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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Sep 14. 2017

롯데와 부산과 최동원

최동원은 1975년 경남고 2학년 시절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그다음 경기인 선린상고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 행진을 펼치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983년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한 최동원은 이듬해인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를 상대로 1, 3, 5, 6, 7차전에 모두 등판했다. 4승을 따낸 최동원은 롯데를 정상에 올려놨다.


당대 최고 스타로 떠오른 최동원은 1988년 선수협의회를 결성했다. 자신은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인 연봉 8910만원을 받으면서도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 보장을 포함해 선수 권리와 복지를 위해 단체 결성을 주도했다.


최동원은 "같이 운동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동원의 선수협의회 설립을 자문했던 변호사는 문재인 현 대통령이었다.


그해 선수 142명이 참석한 선수협의회 첫 창립총회에서 최동원은 초대 회장으로 뽑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최동원은 구단들에 찍혀 고향 부산을 떠나 삼성으로 팀을 옮겨야 했다. 선수협의회 출범도 실패로 끝났다. 부산을 떠난 이후 전과 다르게 부진을 거듭한 최동원은 1991년 시즌을 앞두고 은퇴했다.


최동원은 은퇴 후 민주당 후보로 1991년 부산 서구 광역의원에 출마했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낙선했다.


이후 선수협의회는 2000년 다시 결성돼 현재의 선수협회가 됐다. 야구 선수들의 권리와 복지를 위한 이 단체를 두고 최동원의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했다고 야구계 대다수는 인정했다. 그렇게 최동원을 향한 관심이 다시 커질 때쯤 이미 그는 그라운드 밖에서 쓸쓸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최동원은 지도자로 그라운드에 서고 싶었지만 그를 불러주는 구단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동원은 2001년 한화이글스 투수코치를 지낸 뒤 2군 감독까지 맡았다. 하지만 최동원은 자신의 고향과도 같았던 롯데 유니폼을 다시 입지는 못했다.


최동원은 2007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1년 9월14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롯데는 추모식을 열고 최동원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88년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벗은 이후 23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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