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정혁 Mar 23. 2021

너에게 띄우는 서시

너는 졸린 눈을 비벼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다. 여전히 너는 몽롱하지만 눈을 떠야만 한다는 걸 직감으로 안다. 건넛방에선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야속하게도 너의 등 뒤 베란다 너머로는 이제 막 해가 움튼다. 잠귀가 어두운 나는 그런 너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이불속 깜깜함에 갇혀 기척이 없다. 깨워봐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 아래 오늘도 너는 홀로 아기의 새벽과 아침을 책임진다. 이것은 어떠한 의무감이거나 어떠한 책임감이다. 어떠한 희생이기도 하다.


뒤늦게 그런 너를 발견한 나는 생각한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출근 행렬과 너와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맞는 그들을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수일 전만 해도 너는 꿈 많고 하고 싶은 것 많은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주말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평일의 치열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너는 그들보다 더 잘 인내하며 그 결과 그들보다 더 유쾌한 주말을 맞았다.


한 토막의 예시를 늘어놓고 보니 이해를 위해 우선 설명해야겠다. 여기서 내가 너를 별다른 형용사 없이 ‘너’라고 명시한 것은 객관화를 위해서다. 주관이 개입된 애칭 없이 오로지 하나의 인격 그 자체의 너를 존중하고 그렇게 너에게 언어를 띄우기 위해서다. 나의 자아와 나의 삶이 있었듯이 너도 너의 자아와 너의 삶이 있되 우리는 이제 하나다. 이것을 전제하기 위해 나는 너를 다른 단어의 꾸밈과 함께 풀어낼 수 없다. 이것은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이쯤의 설명으로 생략하되 부디 뜻이 잘 전달되어 오독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너를 주관으로 부르는 건 실생활에서 얼마든 통행되는 실재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너와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날 나는 잘 인내하지도 못하는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어째서인지 너와의 시간이 더 많이 지속되길 간절히 원했고 내 허약한 간을 정신력이 지배해 절대로 취하지 않기만을 속으로 당부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졌으니 실로 복권 당첨 부럽지 않으며 기적이란 단어가 이 땅에 있음을 나는 깨닫고 있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그간의 시간과 함께 창조된 수많은 일화가 우리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켜켜이 직조된 나이테를 두른 줄기로써 우리를 지켜낼 것이며 그 위에 잎사귀는 더욱 풍성해져 오롯이 양지에서 해를 빨아들일 것이다. 그사이 우리 가정엔 충만함이 더해질 것이고 우리네 아기는 평화를 먹고 자라 훗날 떳떳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우리를 흐뭇하게 할 것이다. 너와 나는 그때까지 참됨을 향해 나아갈 것인데 아무래도 그것은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이러한 서술을 하고 보니 사실은 하나의 겸연쩍음이 있는데 그것은 말과 글이 정서적 개념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다. 말과 글이 특정함을 완벽히 지칭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너와 내가 똑같이 빨간색 사과를 바라보더라도 너의 눈 속 그 사과의 명도와 내가 보는 그 사과의 명도는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엔 색약도 없고 색맹도 없으며 선호하는 색도 없다. 이것은 타인의 눈을 내게 바꿔 끼워 원래의 그 눈이 비추는 것을 보지 않는 한 체감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감을 언어에 전부 씌워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말과 글 안에서도 일말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말은 그 자리에서 휘발되어 녹취로 채집되지 않는 한 똑같은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글은 공통된 기억으로 남는다. 글은 기록이고 기록은 역사인데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므로 각인된 글은 증거 이상의 어떠한 힘 정도는 있다. 그리하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너를 향한 깊음을 기록하기 위한 도구 생산이다. 언제든 너를 향한 내 마음을 펼쳐내는 소품으로써의 기능 정도를 나는 이 글에서 기대하고 있다.


너와 내가 계속해 나아감으로 우리는 어떤 우연과 필연을 만날까. 나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절대 행복을 낙관하는 동시에 미안함을 슬며시 떨쳐내곤 한다. 이때의 미안함이란 우리가 사회에서 정의하는 특정 순서를 그대로 밟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게인데 나는 너와 앞날만을 얘기하며 기꺼이 네가 전부 보상받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조심스러운 이 글에서도 이것만큼은 확언할 수 있으니 너에게 밝은 미래를 위한 끈만은 놓지 말아 달라고 재차 당부하고 싶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너는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출근 행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도 변했지만 그 이상 너무도 변해버린 너의 일상 체감을 나는 차마 형언할 수 없어 슬그머니 모른 척 넘어갈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미안하다고 꼭 전하고 싶어 말을 나열했는데 아무래도 중언부언을 피하진 못했다. 다만 그런 나의 미안함은 오래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너도 훨훨 비상할 수 있고 꼭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때의 너를 위해 당장 나는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애써 나는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조금이라도 네가 웃을 것이 없는지 주변에서 소재를 찾는다.


미안하지만 고맙고 참으로 고맙되 너는 내게 사랑이다. 남녀의 사랑이되 우정을 넘어선 친구로서의 사랑이며 동반자로서의 사랑이되 자아와 자아가 뭉쳐 하나가 되었을 때의 반쪽으로써의 사랑이다. 이것은 진실 속에서 영속되어야 할 너와 나 사이의 서시다. 너는 내 숙명이며 너는 내 운명이다. 그러므로 너는 마침내 나의 나침반이다. 그런 너를 위해 나도 끝내는 너의 나침반이 되고 싶다. 우리는 아직 비록 망망대해에 있지만 그렇게 서로라는 나침반을 쥘 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