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와 남북 정상회담을 보며
세월호 참사 이후 끊긴 인천-제주 뱃길이 다시 연결된다. 신규 사업자가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노선을 운항한다고 한다. 그날의 참사 이후 네 번째 봄을 지나는 30일 신문 기사로 소식을 접했다.
4년으로 뭉뚱그려 그날 이후 1460일을 훌쩍 넘겼다. 진실은 여전히 인양되지 않은 채 갇혀 있다. 그날 있어야 할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이들 중 일부만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의 양심 없는 침묵을 여러 증거로 단죄하긴 했다. 다음 달이면 쓰러진 배가 일으켜 세워진다고 하니 지금은 배가 드러내 보일 상흔들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는 시대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어쩌면 굳이 수많은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도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지도자와 정치권력을 목도하고서야 우리 중 더 많은 이들이 올바름을 깨달았다.
이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엄격한 진실로 기능하려면 우리는 이 배에서 명백한 원인을 찾아내고 입증해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과오를 벗어던지고 좀 더 밝은 미래를 맞기 위한 과정에서 절대적인 사명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이를 직접 겪은 이들의 개인 슬픔을 넘어 국가라는 환상 속 합의된 체제의 존재 이유를 묻는 시대의 자문으로 승화했다.
참사 원인을 입증하는 것은 독재 정권의 빛을 무턱대고 찬양하던 시대를 지나 그때의 어두웠던 그림자와 고통들이 뒤늦게 사실로 드러난 것과 같다. 감출 수 있는 진실이란 이 세상에 없으며 그렇기에 우리가 거짓을 뒤로하고 사실의 명쾌함을 따라야 한다는 서사는 그때부터 올바르게 작동했다.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올바른 사실로서의 사회 담론 형성이 뒤따라야 한다는 데에서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내야 하는 당면함을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무논리와 무형식의 정치권 언어를 배척하고 그를 배제하는 일차원적인 거름망은 우리 사회 모든 시민의 힘에서 나온다. 쓰러진 세월호를 통해 우리는 이를 잊어선 안 된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진실을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합의한 수용이자 이제는 시대가 먼저 도도히 요구하고 있는 과제가 되었다. 적어도 저 옛날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 역사책에서의 기록이 아닌 우리 모두가 생생히 본 잔인하고 날 선 질문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를 살아내며 네 번째 봄을 관통하고 있지만 우리네 구석구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치권력이 한쪽에서 다른 곳으로 집을 짓고 광장의 함성이 겨우내 그것을 이끌어냈지만 정말 그거면 충분한 것일까.
여전히 구태들은 역사의 발걸음 앞에서 발악하며 축적한 것을 잃지 않으려고 구시대의 관행들을 추종한다. 정상적인 야당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가해자 집단이자 그들 정치인의 말은 더욱 교묘해졌다. 본질을 가리는 왜곡들은 아예 시민의 거센 비난조차 또 다른 여론 형성의 성공인 것 마냥 그들 사이의 자화 자잔을 부르고 있다.
네 번째 봄 앞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정치 의제로 가져가는 술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왜 아직도 그날을 끌어오고 리본을 다느냐는 반문은 본질에서 빗겨 난 그들의 곁가지에서 태어나 꿈틀대고 있다. 사회 모두의 일관된 관점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생명의 허무한 죽음 앞에서 당사자와 목격자들에게 이념이란 공허하게 뒤로 밀린 사치일 뿐이다.
모든 글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일단 인정하겠다. 그렇더라도 아우르자면 지난주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를 부정한 언어와 '또 북한에게 당할 것이냐'며 채근하는 진영 논리자들의 선전 역시 허무한 이념과 여기저기 가져다가 붙이는 누더기 비논리의 연장선이다.
이는 주린 배를 채울 양식이 없어 뼈만 앙상히 남은 논리 박약자의 술수다. 의례 그렇게 해왔던 것이 지금도 통할 것이라는 파편적 사고에서 나온 관성이자 시대를 잘못 읽은 오독이다. 그들이 신봉하며 사고 판 '한반도 안보'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건만 왜 단번에 잎이 자라지 않느냐고 고압적인 말을 내뱉는 셈이다. '어처구니없다'는 발언은 그래서 더 '왜 아직도 노란 리본이냐'는 물음과 닮아 진정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첫 번째 봄부터 지금까지를 복귀할수록 얼마나 더 많은 진실을 입증하고 비상식을 몰아내야 상식에서 확대된 담론만이 존재할지 섬뜩하다.
어쩌면 그런 날은 유토피아처럼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다수의 토론과 합의가 전제인 체제가 존재하며 견제가 가능하다고 누군가는 반론할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그것이 상식인가 아닌가를 누구나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봄과 여섯 번째 봄이 조금은 더 진실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