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실명 언급...배구협회는 제대로 듣고 있나?
인천AG 때부터 논란 일으켜...선수 위한 행정 해야
이미 프로스포츠와 국가대표 관계 뒤집힌 지 오래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잡으러 간다. 그런데 둘의 길거리 난투극 초반 서도철은 조태오한테 얻어터진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맞는다고 생각이 들쯤 서도철이 "지금부터 정당방위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형사가 무리하게 일반인을 제압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서도철은 일부러 조태오한테 맞은 뒤 응징하기 위해 때를 기다렸던 거다. 결국 서도철은 판이 뒤집혔다는 걸 증거로 남긴다. 길거리에서 이 둘의 난투극을 지켜보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행인들이 서도철의 정당방위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는 순간이다.
7일 여자배구대표팀의 '간판선수' 김연경의 작심 발언을 보며 이 장면이 떠올랐다면 과한 해석일까.
프로 선수와 종목 협회와 국가대표의 관계는 감시하는 눈이 많아지면서 일찌감치 판이 뒤집혔다. 그런 흐름이 다른 종목에서 이제는 배구까지 넘어왔다. 김연경이 터뜨린 논쟁적인 말들을 이재영이라는 특정 선수를 향한 직격탄으로만 보지 않길 바란다. 더불어 배구협회는 귀를 좀 기울였으면 한다.
"이재영이 이번 명단에 들어왔어야 했다. 팀에서 경기 뛰고 훈련도 소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요한 대회만 뛰겠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하면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
김연경은 이날 아시아 여자배구 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필리핀으로 향하기 전 인천국제공항에서 가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대회는 2020 도쿄올림픽 지역 예선을 겸할 가능성이 있어 놓칠 수 없는 대회로 꼽힌다.
위태위태하던 배구협회가 김연경의 발언으로 도마 위에 오른 모양새다. 이재영이라는 선수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넓은 관점에서 보는 게 옳아 보인다.
확대해보면 이재영이라는 선수 실명을 거론하면서 '배구대표팀이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셈이다. 특히 지난달 국제배구연맹 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도 여자배구대표팀은 엔트리 14명에서 1명이 적은 13명만 참여했다. 김연경은 이를 근거로 삼아 지금의 세태와 배구협회의 닫힌 행정을 비판한 셈이다.
김연경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협회에 큰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도 돈을 많이 받아서 대표팀에 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엔트리와 같은 기본적인 지원조차 이뤄지지 않으면 솔직히 말해서 고생만 한다는 생각만 든다."
사실 이재영이라는 선수를 거론해서 이 사안은 더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이재영의 소속팀인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이재영이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팀에 합류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나 몸이 안 좋은 상태다"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읽어야 할 포인트는 '이재영'이 아닌 '대표팀'과 '협회'라는 키워드다. 배구협회 차원에서 국가대표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뒤떨어지며 그 가운데 대표팀 지원마저 엉망이니까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다. 당장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데 하필 이재영이란 선수가 지금 상황에서 사례로 걸린 것뿐이다.
여러 갈래의 팩트가 있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엔트리도 다 채우지 못한 채로 국가대표가 운영되고 있으며 선수단 사이에서 뛸 수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 선수가 국가대표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이 두 가지 팩트를 주목해서 이번 사안을 읽어내고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사실 이는 하나의 스포츠 내부 현상으로도 읽힌다. 이미 4대 프로스포츠라고 불리는 구기 종목에서 야구와 농구는 국가대표 기피 현상이 일어난 지 꽤 됐다. 정확히 몇 년부터라고 딱 끊을 수는 없지만 대략 2010년 들어서면서부터 그랬다. 이때를 즈음으로 남자 선수들은 병역 혜택이 걸려있지 않으면 국가대표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게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자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당장 비시즌에 휴식부터 회복훈련까지 다양한 일정을 소화해야 다음 시즌을 또 버티고 그게 몸값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중간에 국가대표에 끌려나가는 걸 누가 좋아할까.
끌려나간다는 표현을 굳이 쓴 이유는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이재영 도 굳이 연봉을 얘기해보자면 1억 500만 원이 넘는다. 운동선수는 당장 내년 벌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영업자 중에서도 특수 자영업자에 속한다. 선수 생활 자체도 육체 노화라는 특수성 때문에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축구는 조금 달라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축구는 국가대표에 뽑혀 경기에 나서는 자체가 사실 거대한 시장에 자신을 어필하는 행동이다. 축구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월드컵이 있으며 전 세계적인 선수 시장이 있으므로 국가대표로 월드컵을 포함한 각종 대항전에 나가는 것 자체가 자기 몸값을 올릴 수 있는 행위다.
4대 종목의 국가대표 기피 현상은 스포츠를 하나의 산업으로 봤을 때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사회 현상으로 봐도 그렇다. 몸값을 받는 선수가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한다면 어느 누가 큰 혜택도 없는 대표팀에 나가려 할까? 이는 사실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자유의지의 영역이고 개인의 생계가 달린 문제다.
이제는 개인의 의지에 따른 국가대표 차출 거부를 인정해야 한다. 이번 사안에서도 설사 이재영이 뛸 수 있는데 국가대표를 거부했더라도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마치 법률을 위반한 것처럼 제재하거나 범죄자 취급해선 안 된다. 그건 화풀이이자 마녀사냥이다. 정리하자면 김연경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을 했으며 이재영도 굳이 지금의 몸 상태가 좋든 나쁘든 관계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김연경의 이번 발언은 국가대표 운영이 지금처럼 되는 게 맞는지 곱씹는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여자 배구대표팀은 지난 인천아시안게임 우승 직후 배구협회가 마련한 진수성찬이 아닌 '김치찌개' 회식 논란에 휩싸여 김연경이 사비로 선수단 회식을 했다는 얘기도 나온 바 있다. 최근엔 원정길에 몇몇 선수들을 신장으로 잘라 비행기 좌석을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으로 나눠 논란을 일으켰다.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오한남 신임 배구협회장은 강남 고급 호텔에서 취임식을 열었다.
이토록 잡음이 끊이지 않으며 반복되는 불명예가 번지는 상황이니 이번엔 배구협회가 먼저 나서서 김연경의 발언을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하나의 작은 균열이 모여 자칫 근엄한 척 한 자리씩 하고 있으려는 내부자들의 밥그릇을 깨트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