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가면

by 반동희

사람을 만나다 보면 대화는 늘 고만고만한 주제로 수렴한다.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끝내는 돈 버는 일이나 잘 먹고 잘 쓰는 얘기로 귀결한다. 술잔을 채워 돌리는 것도 정치고 잔을 비운 뒤 그다음 잔을 따르는 시간도 전부 정치 같을 때가 다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가면무도회’가 이런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한다.

여기서 돈 버는 일이나 잘 먹고 잘 쓰는 얘기로의 귀결은 결국 나와 너의 배경과 지위를 돌려서 아우르고 찌르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는 여기서도 물길을 내어 사이사이를 흐른다.


어느 날인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던 중 은근슬쩍 웃음이 나와 혼자 웃었다. 그날 자리에 앉아 쓰고 있던 가면이 도착해서 벗겨진 기분이었는데 도대체 이러한 취기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버텼는지 코미디 같아 허공에 웃었다. 한편으론 상대가 썼던 가면이 벗겨진 걸 보지 못해 오늘도 실패했구나 했다. 사실 처음 보는 이와 술 앞에서의 가면은 매우 걸쭉하게 달라붙은 것이어서 정신을 놓고 뻗어버리지 않는 이상 탈착 될 일이 없다. 취기에 말이 빙빙 돌고 쓰러질 듯 몸이 비틀거려도 그것은 아주 조금 프로답지 못한 것일 뿐 가면을 떼어내진 못한다.


지금보다 더 어린 어느 날에는 술이 버거워 집 앞 나무를 부여잡고 구토했다.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애꿎은 나무를 텅텅 두들기기도 했다. 나무를 때릴수록 손바닥보다 골이 댕댕거리며 머리통 속에서 굴러다녔다. 비틀거리는 다리보다 더 잘 경거망동하는 머릿속이 신기해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도 생생했다. 전부 가면이 지켜준 버티기 시간 연장의 효과였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흔히 모이면 그렇듯 대화는 꽤 오랜 시간 탐색기를 거친다. 그러다가 이 탐색기가 얼큰한 취기에 밀려나면 허무하고 우스울 때가 많다. 이를테면 나와 마주한 당신이 어느 배경을 뒤로하고 어느 위치에 있느냐를 주먹을 내지르는 원시적인 방법 대신 언어와 운율을 섞어 논파하는 것이다. 어찌나 매번 똑같은 프레임인지 데칼코마니도 이러한 데칼코마니가 없다.


이것은 내 주장만이 아니라 인류문화학자들이 종종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뿌리다. XY 염색체를 가진 남성의 진화 자체가 그러한 과정과 풍화를 거쳤다고 그들은 말한다. 생존이라는 인간 지상의 숙제에서 공간을 지배하는 복수의 생명체를 버티기 위해 XY들은 그렇게 살았단다.


그들 주장을 들어보면 ‘나’와 ‘너’로 갈라치는 단순 이분법은 낯설수록 장막을 친다. 그 장막을 걷어내기까지는 시간이 비례하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장막은 높아만 간다. 스스로 보수화된다거나 꼰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부류들이 가끔 있는데 이는 놀랍게도 진화를 거스르는 돌연변이인 셈이다.


실제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많이 다치고 위험한 일을 자주 벌여 보험료가 비싸다. 보험은 이 사회의 모든 금융지식을 압축해 그것을 잘 모르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가져가기 위한 합법적인 도구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로 방점을 찍는 사회에서 남자아이의 비싼 보험료와 XY 염색체의 진화를 개진하는 학자들의 설명은 맞물린다.


이 모든 것을 아는 척 쓰면서도 어딘지 찝찝한 건 앞으로도 이따금 술과 가면이 함께할 공간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태반이 실업자라는 ‘백수 시대’에 오히려 가면을 쓸 수 있다는 기회 속에서 안도하기도 하는데 또 얼마나 집 앞 나무를 때릴까 걱정되는 비겁함도 동시에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