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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장 현정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늘 머물렀다. 여러 생각들이, 종종 거창한 생각들이 순간 떠올랐다 이내 꺼진다.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 각각이 경험하는 세상을 아주 조금씩 더 알게 되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적어졌다.


언젠가의 나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면접 준비를 하던 때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내게 신화 속 어떤 훌륭한 왕에 대한 이야기를 읊어 주셨다. 그가 반인반신이기 때문이었는지, 마법이 걸린 물건의 덕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 모든 이의 상황을 모든 면에서 파악할 수 있었고, 언제나 현명한 재판을 해내었다고 한다. 내게 돌아온 질문은 그러한 마력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여기서 살고 있는 너는 어떻게 재판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초능력이 없기에 온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지도 모르겠지만, 각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끝까지 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다 안다는 것이 신화 속 허구의 개념일지라도 거기에 닿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때가 처음 무언가에 닿아간다는 표현을 쓴 순간 같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자주 해 왔지만, 영원한 불가능을 어렴풋이 감각하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오래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처음 발견한 날 말이다. 그렇게 대답하곤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나의 극히 일부분인 좋은 모습들만 꺼내 보이고 싶던 와중에 드물게, 의도치 않게 진심을 꺼내 보인 것 같아서 말이다. 조금 멍한 상태에서 선생님의 피드백을 들으며 운 좋게 나온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 그, 불쑥 튀어나온 대답은 여전히 너무도 유효했다. 그 신화 속 인물이 누구였는지, 내가 닿아가야 할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모두 알고 싶다는 마음만은 생생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어땠나? 지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거짓을 쓰고 싶지는 않아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쓴다. 메일함을 열면 분명 알고 싶은 마음에 메일 주소를 입력해 신청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곤 확인 링크까지 클릭했던 뉴스레터들이 읽히지 못한 채로 쌓여 있다. 피곤한 사람의 집에 쌓여가기만 하는 빨랫감과 설거짓거리와 쓰레기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루를 겨우 지내면 열지 못한 메일은 한 자릿수 더 늘어나 있다. 메일함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서, 텔레비전에서, 화상 세미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어떤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지 못한 채로 또 하루를 보낸다. 모두 알고 싶다던, 두근거리던 마음이 지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 알게 된 것 하나만큼, 그 하나와 비례하게 머리가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문제의 선명도가 높아질수록 해결은 요원해 보였다. 이 사람도 맞고, 저 사람도 그의 맥락에서 맞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이야기라고, 티끌만 한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왜 이렇게 말이 많냐고, 나의 존재 전부를 수많은 그들과 뭉뚱그려 두고 어색하게 덧놓인 채 웅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 안에서 다시 헤매다 보면, 아득함의 가장 중심에는 알게 된 이상, 그러니까, 절대 모두 알지 못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알게 된 이상, 알기 전의 미봉책으로 회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쉬운 해결 방법을 답습하지는 않겠다는 의지 말이다. 종종 상상하지 못했던 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어 보여, 그곳에 한달음에 도착할 만큼의 새 힘을 당장 마련하지는 못하더라도 끝내 되돌아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무력감이 오히려 견디기 힘든 때가 온다. 그럴 때 글을 쓴다.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로 손을 뻗고 손가락에 묻은 말들로 새 방향을 짚어 본다. 힘을 조금 더 보태어 억지스럽게라도, 끝에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구조를 짓는다. 글이라는 재료로 공간을 구축할 때, 나의 공간은 그래도 희망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절망이라는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꼭 그 문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그 입구를 출구로도 써야 한다면 공간의 복도를 길고 넓게 늘여 오래 걷다가 다른 쪽으로 난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도 느껴 보고 고개도 슬쩍 내밀어 보면서, 곳곳에서 사랑할 만한 구석들을 찾아내곤 평화로울 준비가 된 마음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글로 지어둔 이 공간이 우리의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아가야 할 길은 길고, 닿아가고 싶은 곳은 멀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는, 너무 작은 지구 위에서 나의 목소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내디뎌 보고 싶다. 곧장 어딘가에 도착하지는 못할지라도 희망의 총량을 늘리고 싶다. 목적지 쪽으로 방향을 세심히 맞추고 싶다.

그리고 함께 걷는 당신을 바라보며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감히 알지 못할 피로에도 불구하고 여기 와 준 당신에게 말이다. 같이 쓰는 당신, 그리고 같이 귀 기울이는 당신. 그런 당신을 우리의 공간으로 초대하고 싶다.


환영합니다.


편집장 현정 / byulgo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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