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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촛불은 당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특집 '586'] 편집위원 상민

태극기와 조국기: 어떤 데칼코마니

〈그림 1, 2〉 뒤르켐의 삼각형과 애국의 삼각형 비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이루는 요소가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삼각형의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 종교의 삼각형은 각 꼭짓점이 새로운 요소로 대체되기만 한다면 언제든 재구조화될 수 있다. 예컨대 박정희와 박근혜의 복권을 주장하는 ‘애국교’의 반대편에 서있었다 여겨지는 ‘촛불 시민’들의 사회 운동 역시 삼각형의 세 꼭짓점만 채울 수 있다면 언제든 시민 종교화 될 수 있다. (중략) 태극기 집회는 구조적으로 시민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시민 종교는 태극기 집회의 고유한 속성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언제건 부활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는 2019년 〈고대문화〉 겨울호에 실린 칼럼 “민주주의는 태극기를 먹고 자란다”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전문은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 글은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의 정서적 동기를 설명하면서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자기 모순성을 짚고 있었다. 그 모순이란 바로 ① 그들이 외치는 ‘자유민주주의’란 사실 가장 반민주적인 가치라는 점, ② 그럼에도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외쳐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자가당착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집회가 계속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마치 종교처럼 작동하는 메커니즘, 즉 ‘애국교’를 제시한다. (이 개념은 〈시사IN〉 기사 “태극기 집회의 비결 ‘애국의 삼각형’”에서 제시되었다.) ‘애국교’의 신도들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불가침한 믿음의 대상을 가진 채 ‘애국 국민’이라는 용어로 스스로를 정체화하여 ‘태극기 (집회)’라는 행위를 통해 집합행동을 수행’한다는 것이다.[i]


그리고 이 글에서 언뜻 말한 것처럼 민주당 지지자들 역시 어느새 자신들이 비웃던 이 ‘애국교’ 신자들과 꽤 닮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태극기 집회처럼 매주 모여서 광장을 점령하는 식으로 정치에 참여하진 않는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에도 ‘태극기 부대’는 방역지침을 어겨가면서까지 모이려 했지만, ‘촛불시민’들에게는 인터넷과 SNS만 있다면 충분했다.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정부를 지지하는 댓글을 달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그런 목소리를 짓눌러버리는 전략을 사용한다. (물론 ‘태극기부대’ 역시 인터넷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연령대 특성 상 인터넷 사용에 덜 익숙하기도 하고 그들의 글들은 누가 봐도 그들 것이기에 효과가 미미하다) 그러면서도 우매한 상대편과 달리 자신은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용어 역시 ‘민주시민’ 혹은 ‘촛불시민’이다. 2017년 초까지 ‘촛불시민’은 박근혜 탄핵을 위해 촛불을 든 모든 이들을 일컫는 명칭이었지만,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 기표를 자신들만을 대표하는 것으로 독점해왔다.[1]


[1] 그 대표적인 예시가 출간 전 ‘조국백서’라고 불렸던 책이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의 대상’은 무엇일까. 청와대 홈페이지의 대통령 소개 페이지에서는 “위대한 대한민국, 정의로운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보이고 있다.[ii] ‘촛불시민’들이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지만 무엇보다 위대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하려면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국민-자유대한민국’의 삼각형은 ‘정치참여(팬덤)-촛불시민-정의로운 대한민국’의 삼각형으로 고스란히 넘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 종교를 ‘촛불시민교’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그림 2, 3〉애국의 삼각형과 촛불시민의 삼각형 비교


종북좌파냐, 토착왜구냐

‘애국교’에서 메시아적 서사를 구축하는 인물이 ‘박정희-박근혜’였다면, ‘촛불시민교’에서는 ‘노무현-문재인-조국’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에게 노무현은 억울하게 죽은 예수이고[2] 문재인은 (3일이 아닌) 8년 만에 부활한 재림예수이다. 누군가는 아무리 ‘조국 수호’ 집회 등이 있었더라도 그를 여기에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촛불시민교’가 종교적 주적을 만들어내던 순간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2] 〈시사IN〉의 “그곳에선 모두가 노무현이었다”라는 2009년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한 조문객은 방명록에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다시 예수를 죽였다”라고 썼다.”

〈그림 4〉 조국이 직접 페이스북 배경화면으로 설정했었던 그림. 출처: 인스타그램 고군(@gog00n) 계정

아무리 종교 내부에서 이런저런 분란이 있더라도, 중요한 순간에서는 종교로서의 결속을 다져야 한다. ‘애국교’에게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 그들이 수십 년간 우려먹은 ‘종북좌파’였다면 ‘촛불시민교’에게는 ‘토착왜구’가 바로 그것이다. ‘토착왜구’ 프레임은 2019년 6월 일본의 수출규제로 비롯된 무역 분쟁이 불거진 이후 국내에도 여전히 친일파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흡한 과거사 청산으로 인해 친일파가 친미파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이 무역분쟁을 계기로 불매운동과 함께 현 정부에 비판을 가하는 세력은 모두 ‘토착왜구’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하는 행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문재인은 ‘성역 없는 수사’를 말했지만 정작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는 언론, 정부의 비리를 수사하는 사법부는 지지자들에 의해 ‘토착왜구’가 되었다. 심지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조국, 박원순 사태 등에서 드러난 현 정권의 도덕적 흠결에 대해 상식적인 비판을 하는 진보정당과 시민단체 역시 ‘토착왜구’들과 한패라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2020년 총선에서 일부 민주당 후보들은 “이번 총선은 한일전이다”라는 수사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저들이 집권하면 정권을 북한에 팔아넘길 것”이라 선동했던 수구 세력의 전략과 똑 닮았다.


그리고 일본과의 분쟁이 한창일 때 정부에서 가장 앞장서서 반일을 부르짖은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이었다. ‘노재팬’ 집회 또한 조국이 그해 8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여러 의혹에 휩싸이자 ‘조국 수호’ 집회로 그 양상이 자연스레 이어지며[iii] 그와 반일감정 사이의 연관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조국은 노무현, 문재인에 이어 ‘박해받는 선지자 예수’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정경심의 1심이 선고된 날 새벽 본인의 페이스북에 “골고다 언덕 길을 조국과 그의 가족이 걸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포함된 글을 올렸다.[3] 이 비유의 순환에서 문재인은 재림예수에서 여호와가 되어가고 있다.


[3] 사실을 부정하는 팬덤들[유창선의 시시비비]. (2021.01.25.). 시사저널. 그 외에도 민주당 의원 김남국, 윤영찬 등이 이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하며 사법부를 비판하였다.


‘촛불시민’은 누구인가

다른 종교집단에도 사제와 신도 등에 따라 위계가 나뉘듯, 같은 ‘촛불시민교’ 구성원이더라도 이 종교로 유입된 경로에 따라 내부 위치가 다르다. 현재 대통령의 종교가 천주교인만큼 그 체제에 비교해보자면, ‘촛불시민교’의 추기경들은 단연 586세대 민주화 기득권 세력들이다.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화라는 상징자본을 팔아 권력을 얻은” 사람들. 한편 일반 사제들 역시 상당수가 586세대이다. 이들은 ‘촛불추기경’들처럼 민주화운동 경력을 통해 권력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586세대의 ‘세대 내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각계각층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iv] 그렇다면 신도들은? 우선 사제들과 같은 세대로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586 중 ‘진보’적인 시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신도들은 3,40대가 정작 더 많은 모양새이다. 이들은 이미 사회에서 요직에 오른 뒤 사다리는 차버린 586에게 많은 기회를 빼앗겼음에도 그들을 존경하고 우러러본다. 40대 신도들은 성공한 ‘운동권’일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인 선배들에 대한 동경으로, 30대 신도들은 이명박-박근혜를 겪으며 보수 정권에 크게 데인 경험으로 인해 이 종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3,40대의 아버지들은 당시 386에 의해 밀려난 세대이다. IMF로 인한 구조조정에서 갓 입사한 386들은 살아남았지만, 퇴직이 머지않았던 산업화 세대(30년대 후반~40년대 후반 출생 세대)는 옷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산업화 후기 세대(45~55년생)더라도 ‘정보화 물결’에서 386에게 금세 밀려났다.[v] 이들의 자식인 3040 신도들은 권력을 잃은 데다가 계속 이명박-박근혜를 지지하는 아버지 대신 승승장구하는 586을 정신적 아버지로 삼았다. 여기에는 문화계의 586 사제들 역시 한몫을 하였는데, 이들은 〈변호인〉, 〈강철비〉(감독 양우석),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 제작 원동연), 〈택시운전사〉(주연 송강호, 오달수) 〈1987〉(감독 장준환) 등의 서사를 통해 86세대의 경험을 직접 겪지 않은 이들을 ‘촛불시민교’에 포섭하였다.

〈그림 5〉 출처: MBC

이렇게 ‘촛불시민교’에는 여러 세대들이 각자의 이유로 포진해 있지만, 이들이 실제로 상상하고 이입하는 ‘촛불시민’의 상은 전두환, 그리고 이명박-박근혜와 싸웠던 86세대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촛불시민’ 분석/비판은 필연적으로 (‘촛불추기경’을 포함한) ‘촛불사제’, 그리고 ‘촛불예수’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때 국가 영웅이었던 박정희와 산업화세대가 ‘태극기 집회’라는 다소 초라한 세력만으로 남은 반면, 문재인과 민주화세대의 신화는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믿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참여는 건강하고, ‘촛불시민’은 깨어있으며, 민주화세대 586이 집권한 대한민국은 정의로워졌는가? 우선 이 삼각형의 각 항을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들의 정치 참여는 건강한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우리가 추운 겨울 광화문에 나가서 박근혜 퇴진을 외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새로운 대통령이 된 문재인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취임사에서 말했듯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 것 아니었는가. 하지만 ‘촛불시민’들에게 이런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을 국민의 일꾼으로도, 대리인으로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민주공화국의 공무원임에도) ‘성군’이라 칭해지며[4] 우리 시민들이 끝까지 수호해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마치 아이돌 MD 상품을 연상시키는 굿즈들과 생일광고, ‘이니와 여니’, ‘이니와 으니’와 같은 모에화[5]는 이들을 단순히 ‘팬’이 아닌 ‘팬덤’으로 부를 만한 여지를 충분히 주고 있다.


[4] 홍세화는 2020년 11월 19일 〈한겨레〉에 기고한 “우리 대통령은 착한 임금님”이라는 칼럼을 통해 문재인이 불편한 자리, 불편한 질문을 피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대통령보다는 임금님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은 ‘촛불시민’들의 질타를 잔뜩 받았다.

[5] 보통의 의인화와는 다르게 특정 대상을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귀엽게 묘사하는 것을 ‘모에화’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오픈사전, https://ko.dict.naver.com/#/userEntry/koko/c38f6608c625984d510782793d4d73c2 접속일 2021.03.03.)

<그림6> 2019년 문재인 생일광고 (광주 문화전당역) 출처: 중앙일보
〈그림 7〉 2020년 강다니엘 생일광고 (서울 신촌역)

이런 ‘촛불시민’ 팬덤의 힘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정권 초반, 창간 이래 모든 대통령 부인에게 ‘씨’라는 존칭을 사용해온 〈한겨레〉가 ‘김정숙 씨’라는 표현의 사용은 “대통령을 무시하는 의도”라는 ‘촛불시민’들의 질타에 “앞으로는 ‘여사’라는 존칭을 사용하겠다”며 항복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정부의 든든한 지지층 역할을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문재인 정부를 성역화하며 조금이라도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무례하게 구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재갈을 물리고 있다. 이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촛불시민’들의 조작적인 문자 테러 등에 관해 묻자 문재인은 “그런 일들은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경쟁을 더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6]는 말로 사실상 이런 절대적 옹호를 묵인하였다.


 [6] 박영선, 文 ‘문자폭탄은 양념’ 발언에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것”. (2017.04.04.). 연합뉴스.


“리얼타임 정치 느와르”[7]

‘촛불시민’이 이렇게까지 방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당신이 어떤 ‘촛불시민’의 SNS 계정이나 저서를 발견해서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이런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신 대통령을 잃을 수 없다.” 이것이 ‘촛불시민’들이 조국 수호에 앞장서고, 문재인의 모든 발언을 ‘쉴드치’며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조국백서’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에서도 직접 언급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낸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로부터 굴욕적인 수사를 받고 수구보수 언론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할 때 시민들은 숨죽이고 있었어요. (…) 결국 검찰 수사, 언론의 스토킹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시민들은 10년 전의 수사 방식과 언론의 행태가 이번에 다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향하고 있다고 느낀 겁니다.

– 조국백서추진위원회, 『검찰개혁과 촛불시민』(2020), 356-368.

노무현은 한미FTA, 이라크 파병 등의 문제로 보수는 물론 진보 언론에게까지 많은 비판을 받았고 탄핵 역풍으로 여당이 국회 다수를 차지했음에도 결국 국정 동력을 잃어버렸었다. 그 결과 정권을 빼앗겼고, 퇴임 후에도 가족 비리에 대한 의혹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가 결국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림 8〉클리앙 게시글 “리얼 타임 정치 느와르.jpg” 중 일부.

이렇게 노무현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은 이제 어떤 틈도 주지 않겠다는 합의를 본 듯하다. 특히 참여정부에 실망해 이명박에게 표를 줬던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그를 죽게 했다는 생각에 아직까지도 마음의 짐이 큰 모양이다. 이들 중 몇은 현 정부가 비판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점은 애써 감춰주려 하고, 몇은 아예 그런 비판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비판자들을 공격한다. 안타깝게도 ‘촛불시민’에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많은 것 같다. 왜냐면 그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유시민, 김어준 등 ‘촛불사제’들이 후자의 전략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제 ‘노무현의 친구’로서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문재인의 서사는, 문재인의 심복으로서 검찰에 대한 복수의 역할을 맡았다가 검찰이 씌운 누명 때문에 수모를 겪고 있다는 조국의 서사로 확장되었다. 문재인이 2020년 신년 기자회견 중 개인 비리 의혹에 대한 공세로 결국 사퇴한 조국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언급하며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 것이 그 서사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의)형제애와 복수의 서사가 문재인 정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7] ‘누아르’가 공식 외래어표기이지만 원 게시글 표현을 그대로 살린다. 그림8의 출처 역시 이 게시글이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0727178


안철수가 강시처럼 돌아오는 이유

‘촛불시민’의 호위전략, 수호전략은 간단하다. 거짓 등가성[8]을 주장하며 “저들보다는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모든 비판에 “그래서 나경원은?”, “그래서 윤석열 장모는?”하고 따져 묻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런데 만약 나경원이, 윤석열 장모가 유죄라면 조국은 무죄가 되는가? 그리고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것은 조국인데 왜 아무런 공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 나경원, 이미 청문회 당시 의혹이 있었음에도 정부가 임명을 강행한 윤석열(의 장모)에 대한 수사를 조국에 대한 수사보다 우선시해야 하는가? 또 만약 정부나 여당 측의 잘못이 밝혀지더라도 이들은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법이 없다. 대신 ‘촛불시민’들은 ‘피장파장의 오류’를 밀고 나가든지(“이명박근혜 때보다는 훨씬 낫다”), 아니면 아예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8] 사물이나 사안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에 눈감고 일부 형식적 유사점만 내세워 동등하게 취급해버리는 논리적 오류. (박용현, 2020.05.06.) (페미니즘 운동을 보고) ‘남성혐오도 심각하다’, (흑인인권운동을 보며) ‘All Lives Matter’, (채식주의자에게) ‘식물은 안 불쌍하냐’와 같은 말들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경향신문〉 기사 “너만 옳으냐, 나도 옳다’가 감춘 것”을 참조하라.)

피장파장의 오류의 대표적인 예시가 위성정당 사태, 당규 개정 사태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들은 “미통당이 저렇게 술수를 부리는데 어쩌겠냐”, “그렇다고 국힘에게 서울시장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냐”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은 처음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대했었으며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한 재·보궐 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헌[vi]은 민주당이 스스로, 심지어 문재인이 당대표로 있을 때 만든 것이다. 즉 애초에 수구 세력에게는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비난이 가해질 수조차 없는 상황임에도 민주당은 자꾸만 “쟤네가 저러는데 어쩔 거냐”며 자신들의 말 바꾸기를 정당화한다. 국민들이 정권 교체에 힘을 실어주고, 180석을 차지한[9] 슈퍼여당을 만들어준 것이 겨우 ‘미통당보다는 나은’ 정치를 보기 위해서였을까?


[9] 더불어민주당의 현재 의석수는 177석이지만, 선거를 통해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에 국민이 준 의석은 180석이 맞기 때문에 180석이라고 표현하겠다.


한편 적어도 전자의 ‘피장파장 촛불시민’은 표창장 위조는 인정하되 그것이 4년 형을 받을 만한 범죄냐고 반문한다면, (물론 정경심의 1심 형량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범죄는 표창장 위조가 아니라 사모펀드와 관련된 것이었음은 쏙 빼먹는다) 후자의 ‘사실부정 촛불시민’은 아예 표창장 위조라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대한민국 사법부도, 주요 언론들도 모두 ‘토착왜구 적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부정은 음모론과 공작설로까지 이어지는데,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사실부정 촛불시민’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12년 대선 부정선거론, 세월호 인신공양설, 세월호 항적 조작설, 미투 공작설 등등 그가 제기했지만 아무런 실증적인 증거를 입증해 보이지 못한 음모론이 넘쳐나는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TBS 라디오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촛불시민’의 큰 신뢰를 받고 있다.[10]


[10] 2020년 〈시사IN〉 조사 결과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 1위로 집계되었으며(김동인, 2020.10.) 청취율 역시 서울·수도권 기준으로 2018년 2분기부터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정철운, 2020.11.)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금의 정부가 ‘촛불시민’ 팬덤의 지지에 기대어 정치를 하다 보니 이들을 통제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며 끌려다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조국과 박원순의 명예를 위해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까지 쏟아낸 팬들은 문재인이 관련 논란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할 테다. 결국 모든 첨예한 사안에서 대통령은 뒷짐 지고 물러서있다가, 구체적인 판단이 나온 뒤에는 등 떠밀리듯 “유감이다”라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말만을 반복한다.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촛불시민’에겐 효능감을 줄지 모르겠으나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분명 현 정부는 우리가 2016년 광화문에 나가서 쫓아냈던 ‘적폐’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인데, 이제는 그런 모습을 비판하면 적폐가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이미 한번 쫓아냈던 국민의힘은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현 정부의 잘못을 물어뜯기에만 급급하고 철 지난 색깔론이나 꺼내 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반 국민들은 실망감과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누구를 뽑아놔도 결국 권력을 잡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정치혐오만이 남는 것이다.


안철수가 다시 소환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감에도 우리는 그의 ‘새정치’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양당에 속하지 않은 인지도 높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자꾸만 다시 등장한다. 정주식의 말대로 “정치혐오의 부산물” 안철수는 “정치가 진흙탕에 빠질 때”마다 호명되는 것이다.[vii] ‘촛불시민’들은 “제가 MB아바타입니까?”를 외친 ‘초딩안철수’라며 그를 비웃지만 정작 왜 그가 초라한 정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강시처럼 살아 돌아오는 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를 다시 정치판에 불러온 것은 바로 ‘촛불시민’ 본인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2. ‘촛불시민’은 여전히 정의로운 약자인가


정치적 약자, 경제적 강자?

물론 지난 9년간 ‘촛불사제’와 신도들은 실제로 불의에 맞섰다. 하지만 그 9년의 보수정권 하에서 가장 큰 피해자를 본 사람들은 86세대보다는 그 아래 세대들이었다. 86세대에 대한 단행본과 논문에서 하나같이 지적하는 사실은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운이 좋은 세대였다는 점이다. 독재에 저항했다는 명예를 얻은 동시에, 독재정권의 입시·부동산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인 이들[11]은 역대 정부 중 부동산 가격이 가장 크게 오른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집을 가진 자로서 혜택만을 보았으며,[12] 역시 같은 정부 당시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오히려 비정규직 ‘양산법’이 되어 정규직이던 86세대의 밥줄을 보호해주었다. 그렇게 어느 세대보다 빠르게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86세대는 2010년대에 들어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들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축적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자본들을 통해 이명박-박근혜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고, 재수 끝에 결국 2017년 권력 창출에 성공하였다. 대한민국의 19대 대선은 정의의 승리라기보단 ‘보수’와 ‘진보’라는 팀명을 각각 나눠가졌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두 기득권인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마지막 혈투였던 셈이다.


[11] 구체적인 통계 수치는 『386 세대유감』(2019)의 80-81쪽을 참조하라.

[12] 경실련 “집값 상승률 1위 노무현 정부, 상승액 1위 문재인 정부”. (2020.07.21.). 프레시안.


그 혈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촛불시민’들은 이상하게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국 수호’ 집회 피켓이나 포스터를 보았을 때, 그 안에 윤석열 대신 이명박, 박근혜만 들어가면 과거 광우병 시위, 박근혜 퇴진 시위와 정확히 같은 감성이다. 그곳에 있는 인터넷 언론들도, 초청 가수도 모두 그대로였다. (이승환, 이은미, 강산에 등) 이들은 다시 한번 ‘박해받지만 용기 있게 촛불을 든’ 시민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림 9〉 2016년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출처: SBS


〈그림 10〉 2019년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 출처: 뉴시스

이들이 자신을 박해하는 적으로 선택한 것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보수야당보다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검찰이었다. 다시 한번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을 인용하자면 ‘촛불시민’들은 “검찰 수사의 목적이 검찰개혁을 저지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불공평한 사회를 영속시키는 데 있다는 것, 검찰의 특권이 기득권 체제를 지탱하는 중심 기둥이라는 것, 검찰과 유착한 언론의 여론공작에 현혹되면 민주주의의 실질을 조금도 확장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국백서추진위원회, 2020:50-51)”고 한다. 이미 민주당이 앞선 세 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했고 검찰이라는 칼을 통해 ‘적폐 청산’을 진행하였음에도 아직까지 청산하지 못한 적폐가 바로 그 칼인 검찰이라는 주장이다. 그 칼에 대항해 촛불을 든 ‘촛불시민’들은 앞서 본 것처럼 자신을 불의에 맞서는 정의 투사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검찰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도, 검찰개혁이 불필요하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왜 이런 주장이 정부 비리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도드라졌는지, 그리고 왜 조국이란 사람이 검찰개혁과 동일시되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어찌됐든, 그렇게 ‘촛불시민’들은 다시 한번 광장에 모여 ‘짜장면까지 시켜 먹으며’ 11시간동안 조국 자택을 압수수색한 검찰을 악의 무리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조국이 현장의 검사 팀장과 통화해 부인 정경심의 건강 상태를 배려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는 사실엔 무감각했다. 사실 조국은 소위 ‘강남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강남에 살만큼 부자이면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진보적’ 학자로 이전부터 인기가 많았었다. 이런 ‘촛불시민’의 조국에 대한 선망은 경제적으로는 강자의 위치를 점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진보’라고 믿고싶은 속마음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도덕주의’ 비판과 종교의 탄생

이런 물질적 이해관계(계급 재생산)와 정치적 욕망(이념적 가치) 사이의 모순[viii]과 그로 인한 위선 자체가 바로 ‘촛불시민교’의 탄생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순과 위선은 86세대가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겼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덜 드러났지만 이들이 정치에서도 기득권을 잡은 현재는 훨씬 더 눈에 잘 띄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5대 비리(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전입, 논문 표절) 공직 배제’라는 인사 원칙을 스스로 정했었지만, 계속해서 이런 의혹을 받는 이들을 공직자로 임명해왔다. 이는 ‘적폐 청산’을 외치는 민주당 성향의 사람이라도 이런 비리에 연루되지 않고 그런 고위직까지 올라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촛불시민’들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어딨냐”라는 말로 이런 모순을 덮어주려 한다. ‘대의’(민주와 평등)를 그들의 도덕(사회적 흠결)보다 앞세우는 전략인 것이다.[13] 이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촛불사제’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촛불시민’들에게 ‘토착왜구 적폐’, ‘기레기와 검레기’라는 공동의 적을 제공해준 뒤, 그들과 싸우는 것이 진정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깨어있는 시민’의 자세라고 계속해서 속삭인다. 그래서 ‘촛불시민’들은 하염없이 ‘검찰개혁 조국수호’만을 외치고, 조국 사태에 분노한 청년층을 ‘철없는 요새 애들’로 치부한다. 바야흐로 종교의 탄생이다.


[13] 김현준 (2020.06.). 59. 한마디로, “그렇다고 국민의힘 뽑을 거야?”라는 전략.


하지만 사실 이런 ‘도덕주의’에 대한 비난은 ‘촛불사제’ 그리고 상당수의 ‘촛불시민’들이 이미 사회적 지위를 성취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그런 ‘속물적인’ 공정성으로부터 냉정하게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김현준, 59) 하지만 586의 기회사재기로 인해 이미 그들의 자녀와 출발선부터 다른 곳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대의’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14] 그리고 사실, 청와대 비서관들이 다주택자의 지위를 포기하느니 옷을 벗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사태 등으로 이미 만천하에 그들의 ‘대의’란 게 얼마나 알팍한 것인지 폭로된 바 있기도 하다.


[14] 이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상을 그려보고 싶다면 본호의 “스물 넷, 서울의 캠퍼스에서”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촛불시민’들이 적을 공격할 때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덕주의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1일 아주대 의대 교수 정민석은 자기 아들이 조교수가 되었다고 알리는 게시물을 올렸다가, 그의 논문 다수에 그 아들이 ‘제1저자’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ix] 그중에는 과거 ‘조민 사태’ 때 고등학교 1학년생이 의학논문에 ‘제1저자’로 올라간 것이 뭐가 문제냐고 했던 ‘촛불시민’들도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국은 그렇게 물어뜯더니 왜(현 정부에 비판적인) 정민석에게는 침묵하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거짓 등가성에 해당하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도덕주의’를 그토록 비판하던 사람이 투철한 ‘도덕주의자’가 된다는 점에서도 별다른 설득력이 없다. 자국민의 인권을 짓밟고서 권력을 장악한 수구 세력이 북한과의 적대를 강조할 때만 북한의 인권문제 문제를 꺼내 들었듯이, ‘촛불시민’들은 ‘토착왜구’를 공격할 때만 ‘도덕’을 꺼내 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것을 ‘내로남불’이라고 부른다.


‘촛불시민’이 지워버린 존재들

“내가 조국이다”라는 슬로건을 봤을 때 많은 이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내가 김용희다”, “내가 김용균이다”와 같이 투쟁하는 약자와 연대하기 위해 사용되던 레토릭을 강자가 전유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들은 정말로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아마 이것을 전유라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당신은 조국(과 같은 기득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오히려 그들이 약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없었던 사람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가 있다. 이 사람들을 다룬 〈한겨레〉의 기사 “2016년 광화문엔 있고, 2019년 서초동엔 없었던 것들”은 서초동 집회에는 “20대·시민단체·노조 그리고 경찰차벽이 없었다”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서초동 집회 후기에서 “노조 없이 클린해서 좋았다”라는 의견들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촛불시민’들에게 이들은 불가해한 존재들이다. 왜 진보를 말하면서 우리 쪽 편을 들지 않지? 그들이 내놓는 답은 둘 중 하나이다. 그들이 ‘토착왜구’에게 이용당하고 있어서, 아니면 뭐가 더 우선인지를 몰라서. 이러한 프레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는 앞에서 잘 살펴보았지만 그래도 ‘조국백서’의 서술을 마지막으로 옮겨보겠다.

그러나 권력 카르텔화된 언론 보도를 통해 ‘공정의 가치 훼손’ 담론에 몰두한 일부 진보세력들마저도 자신들을 괴롭혀온 그 언론의 보도와 논리에 투항했다. 비판적 점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 개혁전선을 분열시키는 전략에 휘말린 것이다. 누구와 맞서야 할 것인지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 현장에 있지 않고 사상적 특권에 사로잡힌 이들의 추상화된 인식은 이런 왜곡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 조국백서추진위원회, 『검찰개혁과 촛불시민』(2020) 서문에서.

이는 조국이 자신의 SNS에 대부분이 개악된 노동법 중 일부 개선된 조항을 소개하며 “자칭 ‘진보’ 논객들이 왼쪽에서 문재인 정부 공격에만 급급할 때 노동 인권은 이렇게 한 단계 전진한다. (…) ’혀’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삶의 변화를 위한 한 걸음의 진전이다”[x]라며 진보 진영을 ‘저격’하는 글을 올린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한데 정말 그 ‘일부’ ‘자칭’ 진보세력들은 현장에 없어서 뜬구름만 잡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은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조국의 ‘저격 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이 후퇴시킨 것들을 교묘하게 진보라고 포장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8개 중 4개만을 비준하던 것을 정부가 7개로 늘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최소한의 기본권인 핵심협약 비준을 핑계로 내세우며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서는 심각한 개악을 하였음에도,[15] 언론에서는 ILO 핵심협약을 드디어 비준한다는 이야기만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내고, 경제지에서는 한술 더 떠서 그에 따른 재계의 우려까지 전한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기득권에 맞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권리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을 만들어낸다. 민주노총 집회에선 문재인에 대한 비판만이 가득함에도, 이 문제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은 이 정부가 ‘좌파’ 정부라서 그 ‘이 시국에도’ 집회를 하는 것을 봐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노동자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노무현-문재인 정부가 더 싸우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 정부는 노동법을 개악하면서도 친노동 정부를 자처하고, 보수 지지자들과 ‘촛불시민’ 모두 그렇게 믿는 상황에서 실제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혼자만 생떼쓰는’ ‘비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게 ‘친노동 정부’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15] “ILO가 개선을 권고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하청 및 간접고용노동자가 원청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 소수노조 교섭권 보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대신 직장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산별노조 활동 부정 등 노동개악 요소만 가득하다” (민주노총). “정부의 개정안은 국제노동기준을 오히려 훼손하는 내용이며 사용자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노동법안이 되고 말았다” (한국노총). (임동현, 2020.11.13.).

〈그림 11〉앞서 말한 조국의 페이스북 게시글에 달린 댓글의 일부. 이 게시글에는 대략 1500개의 ‘좋아요’가 눌렸고 380회 공유되었다. 출처: 조국 페이스북

‘시민’은 누구인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촛불시민’들이 자신을 왜 하필 ‘시민’이라고 부르는지 의문이 들게 된다. ‘시민’ 말고 쓸 수 있는 다른 단어를 생각해보자면, 서민이나 대중, 민중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민’이라는 단어는 소박한 삶을 사는 중하위층을 연상시키고, ‘대중’이란 단어는 수가 많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리고 ‘민중’이란 단어는 왠지 격렬한 투쟁을 연상시키지만, ‘시민’이란 단어에는 어딘지 깔끔한 품위가 있다. ‘성난 민중’과 ‘성난 시민’, ‘깨어있는 민중’과 ‘깨어있는 시민’ 중 각각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러운가?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진보적 자유주의’[16] 정치학자 최장집은 “민중은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운동을 통해 민주화라는 구체적 현실을 이뤄낸다. 시민은 민주화 이후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이자 이를 실천할 주체를 뜻한다 (최장집, 2009)”고 정리한 바 있다.


[16] 시장 만능의 자유주의와 차별화를 위해 붙인 이름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한 ‘진보성’ 획득을 목표로 한다. 최장집은 2013년 안철수의 싱크탱크에 합류해 이러한 비전을 펼쳐보려 했지만 반 년도 못돼 그와 결별하였다.


노무현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을 받드는 ‘촛불시민’들은 “민중, 계급, 노동, 혁명 같은 거대담론을 회의하고 부정”하였고 그 대신 “생활세계와 생활정치 미시담론을 수용하고 확산시켰다 (채효정, 2019).” 이들은 ‘과격하며 이상주의적인’ 사회운동과는 선을 긋고, 자신을 ”‘비폭력 평화’ 시민이자 조직과 단체에 속하지 않는 일반시민, 순수시민으로 설정 (채효정, 2019)”한다.


이러한 ‘촛불시민’의 비폭력, 절차와 합리성에 대한 강조는 문재인의 대통령 후보 시절 있었던 ‘나중에’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사건은 문재인이 대선 예비후보 등록 후 한기총·한교연·NCCK를 방문하여 동성혼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모두 반대한다고 밝힌 것에서 비롯된 일이다. 3일 후인 2017년 2월 16일, 그가 마침 성평등정책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성소수자 활동가가 큰 소리로 문재인에게 질문을 하였다.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활동가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문재인은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고만 답변하였고, 청중들은 다 같이 “나중에”를 외치며 그 활동가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xi]


‘합리적 절차’를 강조한다면 분명 그 활동가가 잘못한 것이 맞다. 하지만 자신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 가정을 이룰 권리를 부정한 사람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상황에서도, ‘시민’이라면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 자신의 의견을 좋게좋게 말해야 할까? 그 자리에서 “나중에”를 연호한 사람들로부터 그런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해간다면, 과연 그들은 자신의 일도 ‘나중에’ 처리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2월 24일, 21대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던 김기홍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그는 비정규직 음악 교사인 동시에 제주의 첫 번째 퀴어문화축제의 공동조직위원장이었다. 그는 2월 19일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안철수가 토론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대해 “보지 않을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발언한 직후에 올린 글이다.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xii]


‘촛불시민’은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에 감동받지만 정작 그 ‘사람’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무감각하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은 ‘시민’으로 상정되는 존재들뿐이다. 김기홍이, 그리고 그가 대변하려던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자신도 시민이라고 외쳤지만, ‘촛불시민’들은 그들을 시민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림 12〉2020년 2월 6일 김기홍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변희수 하사와 숙명여대 합격생 A에게 보내는 연대 편지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아주세요’” 중 일부.


3. 과연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정의로운가

이 글을 아직까지 (참을성 있게) 읽은 ‘촛불시민’들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 개혁이 한 번에 돼? 현실 정치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지금 코로나로 선진국들도 다 난리 난 거 봤잖아? 우리는 K-방역으로 얼마나 잘 이겨냈는데? 감사한 줄 알아야지!”


당연히 개혁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들이 막강한 권력을 쥐여줬음에도 여전히 가습기 살균제와 세월호의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사람이 먼저’라고 했지만 앞서 보았듯 그 ‘사람’에는 모든 국민이 포함되지 않았다. K-방역은 의료진을 말 그대로 ‘갈아 넣어’서 가능했던 것임에도 ‘덕분에’ 챌린지로 퉁치고 넘어갈 뿐 그들의 지속가능한 진료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코로나19로 인해 늘어난 물류로 하루가 멀다 하고 부고가 들리는 배달운송업계와 궤멸 상태에 놓인 문화예술계에 대한 대책 역시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 코호트 격리된 시설생활자, 구치소 수감인 등은 나라로부터 사실상 버려졌으며, 죽어가는 자영업자를 살리기 위해 임대료를 전액 지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착한임대인운동’만을 펼치는 모습은 177석을 가진 여당이라기보다는 ‘정치 동아리’의 모습에 가깝다. 우리는 지난 4년과 팬데믹을 겪으며 아무리 믿고 기다려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재인과 ‘촛불시민’들이 외쳤던 ‘나중에’는 애초에 없었다는 것도.


김진숙이라는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자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 어용노조 비리 폭로 후 대공분실에 연행된 것이 ‘무단결근’이라고 부당해고를 당한 뒤 36년간 복직 투쟁을 해온 사람. 2003년, 또 2010년 한진중공업의 다른 해고자들은 복직되었음에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그와 함께 지도위원이었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그는 아직도 복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복직했다면 정년을 맞이했을 2020년, 그는 다시 한번 복직 투쟁을 시작하였다. 항암치료 중인 몸을 이끌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온 그는 지난 2월 7일 청와대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여기서 한 문장을 뺄 수도, 더할 수도 없어서 그저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17]


[17] 대부분 언론에서 보도한 전문과 미디어몽구영상자료실 유튜브에서 올린 발언 영상 간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어 영상 속 발언 그대로를 옮긴다.

〈그림 13〉 출처: 미디어몽구영상자료실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전태일이 풀빵을 사주었던 여공들은 어디서 굳은살 배긴 손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아직도 미싱을 돌리고 있는가.
 
아니면 LG트윈타워 똥물 튄 변기를 빛나게 닦다가 짤렸는가.
 
아니면 인천공항의 대걸레만도 못한 하청에 하청노동자로 살다가 짤린 김계월이 됐는가.
 
그도 아니면 20년째 최저임금 코레일 네트웍스의 해고자가 되어 서울역 찬바닥에 앉아 김밥을 먹는가.
 
노동존중 사회에서 차헌호는 김수억은 변주현은 왜 아직도 비정규직인가.
 
왜 청년들은 비정규직으로 차별과 멸시부터 배워야 하며 페미니스트 정권에서 왜 여성들은 가장 먼저 짤리며 가장 많이 죽어가는가.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지키겠다는 정권에서 대우버스, 한국게이츠, 이스타 노동자들은 왜 무더기로 짤렸으며 쌍차와 한진 노동자들은 왜 여전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가.
 
박창수, 김주익을 변론했던 노동인권 변호사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왜 아직도 노동자들은 굶고 해고되고 싸워야 하는가.
 
최강서의 빈소를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한 분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왜 아직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죽어가는가.
 
김용균, 김태규, 정순규, 이한빛, 김동준, 홍수연은 왜 오늘도 죽어가는가.
 
세월호, 스텔라스테이지호는 왜 아직도 가라앉아 있으며 유가족들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가.
 
이주노동자들은 왜 비닐하우스에서 얼어 죽어야 하는가.

문정현 신부님은 백기완 선생님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작한 싸움을 왜 아직도 멈추지 못하는가.

전두환 정권에서 해고된 김진숙은 왜 36년째 해고자인가.

그 대답을 듣고 싶어 34일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약속들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 묻고 싶어 천리길을 걸어 여기에 왔습니다. 36년간 나는 유령이었습니다.

자본에게, 권력에게만 보이지 않는, 나는 유령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

함께 싸워왔던 당신이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해고자인 이 김진숙이 보이십니까.

보자기 덮어쓴 채 대공분실로 끌려가 온몸이 피떡이 되도록 맞고 그 상처를 사슬처럼 두른 채 36년을 살아온 내가 보이십니까.

최저임금에 멸시의 대명사인 청소 일자리를 지키겠다고 울며 싸우는 이 노동자들이 보이십니까.

“아빠 왜 안 와” 묻는 아이에게 “아빠는 농성장에 있어.”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는 이 노동자들이 보이십니까.

동지 여러분, 민주주의는 싸우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습니다. 

과거를 배반한 자들이 아니라, 입술로만 민주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저 혼자 강을 건너고 뗏목을 태워버린 자들이 아니라, 싸우는 우리가 피 흘리며 여기까지 온 게 민주주의입니다. 

먼 길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살을 깎고 뼈를 태우며 단식하신 동지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 할지 모를 우리들.

포기하지 맙시다. 쓰러지지도 맙시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시민종교에서 벗어나기

‘촛불시민교’는 586세대의 정치적 지향과 경제/사회적 위치의 간극에서 생기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에서 오는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종교를 해체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모순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586세대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들의 정당화가 ‘종교’의 형태를 띠는 순간 선량한 피해자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전월세에 살면서도, 노조도 만들지 못한 채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도 자신이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 피해자들 말이다. 과거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박정희를 구국의 아버지라고 믿다가 결국 태극기 집회 참가자가 된 것과 같은 비극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촛불시민’이 이 종교를 해체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쉽고 간단한 방법은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맞는 이념을 가지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그들은 이미 강자의 자리에 있으며 이념적으로도 이미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이제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모든 ‘촛불시민교’의 신도들이 보수로 전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순 끝에서 정치적 지향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 내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애초에 기득권이 아니었기에 그런 모순이 없는 신도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앞선 길보다 좀 더 힘든 길을 가야 할 것인데, ‘촛불사제’들과 함께 싸웠던 기억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인 ‘촛불사제’로서는 자신의 모순을 덮어 가리기 위해 만든 종교였지만, 누군가는 진심으로 자신이 믿었던 가치와 그 집단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사람이기에 당연하다.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런 ‘촛불시민’들에게 박원순의 여성운동 28년 동지이자 민주당 재선의원인 정춘숙의 인터뷰를 권하고 싶다. 정춘숙은 그의 자살 후 괴로운 시간을 보낸 끝에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가 평생 해온 일이 피해자 편에 서고 피해자 목소리를 듣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건데, 그런 글이 훨씬 잘 읽혀야 정상인데, 박원순에 대한 글이 더 잘 읽히더라고요. 그걸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 깨달았죠. 아, 나는 아직도 박원순이라는 사람을 눈에다 렌즈처럼 쓰고 보는구나.

– “여성운동 동지가 박원순을 보내는 방법” (2020.08.10.), 〈시사IN〉 673호.


그렇다. 노무현을, 문재인을, 조국을, 유시민을 빼고 봐야 보인다. 인권변호사, 진보적 법학자, 진보논객으로서의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앞의 글과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모든 공인의 호칭/존칭을 생략하였다. 이들이 맡은 지위가 계속해서 바뀌어왔기에 하나로 통일하기가 어려웠다는 까닭도 있지만,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누구에게 호칭이 없는 순간 불편함을 느꼈는지가 현재 당신이 서 있는 위치를 말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 상민 / poursoi0911@gmail.com


[i] 혜원 (2019). 96

[ii] 청와대 홈페이지 “문재인 대통령–걸어온 길”, https://www1.president.go.kr/president-journey. 접속일 2021.02.28.

[iii] 조국백서추진위원회 (2020). 353-354 참고.

[iv] 이철승 (2019). 80-81.

[v] 같은 책. 92-93.

[vi] [기자메모]선거 앞에선 엿가락 같은 ‘민주당 헌법’. (2020.11.02.). 경향신문.

[vii] ‘안철수 경보기’. (2021.01.02.). 직썰.

[viii] 김현준 (2020.06.). 69.

[ix] “내 도움으로 제아들 의대 조교수”…정민석교수 ‘아빠찬스’ 논란(2021.03.02.). 연합뉴스.

[x] 조국 (2020.12.09.). 권력기관개혁법안의 상임위 통과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두 가지를 소개한다. [페이스북 게시글]

[xi] 한채윤 (2018). 103-104 참조.

[xii] 김기홍 (2021.02.19 14:38.) 우리는 시민이다. [페이스북 게시글]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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