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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특집 '586' 여는 글] 편집위원 호롱

19년의 어느 여름, 나는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피테르 브뢰헬의 <바벨탑>과 마주쳤다. 단지 교과서에서 본 그림이라 반가웠던 마음에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곳에는 널린 게 죄다 그런 그림들이었으니까. 아마도 그건 그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한 인간들의 오만에 분노한 신께서 그들이 협동할 수 없도록 인간의 언어를 모두 흩어버렸다는 옛이야기 말이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창세기 11장 中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586’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우리의 언어가 서로 달라 소통할 수 없다 할 때, 당신과 나의 언어를 가르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시, ‘시간’이 그 안에 있지 않을까?


사람의 목소리를 경유하든 텍스트를 경유하든 간에 언어는 누군가에게 그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전달한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언어는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586세대인 우리 부모님의 삶을 ‘같은’ 언어를 통해 전달받는데도 곧잘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당장 아버지는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대학을 다니셨다는데 나는 그 냄새도, 그 매운 냄새가 진동하는 캠퍼스의 풍경도 영 그려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언어라는 것은 공동의 체계를 구축한 음성과 문자 이상의 무엇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다른 시간을 살아온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지 못한 채 여전히 서로 다른 언어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우리가 같은 언어로 말을 나누고, 그렇게 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착각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이시(異時)에서 발원한 우리의 만남은 오직 난파를 예정하는 걸까?


다행히도 그것은 방향타를 잡는 우리의 손에 달린 것 같다. 나와 당신이 다르다는 생각은 많은 것을 가로막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것들이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고대문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야기를 풀어갈 몇 가지 단서들을 이곳에 두니, 당신은 이들을 품고서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 들어와 주기를.


단서 하나. 586의 언어는 무엇에서 기원하여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단서 둘. 586의 언어와 청년의 언어는 어디에서,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가? 즉, 우리는 586의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는가?

단서 셋. 586의 언어로 미루어 보건대 청년의 언어는 어디로 정향(定向)해야 하는가?                



편집위원 호롱 / jhsjhs09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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