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에서 얻어온 것들

잔잔한 태도와 투명한 눈빛…지금을 어떻게 살 것인가

by 반동희

즉흥적이었다. 소셜커머스에 접속한 게 화근이었다. 원래는 강아지 사료를 사려고 들어갔다. 그런데 모니터 한쪽에서 반짝이는 '보라카이'를 지나칠 수 없었다. 곧장 떨이로 판다는 티켓을 샀다. 사흘 뒤 떠나는 3박 5일 일정이었다. 여행자는 나 혼자였다.


그렇게 혼자 질러버린 여행은 생애 첫 혼자만의 해외여행이 됐다. 가난한 삶에서 해외여행은 늘 먼 나라 얘기였다. 그때는 사표를 쓰고 막 퇴직금이 나왔을 때였다. '이 돈마저 카드사에 뺏기기 싫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만큼 큰 맘먹고 저지른 일이었다. 다녀오면 어떻게든 생활은 될 것이란 무지막지함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번졌다.


그렇게 '2월의 보라카이'를 만나러 갔다. 오후 4시 20분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대다수가 신혼부부들과 커플들이었다. 비행기가 뜨고 달이 어깨와 수평을 이루는 높이에 올랐을 때 묘한 외로움이 꿈틀댔다. 폭발하는 감성을 달래려 배낭에서 <코스모스>를 꺼내 읽었다. 칼 세이건의 우주 설명을 구름 위에서 만나면서 그럭저럭 외로움을 덜어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어둠이 창밖을 칠했다. 비행기 승객 대다수가 잠들었다. 하지만 난 비행시간인 4시간 넘게 잠들지 않았다. 필리핀인 승무원들의 몸동작부터 비행기 내 각종 모습까지 세세히 눈에 담았다. 카드값과 맞바꾼 기회를 잠으로 때워버릴 순 없었다. 가난 속에서 피어오른 사치는 인간의 수면 욕구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뽐냈다.


보라카이로 가는 길은 또 하나의 여행 그 자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지독히 느린 입국 절차를 밟았다. 여자 직원은 줄이 무시무시하게 늘어져 있는데도 갑자기 일어나 태연하게 화장실을 다녀왔다. 모든 작업은 직접 직원이 여권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는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안 그래도 느려 터진 그들의 일 처리는 과장 조금 더 보태 달팽이가 기어가는 정도의 느림의 미학을 구현했다.


그렇게 필리핀 땅을 밟자마자 환전을 한 뒤 곧장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곤 또다시 끝 모를 곳으로 2시간을 타고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배를 타고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야 진정한 도착을 이룰 수 있었다. 가고 또 가다 보니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예약된 리조트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공항, 버스, 배에서 하루를 다 보냈으나 '여행이란 원래 머릿속에 계획한 시점부터'라는 글로 배운 해외여행 경험 덕분에 시간이 아깝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곧장 잠들 수는 없었다. 방에 짐을 풀자마자 멍하니 리조트 밤하늘을 보며 캔맥주 4개를 홀짝였다. 냉장고에는 그토록 좋아하는 산미구엘이 가득했다. 썬배드에 누워 산미구엘을 빨대로 빨아먹으니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평소 캔맥주 2개만 먹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그날만큼은 4개를 까도 눈만 말똥말똥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과 보라카이 특유의 끈적끈적하면서도 가벼운 듯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심지어 그렇게 잠이 들어 10시간은 족히 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고작 8시였다. 새벽 3시에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으니 정확히 절반의 시간을 번 셈이다. 청아한 공기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면부터 '느린 삶' 혹은 '검소한 삶'을 경험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이어진 일정은 그야말로 '멍 때리기'의 결정판이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보라카이에서의 나였으면 그 대회쯤은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화이트비치의 투명함과 풍요로움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다는 우리나라의 모든 바다를 뒷전으로 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맑은 바닷물은 처음 봤다. 고운 모래는 속옷 속으로 들어와도 모를 정도의 일체감을 자랑했다. 모래는 발바닥에 알알이 박혔으며 박힌 모래를 에메랄드 물이 긁어냈다. 긁어낸 그 자리엔 다시 고슬고슬한 모래가 밀려 들어오는 게 반복됐다. '에메랄드 빛깔' 바다에 몸을 담근 채 얼굴만 모래사장에 내놓고 엎드려 있는 것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공짜로 스테이크를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황홀함이었다. 러시아, 캐나다, 미국, 남미 몇몇 국가 여인들의 아름다운 비키니 자태는 일단 여기에 다 풀어낼 수 없으니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상상에 맡긴 채 넘어가겠다.


해변을 배회하다 TV에서 미국 프로농구가 나오고 있는 스포츠 펍에 들어갔다. 펍에서 술을 내주는 중년의 현지인 아저씨는 자신을 '레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필리핀이 자랑하는 복서 파퀴아오와 그의 독일 유럽 여행 얘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필리핀과 한국의 스포츠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의 해석도 풀어봤다. "스포츠라이터"라고 나를 소개했을 때 레지는 한국의 축구대표팀과 인천 아시안게임 결과 등을 물어봤다. 이후 한국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 내가 쓴 영어는 '베리 패스트'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빠른 문화와 서울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 따위를 전해줬다. 스포츠 펍을 하나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더니 보라카이에 와서 차리라며 자기가 자리 좋은 곳을 알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 차마 태어나 두 번째 해외여행이며 한국 땅에 내리는 순간 카드값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영어가 짧아서 하지 못한 것이다.


해변 따라 줄 서 있는 노점상 사이에서의 배회도 재미있었다. 밥, 빵, 망고 주스, 오렌지 주스, 돼지고기 볶음을 혼자 먹는 사치도 즐겼다. 하늘에 떠오른 구름이 솜이불처럼 푹신하게 보이는 풍경도 사진보다는 영원히 눈에 담고 싶은 장관이었다. 햇살은 눈을 간지럽혔으며 기분 좋은 웃음은 저절로 내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짧은 반바지에 현지에서 산 1000원짜리 빨간색 슬리퍼를 신은 뒤 나시티만 입은 채 돌아다니는 시간은 그 자체가 곧 힐링이었다. 노점상 사이에서 괜한 영어도 남발해보며 전화영어만 해도 관광 영어는 충분히 통한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해 질 녘 해변 축구를 하는 아이들한테 다가가 "암 어 스포츠라이터"라고 할 때 나를 쳐다보던 그 아이들의 눈빛도 바닷물처럼 투명했다. 물론 내가 총알처럼 빠른 슈팅을 했을 때 한 아이는 나한테 "공정하지 않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그 꼬맹이들한테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다가 꼭꼭 숨겨버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런 말들은 한국에서나 푸념으로 늘어놓을 수 있는 말들이었다.


저녁에는 거리 자체가 축제로 변했다. 길거리 앞에서의 단체 공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변은 곧장 대학교 축제의 일일주점처럼 바뀌었다. 클럽도 종종 보였는데 딱히 돈을 내고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 안이 훤히 보였다. 눈으로만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해변 비치에서 맥주를 먹으며 건너편에 보이는 클럽 음악에 몸을 흔들 수 있었다. 다만 주문을 할 때마다 팁을 줘야 하는 게 처음엔 어색했다. 하지만 그 또한 생각을 달리해 '한 명만 파자'라고 작전을 세운 뒤 매번 같은 사람한테 팁을 주며 주문을 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밤에 갔을 때는 거의 뭐 나를 VIP급으로 대접했다. 혼자 왔으면 자기가 부킹을 주선하겠다는 유혹도 했다. 물론 나는 매우 깔끔하게 그의 제안을 돌려세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아마도 낮에 본 비키니 여인들의 잔상이 머리에 남아서 그랬을 수 있다는 느낌도 솔직히 든다.


귀국을 앞둔 마지막 날 날씨는 흐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카드값을 메워야 하는 나의 심정과도 같았다. 다행히 날씨가 좋지 않아 돌아와야만 하는 아쉬움은 덜했다. 그래도 보라카이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는 되짚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결론은 매사 잔잔하고 여유 있는 그들의 태도와 뭐든 투명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챙기자는 거였다. 이건 잔잔한 보라카이가 자랑하는 잔잔한 파도와 투명한 바닷물과도 맞닿아 있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다시 환경을 감싸는 삶의 공식이 엿보였다.


보라카이가 세계 3대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과 그들에게서 끌어내 가져와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래서 카드값은 어떻게 됐냐는 물음이 날아온다면 "다행히 온몸에 장기가 멀쩡히 붙어있으며 이렇게 노트북에서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삶이란 말을 조금은 믿는다. 필요한 건 잔잔한 태도와 투명한 눈빛이다. 그리고 '지금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답이다.


보라카이에서 얻어온 것들 2 읽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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