츠의 관중 감소와 메가스포츠이벤트의 시청률 감소를 설명할 수가 없다.
문제는 스포츠의 존재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돈의 2010년대로 넘어왔다는 점이다. 지난 시절의 가파른 경제 성장이 멈춘 뒤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재정의가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국가' 개념보다는 '시민' 개념이 씨 뿌리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국가주도의 스포츠와 체육 정책 역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스포츠를 둘러싼 국위선양이라는 낡은 정부 중심 사고관에 시민들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2012 소치동계올림픽, 2014 인천아시안게임, 2016 리우올림픽을 지나면서 그를 다루는 미디어에 대한 시민의 요구를 미디어가 따라가지 못했다. 미디어는 여전히 금메달 신화에 집착했다. 하지만 금메달 개수와 종합순위가 결코 나라의 국력과 개인의 삶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시민들이 먼저 지적하고 꼬집었다. 급기야 "왜 비인기 종목과 여타 종목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다른 나라 선수 경기는 중계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빗발치기에 이르렀다. 메가스포츠이벤트 시청률은 반 토막 났으며 각 프로스포츠의 주말 경기가 높은 시청률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전히 스포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사회적 시선에선 불분명하다. 2017년 중반을 관통하는 시점에서 단순히 스포츠 기사를 소비하고 경기를 시청하는 것 이상의 가치는 뭘까.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국위선양이 있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여가 선용이 있었는데 2017년엔 그 합목적성이 부재중이다. 국위선양이 깨졌으니 여전히 여가 선용이 스포츠의 첫 번째 존재 이유인가? 그렇게 정의하기엔 너무도 즐길 거리가 많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잘 나가던 프로야구 관중 수도 줄어들고 있으며 프로축구와 프로농구는 보는 사람만 보는 스포츠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특정 종목 스포츠의 경쟁 대상은 타 종목이 아니라 영화, 게임, 유튜브, 아프리카 방송, 맛집, 해외여행 등이며 심지어 요즘엔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는 정치권 이슈다.
힌트는 하나 있다. 외국의 스포츠 발전 역사와 체육사를 더듬을수록 우리와 비슷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몇몇 다른 국가들도 국가주도, 국위선양, 여가선용의 시대를 통과해 '생활체육'이라는 풀뿌리 스포츠와 체육이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독일이나 일본이 있으며 호주는 수영에서 특히 그런 모습이 있는 것으로 안다. 서유럽의 축구 발전은 굳이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모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학생 선수들 공부시켜라" "체벌하지 마라" "인권 존중하라" "생활체육시설 확대하자" 등의 구호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상 당연한 절차로 보인다. 몇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 긍정적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부와 제도권 인사들의 인식이다. 지난 정권에서 '나쁜 사람'으로 찍혔던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 국장이 문재인 정부 문체부 제2차관으로 최근 화려하게 부활했다. 기쁘면서도 내심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포츠나 체육의 최고위 공직자라고 할 수 있는 직급이 아직은 차관이라는 점을 봤을 때 그렇다. 체육정책을 전담할 '체육청 신설'이 한때 논의되기도 했는데 아직은 현실화가 어려운 분위기다.
그 가운데 대한체육회는 여전히 '부정 선거' 잡음에 휩싸인 상태다. 이기흥 회장의 정권 줄 대기 인사에 전횡이 발생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내 정보통 사이에선 정확한 재선 일자까지 돌고 있다. 스포츠와 체육의 존재 목적이 불분명하고 어쩌면 과도기의 진공상태인 것으로 명명할 수도 있어서 더 우악스럽다. 마치 시민들의 스포츠 중계 프레임 변화를 미디어가 따라가지 못했던 것처럼 아래에서의 변화 요구를 위에서 받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