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9일, 여성학자 정희진은 〈경향신문〉에 “내가 진중권 글에 분노한 이유”라는 칼럼을 기고하였다. 이 글에서 정희진은 진중권이 86세대를 비판하기 위해 “권력층에 가까운 서울지역 대학 출신 일부 86세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일반화했”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진중권은 86세대를 향해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다 우리가 좋아서 한 것”이니 “그것을 훈장으로 내세우지 마라”, “당신들 강남에 아파트 가졌고, 인맥 활용해 자식 의전원 보냈고, 운동해서 자식들 미국에 유학 보냈고, 청와대·지자체·의회에 권력 가졌다” “이미 가질 건 가졌는데, 뭘 더 바라는가”라고 했지만, 실상을 보면 민주화운동을 통해 진중권이 말한 “넘치는 보상”을 받은 이들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은 “노후가 불안한 평범한 중년”이라는 것이다. 대신 정희진이 주목하는 것은 성차별, 지역차별, 계급차별이며 (민주화)세대론은 이것들을을 은폐한다고 말한다. 이후 변경된 “민주화세대론의 서울(대) 남성주의”라는 칼럼 제목이 그러한 생각을 더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이에 진중권은 역시 24일 〈경향신문〉을 통해 응수했는데 글의 제목도 “그의 분노가 생뚱맞은 이유”이다. 진중권은 자신이 말한 ‘민주화세대’란 “정치권의 민주화세대, 즉 그렇게 은밀히 ‘성차별, 지역차별, 계급차별’을 하고도 ‘민주화’라는 상징자본을 팔아 권력이 된 이들”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에서 둘은 서로를 신랄하게 비난하긴 했지만 둘의 의견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진중권은 현 정부의 ‘저격수’로서 명확히 공격할 ‘타겟’이 필요했기에 586세대를 싸잡아 비판한 것이고, 정희진은 페미니스트로서 그 세대 안에서도 존재하는 차이에 집중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쪽은 50대 전체가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력자 집단이 된 50대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 전체는 ‘386세대’로, 이들 중 “권력의 중심부에 있거나” 그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전문직 내지는 사회고위층은 ‘86세대’로 칭하며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i], ‘집권 586’[ii], ‘파워 엘리트 586’[iii] 등의 부가적인 이름표를 만들어내는 쪽도 있다.
이처럼 부차적 설명을 요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자와 언론이 ‘N86’이라는 프레임을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단순히 한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함은 아니다. 실제로 86세대 정치인 상당수는 그들이 86세대이기 때문에 권력을 쥘 수, 혹은 그 권력을 아직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 특집의 세 번째 글을 참고하라) 86세대 내에 존재하는 성별, 지역, 계급의 차이를 은폐해선 안 되듯, 올바른 현상분석을 위해서는 다른 세대와 86세대 간 경험의 차이 역시 은폐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고대문화가 이번 봄호의 특집 주제로 586을 선택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이 그 안의 차이들을 지우는 데 사용되려는 경향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논쟁에서만 해도 진중권은 정희진의 “진 전 교수가 말하는 86세대에 여성은 없다”라는 문장을 두고서 “박원순 사건의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칭한 남인순, 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그리고 정희진 본인은 여성이 아니냐”며 그를 조소했다. 그런데 이후 1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 출신의 3선 의원 남인순과 해당 단체의 상임대표가 박원순 피소 사실을 최초로 유출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정말 진중권의 말대로 586 기득권 세력을 모두 같은 집단으로 보고, 동일한 선상에서 비판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여성이란 사실은 이 문제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진보’운동과 여성운동의 불편한 동거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던 이들은 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 그들의 나이가 30대였기에 386이라는 호칭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발탁되어 국회에 입성한 30대 중 여성이 있었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은 모두 남학생들만 했는가? 그 또한 아니다. 그 까닭은 학생·민주화운동의 남성·군사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1]
[1]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2005) 2장에서 전반적인 내용을 참조함.
누구보다 열심히 민주주의를 외친 이들의 조직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언더서클은 군사독재정권과 싸우기 위해 철저히 위계와 집단 중심의, 군사화된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80년대 중후반에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이 조직되었지만, 그 학생회의 수뇌부는 언더서클의 ‘성골’이 차지했다.[iv] 그래도 여학생들이 조금은 존재했던 오픈서클과 달리 언더서클의 경우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었다. 운동가의 기본값은 ‘열사’, ‘전사’, ‘조국의 아들’이었으며[v] 남성 선배들은 남성 후배들만 운동가로 ‘키워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과잉) 남성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남자들의 언어와 화법, 관심사 그리고 세계에 대한 남성적 관점 습득을 통해 “남성과의 동일시”를 꾀했다.[vi] 일부러 거칠게 욕을 하고, 남자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며, 중성적인 옷차림에 담배를 피우는 등 말이다. 그럼에도 80년대 중반 투쟁의 양상이 격렬해짐에 따라 성별 간 역할 분담 체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선두(사수대)에는 항상 남성들이 서고, 여성들은 뒤(본대)에서 구호를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선두의 남성들이 던지는 화염병을 만드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다.[vii]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그저 “열등한 운동가이거나 아니면 보호받는 약한 존재가 된다.”[viii]
〈그림 1〉 1987년 6월 항쟁 전 이화여대 학생시위 사진. 여자대학교이기에 여성들이 직접 화염병을 던지며 선두에 설 수 있었다. 출처: 『‘6월 항쟁 사진집』(2007)
이렇게 군사주의적이고 마초적인 운동권에서 여성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리가 만무하다. 운동권들은 ‘전체운동’과 ‘부문운동’이라는 위계를 통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억눌렀다. ‘중심 모순’에 저항하는 것은 ‘보편적인’ ‘전체운동’, 중심 모순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모순’을 다루는 다른 운동들은 ‘특수한’ ‘부문운동’이며, ‘전체운동’인 노동운동이 성공한다면 부차적인 모순들은 자연스레 해결되리라는 것이다.[ix] 이때 ‘부문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은 ‘전체운동’과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동시에 ‘전체운동’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만, 즉 ‘중심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이뤄져야 했다. 80년대 최초의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인 여성평우회가 해체된 이유가 “여성 이슈에 어느 정도의 강조가 할당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 때문이라는[x] 사실은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운동가들이 어떤 압박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부문운동’ 전략의 실패
1987년 민주화 이후 남성 운동가들은 즉각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위해 김대중 등 정계의 호출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대신 ‘진보적’[2]인 여성운동가들은 여러 여성단체를 통해 활동을 이어갔는데, 1987년 창립된 여성연합이 대표적이다. 여성연합을 비롯한 ‘진보’ 여성단체들은 “정치권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의 대변자 역할”[xi]을 자처하며 여성의 공천할당제와 비례대표제 도입에 앞장섰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2000년 16대 총선부터 비례대표 후보 중 30%는 여성에게 할당하는 것이 권고되었으며, 2년 후 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의 경우는 50%까지 증가하였다.[3] 중요한 점은 이 ‘진보적’ 여성단체 출신 인사들은 대부분 민주당 계열 정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에 ‘수혈’된 남성 386들은 NL(National Liberation, 주체사상파)에서 리버럴(자유주의)로 전향하였고 민주당 전체 역시 ‘진보’ 정당이라기보다는 리버럴 정당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진보적’ 인사라도 제대로 의정활동을 하고, 계속 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당론과 크게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원내외 세력화를 통해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제 폐지 등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정책들은 보수 세력과 싸우는 ‘전체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만 추진될 수 있었다.
[2] 여기서 ‘진보적’이라는 것은 여성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더 강조했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여성운동의 주체를 노동자, 농민 여성으로 상정하였다.
[3] 2004년 총선부터는 50%로 올라갔으며 여성을 후순으로 두는 것을 막기 위해 남녀교차순번제 또한 권고하도록 하는 등 법이 계속 개정되었다.
하지만 2017년 박근혜의 탄핵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그들이 말한 ‘전체운동’이 성공한 후, 정말 ‘부차적인 모순’인 여성문제들이 해결되었는가? 여성연합 출신의 여성부 장관이 취임했고, 여성 법무부 장관이 낙태죄 폐지, 차별금지법 입법 의지를 보였음에도 정부와 여당은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과거의 여성혐오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던 의전비서관 탁현민은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승진하였다.[xii]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상향에 반대하였던[xiii]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정의당 의원 류호정이 발의한 비동의강간죄에 이름을 올린 민주당 의원은 6명뿐이다.[xiv] 임기 초에는 30%로 시작해 임기 내 남녀 동수 내각을 실현하겠다던[xv] 문재인 정부의 여성 장관 비율은 현재 16.6%(3명. 교육부, 환경부, 여성가족부)에 불과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천명했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정부가 보이는 동안 민주당 여성의원, 여성 장관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었다. 그 모순의 정점은 잇따른 민주당 지방자치단체장 성폭력 사건들이었다. 2018년에는 충남지사 안희정이 비서 성폭행으로 고발당했으며, 2020년에는 부산시장 오거돈, 서울시장 박원순이 각각 성추행 의혹을 받았고 한 명은 사퇴, 한 명은 자살하였다. 민주당의 도덕적 파산이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와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안희정 모친상에 대통령이 화환을 보낸 것을 비판할 수도 없었고, 거대한 2차 가해였던 박원순의 서울시장(葬)이 치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남인순의 박원순 피소 사실 유출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우리 편’이 누구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다시 진중권과 정희진의 논쟁으로 돌아와 보자. 앞서 설명했듯 8, 90년대 여성운동은 ‘부문운동’으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여성주의자들은 이 노선을 수용하고 또 활용하였지만, 한계에 맞부딪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유리천장을 깬’ 인물들로 회자되지만, 동시에 더 젊은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명예남성’이라고 조롱당하는 한편, 안티페미 남성들에겐 ‘페미들의 이중성’을 나타내주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정작 586 기득권 남성들은 이들을 완전히 자신들과 같은 무리로 끼워주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들의 절대적인 수가 너무나 적다. 세계적으로 성평등할당제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여성이 상징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집단 내에 최소 30% 이상이어야 한다는 '임계 수치(Critical Mass)’ 이론[xvi]이 나온 지도 30년이 더 지났다. 하지만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여성은 여전히 19%(57명), 전체 민주당 당선자 중 여성의 비율은 16.6%(30명)에 불과하다.[4] 이런 맥락을 제외하고 586 기득권 여성들을 모조리 ‘민주화를 팔아 권력을 잡은’ 이들로 매도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며 586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된다. 정말 그 길밖에 없었느냐고.
[4] 더불어민주당 20명, 더불어시민당 10명. 더불어시민당의 용혜인이 원래 소속인 기본소득당으로 돌아갔고, 양정숙이 부동산 비리 문제로 제명됨에 따라 현재 민주당 여성의원은 28명이다.
오빠는 필요없다 – 100인위와 ‘영페미’의 등장
‘세력화’를 위해선 8, 90년대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여성운동가들이 ‘부문운동’ 전략에만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여성 대상 폭력 상담에만 집중한 한국여성의전화가 1983년에 개소하였고, 1991년에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졸업생들이 국내 첫 성폭력 전담상담소인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설립했던 등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한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등장한 ‘영페미니스트 그룹’(이하 ‘영페미’)은 PC통신을 통해 교류하며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나갔으며, 기존 진보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 중 여성주의에 공감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별도의 ‘여성활동가모임’을 1999년에 설립하였다.[xvii]
그리고 새천년NHK 사건[5]이 벌어진 지 두 달 뒤인 2000년 7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가 활동을 시작하였다.[6] 같은 해 12월 이들은 총학생회, 노동조합, 사회운동 단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들을 가해자 실명 명단과 함께 공개하며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가해자에 대한) 명예훼손/사회적 매장이라는 비난, 혹은 페미나치/백색테러라는 힐난[xviii]에도 불구하고 100인위는 두 차례에 걸쳐 17건의 성폭력 사건을 공개하였고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2차 가해와도 싸움을 벌였다. 아니, 사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100인위이다.[7] 그 일원이었던 전희경의 평가에 따르면 100인위는 운동 사회의 세 가지 금기를 깨뜨렸는데, ① 성폭력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덮어주기와 함구령), ② 말을 하더라도 조직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금기, ③ 피해자는 가해자를 적대시하는 대신 ‘교육과 설득’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금기가 그것이다.[xix] 무엇보다 100인위의 활동은 기존의 진보와 보수 개념은 철저히 남성중심적으로 쓰여진 것일 뿐,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둘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5] 200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전야제 뒷풀이에서 송영길, 김민석, 우상호 등 386세대 의원들이 새천년NHK라는 이름의 가라오케에서 술판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목격자이자 우상호의 욕설 피해자인 임수경이 386커뮤니티인 ‘제3의길’에 올렸다 금세 삭제한 글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임수경의 원문은 다음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 앞서 말한 ‘여성활동가모임’을 포함한 6개 단위(서울여성노조, 살맛나는세상, 성폭력근절연대회의, 평화인권연대, 동성애자인권연대)가 주도하였기에 ‘영페미’들의 대표적인 활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7] 전희경 (2008). 183. 전희경은 이 두 용어가 “의도한 것과 다른 (문제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여기에 100인위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진 수많은 백래시와 명예훼손 역고소로 100인위의 활동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기반으로 수많은 ‘영페미’들은 운동계 각지에서 여성주의적 토양을 일궈내는 데 힘을 썼다.[8] 여성문제를 진보 운동 속 하나의 의제로 보았던 ‘선배’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90년대 중후반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보고자 했다. 1980년대에는 그 ‘여성’이 ‘여성 노동자’였다면 90년대에는 ‘여성 전반’으로 재규정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말로 오면서 이 ‘여성 전반’은 (서로 다른) 여성’들’이라는 차이의 정치학으로 점차 확장되었다.[xx]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단체들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단체(1999 전국여성 노조연합 등), 여성 장애인 단체(1998 장애여성 공감 등), 여성 동성애자 단체(1993 끼리끼리 등), 여성 이주민 단체(2001년 이주여성인권연대 등), 여성 환경단체(1999년 여성환경연대 등), 여성평화 통일 단체(2001년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등)[xxi] 등등이다.
[8] 구체적인 사례들을 ‘영페미’ 강유가람이 연출한 2019년작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동시에 ‘선배’ 페미니스트들과 자신들의 차이 역시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여성연합 등 321개 여성관련 단체들이 ‘맑은 정치 여성네트워크’를 설립, 정당들에게 자신들이 비례대표로 추천하는 여성인사를 소개하는 작업을 펼친 것을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 비판한 사건이다. 당시 〈일다〉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의 정계 진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여성의 여성주의적 세력화를 통해 성평등한 사회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므로, 여성 정치세력화 운동은 여성인물 몇 명을 국회에 보내는 방식보다는 전체 사회를 성평등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xxii]고 비판하였는데, 이 논쟁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보았을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단체의 대응을 기다린다.”[9]
‘영페미’들의 내부고발에 대한 ‘진보’ 남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앞서 말했듯 명예훼손 역고소, 무고죄 고소 등 뻔뻔하게 나오는 전략 외에도 이들은 유구하게 이어져 온 음모론(우리 단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상대 단체의 모략이다), 대의론(“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가”[10]), 조직보위론(“당이 먼저인지 여성이 먼저인지 모르겠”다[11])으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다. 그렇게 반창고 밑 상처들이 곪아 터져갔고 ‘영페미’들은 어느덧 40대가 된 2010년대 후반, ‘영영페미’의 해일이 몰려왔다. 이 ‘해일이 된 여자들’은 박근혜 퇴진 시위에서 “너네가 정치를 아냐”는 ‘진보 아재’들의 비아냥과 성희롱에 ‘페미존’[12]과 ‘페미자경단’[xxiii]으로 응수했으며, ‘진보’ 세력의 차기 유력 대권 주자를 향해 이루어진 ‘미투’(#MeToo)에 ‘위드유’(#WithYou)로 연대하였다. ‘미투’가 시대정신이 된 이때 더 이상 ‘진보’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부문운동’도 ‘여자애들의 투정’도 아니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그들의 권력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지역 정당으로 전락해버린 보수 정당보다도 더 무서운 ‘적’이 되었다.
[9] 국민의힘 국회의원 김웅의 여성혐오 발언(“성폭력 범죄라는 건 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건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폭발하는 것”)을 조국이 공유하며 페이스북에 남긴 문장.
[11] 역시 같은 사건에 대해 유시민이 개혁당 여성위원회 게시판에 남긴 글의 한 문장이다.
[12] 권희조, 황진태 (2020). 44. 3차 촛불집회(2016.11.12.)에서 “혐오발언과 성추행 위협 없이 여성들이 안전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인 페미존이 처음 등장한 뒤, 총 다섯 차례 만들어졌다.
〈그림 2〉 각주 9의 페이스북 글.
하지만 수십 년을 이어온 굳건한 남성연대가 한 번에 무너질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차마 ‘보수’ 세력처럼 여성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자신들의 당에 여성단체 출신 의원들도 꽤 존재하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요즘’ 페미니즘의 ‘변질’을 목놓아 외친다. 또 이들은 진영논리를 가져와 왜 진보진영에서만 ‘미투’가 나오냐며 음모론을 내놓는데, 초반에는 김어준의 ‘미투 공작설’ 같이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주장이 많았던 반면, 이제는 아예 여성단체가 보수정당과 한패라는 프레임을 짜는 모양새이다. 그들은 인터넷 기사에 왜 여성단체는 장자연에, 김학의에 침묵하냐는 댓글을 도배하며 여성계와 보수언론, 보수정당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진보’ 남성들이 장자연 사건에 별관심이 없었던 2009년 당시에도 여성단체들은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였으며[xxiv] 김학의 사건의 경우도 성접대 의혹이 처음 제기된 2013년부터 꾸준히 논평을 내왔다.[xxv]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를 날조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진보’와 ‘보수’ 뿐이며, 자신들이 ‘진보’라는 굳은 믿음과 그로 인한 확증편향 때문일 것이다.
한편 현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 혹은 ‘진보’ 남성들은 민주당 여성의원들과 여성가족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어느 쪽이든 기제는 동일하다. 여성혐오이다. ‘진정한’ 피해자들은 외면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에 좋은 사건들만 물고 늘어진다는, 자신들의 상상 속 여성단체의 모습을 만든 뒤 어떻게 행동을 해도 트집을 잡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진정한’ 피해자들을 여성단체들이 지원했는지를 따져 묻는다. (물론 이쪽도 앞서 본 ‘진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따로 확인하지는 않는다) 진중권은 문재인이 안희정 모친상에 화환을 보낸 사건 직후 “여성단체들이 줄줄이 성명을 내야 할 상황인데 과연 성명이 나올까?”[xxvi] 하고 비꼬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성명, 나왔다.[xxvii]
여성문제에 있어 ‘진보’와 ‘보수’는 별 차이가 없다. 사실 동일하다. 그들이 계속 ‘여성단체의 입장문’을 찾는 이유는 여성단체의 위선을 드러내고 싶어서도 있지만, 이 문제는 여성단체, 여성운동가들이 해결할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어서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전문가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우대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가르치려는 남자와 가르쳐달라는 남자는 동일한 성별 구도의 양면”[xxviii]일 뿐이다. 언제나 가장 많이 압박받고 비난받는 것은 여성 대표자들이다. 박원순 사건 당시 당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별도 입장표명 할 것을 압박받았으며[xxix] 지금 가장 비난받는 사람 역시 성추행을 저지르고 자살한 박원순이 아닌 기소 사실을 유출한 남인순, 입장문에서 ‘피해호소인’이란 표현을 사용한 민주당 여성의원들 (그리고 피해자)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1월 “’피해호소인’ 논의 당시 카톡방 대화에서 드러난 '민주 女의원 민낯'”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으며 이 여성혐오를 부추겼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대화에서 당론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여성 의원들의 고뇌와 절망이 보였다. 물론 주도적으로 ‘피해호소인’이란 표현을 쓸 것을 종용한 다선 의원들(남인순, 김상희)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여성단체 출신 비례대표로 시작한 그들이 다선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온정주의적인 해석일까.[13]
[13] 대표적으로 586 국회의원 정청래는 2012년 여성의무공천제를 문제삼으며 “당의 배려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은 다음 총선에서 당에 결초보은하는 것이 정치도의이고 상도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권김현영 (2020). 233)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코앞이다. 서울시장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어찌 된 일인지 거의 10년 전 그대로인데, 우선 국민의힘 측에서는 일찌감치 TV조선의 관찰 예능 〈아내의 맛〉에 출연하며 수구 보수 이미지의 세탁을 꾀한 나경원이 출마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성 가산점'에도 불구하고 10년 전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시장직에서 자진 사퇴했던 오세훈에게 경선 패배하였다.
반면 그 바로 다음 주에 같은 예능에 출연하기도 했던 민주당의 박영선은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며 극성 지지자들의 결집을 시도했던 새천년NHK의 주인공 우상호를 꺾고 본선 후보가 되었다. '첫 여성 서울시장'을 강조하는 그는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추어 여성정책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에게 뒤늦은 사과의 말을 전하였는데, 이에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는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박영선의 선거캠프에서 "'피해 호소인 3인방'을 쫓아내야 한다"[xxx]며 역시나 여성 의원들만을 콕 집어서 비난하였다.[14]
[14] 물론 이에 대해 박영선이 "’쫓아내라’는 가부장적인 여성비하 발언"이라고 주장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자신이 불리할 때만 여성을, 그것도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며 결과적으로 여성정치의 가능성을 후퇴시키고 있다. (직접인용 출처: 박영선 페이스북)
한편 열린민주당 후보 김진애는 박원순 사건에 대해 "여성 후보로서 입장을 낸다"면서도 성추행 사건은 "인권위 조사의 내용이 의심스럽고 박원순의 "빛나는 족적"에 비해 "작은 흠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박원순의 죽음을 “언론과 정치권에 의한 명예살인, 검찰과 사법부에 의한 인격 살인”으로 규정하며 언론·검찰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전체운동 먼저'를 외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였다.[xxxi]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선거운동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들은 왜 이 선거가 열리게 되었는지를 완전히 잊은 모양새이다. 부산시장 선거의 경우는 한술 더 떠 선거용 토목건설 공약만을 내걸고 60년대생 남성 둘이 맞붙고 있지 않은가.[15] 물론 ‘여성’문제로 남성의 자리가 비었으니 여성이 채워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문제는 여성에게”의 연장선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박원순과 오거돈의 성폭력은 단순한 '여성문제'가 아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었고, 그 위계는 지위에 의한 것과 성별에 의한 것이 교차 되어있다. 그렇기에 이번 재보궐선거의 핵심 쟁점은 서울시정, 부산시정에 존재하는 위계와 그에 따른 위력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양 지역구 후보들의 발언에서 이런 말은 찾아볼 수가 없고, '여성공약'은 그저 '안전공약'에만 그치고 있다.[xxxii] 인물들도 10년 전, 공약도 10년 전 수준에서 답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퇴행적 상황 속에서 오히려 더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박영선이나 나경원, 김진애와 같이 구시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계속 거론되는 정치, 여성 정치인이 여성 전체를 대변한다는 맹신이 지속되는 정치, 조직 보위의 논리에 복종하는 ‘명예남성’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 여성 정치인은 언제나 '엄마' 혹은 '아내'이어야 하는 정치, 이런 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15] 특히 민주당 후보인 김영춘은 전형적인 586 정치인이다.
몇몇 여성단체 지도층의 도덕적 실패를 의식한 탓인지, 여성운동의 세대교체가 시작되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대표가 모두 586에서 40대로 교체되었으며,[xxxiii] 여성연합 역시 ‘영페미’ 두 명을 위원장으로 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xxxiv] 교체는 가열차게 이루어지되, ‘올드페미’의 경험을 모두 무시하고 ‘단절’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세대교체’를 걸고 출마했던 김종철이 성추행으로 정의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는 것을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 ‘여성정치’를 국회에, 청와대에, 지방정부에 심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우리는 결코,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16]
[16] 대표적인 ‘영페미’ 여성학자 권김현영 저서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2019)의 제목에서 차용.
편집위원 상민 / poursoi0911@gmail.com
[i] 김선기 (2019). ‘386세대’와 ‘86세대’의 차이.
[ii] 김태훈 (2020). 집권 86세대의 포퓰리즘.
[iii] 김성일 (2020). 파워 엘리트 86세대의 시민 되기와 촛불 민심의 유예.
[iv] 권인숙 (2005). 117.
[v] 전희경 (2008). 78.
[vi] 조순경, 김혜숙(1995). 민족민주운동과 가부장제. 265.
[vii] 권인숙(2005). 108.
[viii] 전희경(2008). 77.
[ix] 같은 책. 151.
[x] 같은 책. 195.
[xi] 한국여성단체연합(2017). 393.
[xii] 정확히는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에서 사퇴한 지 네 달만에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으로 승격 임명되었다.
[xiii] 조국 (2018.06.18.). 미성년자 의제강간·강제추행 연령개정론.
[xiv] 권인숙, 김상희, 양이원영, 윤재갑, 이수진, 정춘숙. 이 중 남성의원은 윤재갑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