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청년'] 편집위원 혜원
세계는 언제쯤 연대할 수 있을까요. 같은 마음으로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연대. (중략) 내가 만든 집에서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1]
이 문장들의 출처가 짐작이 되는지. 마지막 문장 ― 내가 만든 집에서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2] ― 을 읽고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건 밴드 실리카겔의 <NO PAIN> 무대 브이제잉[3]에서 가져온 텍스트이다. Syn.THE.Size(synthesize: 합성하다)라는 이름을 건 공연에서는 약자, 비주류, 반란, 연대 같은 단어들을 빌려 왔다. 미디어아트 속 텍스트로, (추측하건대)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로 구성된 내레이터들의 목소리로, 그리고 멤버들의 입으로. 그렇게 정성스레 전달한 메시지는 분명 그들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그 말들이 텅 비어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떤 약자가 무엇에 반해 연대하는지, 말하자면 사회적 맥락이 부재한 채 그저 비주류의 ‘힙함’만을 취하려 한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찝찝한 마음으로 공연을 반추해 볼수록 이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최근 비주류의 이미지를 피상적으로 가져다 쓰면서도 그들의 실제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는 예술을, 너무 많이 봤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 지배부터 분단,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낸 한국 근현대사의 예술은 참 시끄럽지 않았던가. 예술 한다는 청년들은 한데 모여 해방을, 이념 갈등의 부조리를,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그들은 개인 차원에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에서 나아가 동시대 예술인들과 함께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예술로 말을 하는 청년들이 보이지 않을까?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한다.
예술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의 총체를 예술운동으로 정의한다면, 그 모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예술가(혹은 운동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운동’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기준점 삼아 예술운동의 계보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이러한 구속은 논의를 전개하기에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그 범주에 포함된 활동만을 예술운동으로 주장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미리 밝힌다.
1) ‘예술운동’ 말고 ‘문화운동’
1970년대 진보적 공연예술가 집단은 자신들의 활동을 ‘문화운동’으로 지칭하게 되는데, 그 시작에는 김지하의 ‘오적필화사건’이 있었다. 1970년 5월 발표된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은 정치권력과 사회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비판했고, 박정희 정부는 해당 작품이 수록된 『사상계』의 시판을 중단했다. 이에 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이 「오적(五賊)」을 싣자, 정부는 『민주전선』을 압수하고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관계자들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4] 이후 음악, 춤, 연극, 미술 등 각기 다른 예술적 기량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김지하를 중심으로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지향을 공유하며 민주화 과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민중을 위한 예술을 찾는다는 목표로 극 양식의 창작 행위에 매진하며 〈진오귀굿〉 (1973)을 시작으로 〈소리굿 아구〉 (1973), 〈금관의 예수〉 (1974) 등의 공연으로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공연예술 활동이 다양해지고 민요, 노래, 춤, 풍물 등의 분야에서 운동적 활동이 본격화된다. 이에 ‘문화운동’은 초기 공연예술 분야에서 나아가 문학과 미술, 더 넓게는 언론/출판/종교/교육 등 예술 외 문화 분야의 운동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정착하게 되었다. 김지하와 함께 문화운동 1세대를 주도한 임진택의 기록에 따르면 이로써 ‘문화운동’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활동을 ‘예술운동’이 아닌 ‘문화운동’으로 지칭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대의 ‘문화운동’이 예술계 내에서 새로운 작품적 경향을 만드는 것과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에 그들은 예술이라는 말을 버리고 문화라는 말을 가져오게 되었고, 예술을 매개로 전개한 사회 참여적 활동을 ‘문화운동’으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이다(이영미, 2013).
2) 예술운동 단체, 집단을 넘어 조직으로
제5공화국 정권의 후반기였던 1984년은 ‘문화운동’ 개념이 정착하고 그 활력이 최고조에 달하여, 예술문화운동을 관장하는 최초의 협의체적 조직으로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가 창립된 시기이다. 초기 민문협 실행위원회는 소설가(송기숙), 미술평론가(원동석), 목사(허병섭), 언론인(김종철), 출판인(김하민)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각 분야의 예술집단이 민문협에 합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문화패’ 혹은 ‘창작소집단’으로 불렸다.
민문협이 창립되던 무렵 문학이나 미술 등 민문협 참가에 소극적이었던 일부 분야는 각기 별도의 협의체를 발족했다. 이로써 자유실천문인협회(1970년대부터 이어진 단체로 1984년 재창립), 민족미술협의회(1985년 창립),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1986년 창립), 민주언론운동협의회(1984년 창립), 민족교육실천협의회(1986년 창립) 5개 단체에 민문협을 합하여 ‘문화 6단체’가 결성된다. 개중 젊은 구성원을 보유하고, 학생운동 경험이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을 충원할 수 있는 등 활동력이 강했던 민문협은 “집단적 실천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펼칠 수 있는 단체”로서 전체 문화 분야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게 된다(이영미, 2013).
3)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중심으로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극에 달하고, 문화운동의 조직화가 가속화되었다. 항쟁 직후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들이 성립되는 한편, “통합적 조직 건설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1988년 9월 김용택, 황석영, 오종우, 채희완, 임진택 등 각 예술 장르 대표들이 모여 예술인 조직 결성을 도모했고, 마침내 12월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이 창립되었다.[5] 민예총은 “민족예술을 지향하는 예술인들의 상호연대 및 공동실천을 통하여 민중의 삶에 기초한 민족문화예술을 건설함으로써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에 기여함”을 창립 목적으로 밝히고, 예술운동에 대한 조직적인 자각과 실천 의지를 통일할 것을 선언했다.[6]
초기 민예총은 군부정권에 대한 대항적 운동을 전개하며 정치적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동시에 조직 역량 강화에 집중했다. 민예총의 황석영 대변인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 후 북한 방문기를 출판하는 등 통일운동을 촉진하고자 했고, 1992년에는 민족예술의 담론화 및 대중화를 위한 문예 아카데미가 개설되었다. 나아가 민예총은 노태우 정부의 문화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해 개혁 방향을 제시하는 등 행정 및 제도에 대한 개입을 시도했다.
민예총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예술운동은,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소련의 해체로 냉전이 종식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민예총은 군사정부와 달리 명목상의 문제가 없는 문민정부에 전면적으로 맞설 수 없는 상황 속, 운동 노선이 복잡해지는 문제를 겪는다. 동시에 대중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등장한 소비대중의 미약한 정치적 관심은 예술운동의 조직적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민예총은 사단법인화를 통해 변화된 현실에 대응하고자 했다. 문민정부에 대한 비판과 정책적 요구에 있어 법인 체제가 더욱 실용적일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후 1993년, 마침내 민예총은 문화체육관광부(당시 문화체육부)의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체제로 전환되었다(이명원, 2010).
민예총의 사단법인화는 한국 예술운동의 성격을 완전히 ― 초기와 단절적으로 ― 달라지게 했다. 이제 예술운동은 민간의 예술계 비주류 청년들의 작품 활동과 민중 대상 교육이 아닌, 주류 정책가들의 문화정책 연구와 비판, 대안 제시 등 정책적 개입으로 그 중심을 옮겨간다(이영미, 2013).
사단법인화 이후, 민예총은 산하에 문화정책연구소를 두고 정책적 논의를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문화정책연구소는 ≪문화정책은 왜 필요한가(1998)≫, ≪국민의 정부 문화정책 평가토론회(2002)≫ 등의 심포지엄을 개최하며 정부의 문화정책에 관한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는 문화정책 보고서인 『창의한국(2004)』을 발간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정책 수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1998.2~2003.2)와 노무현 정부(2003.2.~2008.2)의 집권기 동안, 많은 민예총 출신의 예술가들이 공공기관 혹은 위원회의 직무를 맡았다. 가령 민예총 창립 인물 중 한 명인 고은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거나[7] 노무현재단 고문으로 추대되는[8] 등 두 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민예총 이사장직을 맡았던 김윤수는 노무현 정부에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9], 같은 시기 문화부 장관이 된 김명곤 역시 민예총 소속이었다.[10]
결과적으로 정권 내부에서 민예총의 입지는 공고해졌고, 동시에 비주류 예술운동 집단으로서 민예총이 지니고 있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민예총은 제도화·주류화를 거치며 작품 활동과 민중 교육으로 담보되던 ‘운동성’과 ‘현장성’을 잃고, 그 대신 정부의 문화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이명원, 2010). 이와 같은 변화는 초기 민예총 창립의 근간이 되는 민족주의적 이념이 대중적 영향력을 상실하는 시대와 맞물려, 민예총이 기존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화운동과 궤를 같이하며 전개되었던 예술운동은 중심 이데올로기의 상실과 신자유주의적 변화, 그리고 구심체로서 기능하던 민예총의 운동성 저하 등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예술운동의 중요한 가치이자 원리로서 다양한 현장 예술과 노동자 문화의 궤적을 만들어왔던 행동주의 미학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술행동으로 거듭난다.[11] “탈제도화를 존재론적 기반으로 삼는 예술행동은(이동연, 2018)” 사회운동 현장 곳곳에서 전개되었으며, 그 안에는 “기존 예술운동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새로운 대안 모색이라는 과제를 내재하고 있었다(이원재, 2019)”.
다음은 《문학/과학》에 수록된 글 「문화적 실천으로서 ‘예술행동’의 궤적들」을 참고해 정리한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주요 예술행동 사례이다.
1)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대추리 현장 예술활동 (2004)
[그림 1] 최병수 작가의 설치미술작품 사이로 투쟁 현장이 보인다. ©권우성
주민 투쟁 현장이 보이도록 설치한 최병수 작가의 작품. 작품에 뚫린 구멍 너머로 보이는 투쟁 현장에 ‘이 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킨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림 설명 끝.
2004년 7월, 국방부는 미군과 합의해 경기도 평택시에 미군 기지를 확장 이전하기로 한다. 이에 거주지 이전을 강제 받은 주민 중 일부는 정부의 협의 매수에 응하지 않고 투쟁했다. 특히 과거 두 차례(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강제 이주를 요구받은 갖춘 팽성읍 일대의 주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12]
당시 진보 예술인들은 투쟁 현장에서 ‘평화축전’을 열어 대추리 주민들의 불복종 운동에 함께했다. 그들은 평화를 기원하는 풍물제를 시작으로 그림 그리기 퍼포먼스, 음악 공연, 연날리기, 시 낭송, 촛불집회 등을 펼쳐 보였다.[13]
이 사건은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예술행동의 형태를 갖추는 데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폭력적인 권력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했다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 투쟁하는 당사자들과 함께 공공예술을 기획하고 현장을 거점 삼아 공동 작업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평화축전을 계기로 ‘장소 거점형 예술행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이원재, 2019).
2) 한미FTA 반대 운동 (2007)
[그림 2] 〈한미FTA중단촉구 범국민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예술인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건치신문
한 손에는 ‘한미FTA 저지!’라고 적힌 피켓을, 다른 한 손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 앞에서 예술인들이 공연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2006년 2월, 한국과 미국의 통상 장관은 한미FTA 협상을 개시했고, 이듬해 4월 협상은 타결된다. 협상에 반대하는 농민, 노동자, 학생 등으로 구성된 시민들은 광화문 소재 미국 대사관 앞에 모여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대학생문화연대 예술단이 춤 공연을 펼치는 등 진보적 예술단체가 참여했다.[15]
한미FTA 반대 운동은, 시위대의 구성과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 보다 일상적이고 자기참여적인 차원에서의 대중적 예술행동의 폭발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비예술가집단 시민들은 예술행동의 일원이 되며 행동주의 미학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사회적 연대의 방법으로서 예술행동이 지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이원재, 2019).
3) 희망버스 운동 (2011)
[그림 3]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 중공업 앞에 모여들었다. ©정택용
부산 한진중공업 앞에 모여든 사람들.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림 설명 끝.
2010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반대 및 노동 조건 개선 농성이 일어났다. 투쟁을 주도하며 고공농성을 감행한 김진숙 지도위원의 무사 생환을 기원하는 노동자들을 현장으로 나르던 ‘희망버스’. ‘희망버스’를 기획한 사람은 바로 시인 송경동이었다. ‘희망버스’ 운동은 한진중공업 사태를 전국적 이슈로 끌어올렸고, 이 흐름은 SNS를 타고 온라인까지도 이어졌다.[16]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운동의 구성과 효과 전반이 예술행동의 기획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SNS를 매개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시공간을 뛰어넘는 관계를 구축했다는 점 역시 유의미하다(이원재, 2019).
1980~1990년대 예술운동과 2000년대의 예술활동은 ‘예술’과 ‘제도’의 관계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개 진보적 예술 활동은 제도 밖에서 권력의 폭력이나 억압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정체성과 운동성을 구축해 나간다. 민예총을 축으로 한 예술운동의 흥망성쇠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민예총은 산발적으로 뻗어있던 진보 예술 단체의 세력을 한데 모아, 군사 정권에 저항하는 예술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도록 했다. 그러나 사단법인화를 거쳐 제도권 내에 편입된 후의 민예총은 정부와 전면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선에서 정책에 개입하는 등 활동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후 전개된 예술활동 역시 정부에 저항함으로써 제도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를 단순 대립 구도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술, 정확하게는 예술가들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제도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청년예술가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문제와 함께, 시장 진입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에 2010년 무렵 청년예술인의 생계 문제가 정책적 의제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에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되었다.[17] 예술인에 대한 공공지원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예술인의 복지 지원을 통해 예술인의 창작활동 증진과 예술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18] 해당 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예술인 지원 정책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지원은 생계를 보장하고 제도적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예술가들이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끔 돕는다. 실제로 청년예술인들이 국공립 지원제도 안으로의 진입을 선택하는 이유들은 ‘예술 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로 수렴되었다. 그들은 제도 내에서 유형화된 지원과 보호를 통해 안정감을 확보함으로써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정주하, 2021).
더군다나 학력과 부모의 경제력 등으로 철저히 위계화 되어가는 예술계 내에서, 자립적인 창작 활동을 기대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실제로 기초예술 분야의 경우 예술인의 재정자립도가 50%를 넘지 못하며, 공적 기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동연, 2020).
예술과 제도. 그 사이에서 무수히 진동하며 생존을 요구받는 예술가들은 어떤 모습으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을까. 2000년대의 예술행동이 예술운동이 가지고 있던 저항적 활동성을 이어받았다지만 그 양상은 분명 다르다. 특히 하나의 의제를 고수하기보다는 사건에 따라 활동가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형태로 지속되기에, 현재 운동의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단체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소속 특별위원회 ‘미대의 외침’을 만나, 예술과 실천을 주제로 활동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특별히 ‘미대의 외침’을 섭외한 이유는, ‘미대의 외침’이 동아리가 아닌 학생회칙에 명시된 공식 기구로서 활동한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지위적 특수성에 기반한 활동에서, 제도와 복잡한 – 제도에 저항해 운동하다가도, 제도에 의해 존재가 보장되는 – 관계를 맺는 청년예술운동가들의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1)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학과 21학번 홍예린이다. 미대의 외침은 작년 7월에 가입했고, 올해는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 미대의 외침은 어떤 단체인가?
동아리는 아니고, 미술대학에 속한, 학생회칙에 명시된 공식 기구이다. 2014년 교육권 운동을 위한 단기 프로젝트 실천단으로 시작되어 그다음 해인 2015년에는 1년 동안 소모임으로 운영되었고, 2016년 미술대학 특별위원회로 인준되어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육권, 노동권, 성인권에 집중했던 초기의 역할이 인권 전반으로 확장되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회 의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아띠(공동체 윤리위원회)’, ‘모닥불(노학연대)’, 성인권위원회 등 학내에서 활동하던 다른 인권 단체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느낀다.
간혹 이름 때문에 예술가의 권리를 주제로 활동하는 단체라고 오해받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다. 미대생으로서 예술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 주면 되겠다.
3) ‘동아리’도, ’학생회’도 아닌 ‘특별위원회’라는 지위가 독특하다. 이러한 특성이 단체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무래도 학내 인권 단체와 학생회 사이에서 커넥션을 도모하게 되는 위치인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비정규직 시설노동자 노동조합 분회와 미술대학 학생회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해 행사 진행을 돕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 진보적 의제를 가지고 활동하는 단체로 ‘홍대인이 반하는 사랑(성소수자 동아리, 이하 홍반사)’, ‘찰칵(시사사진 동아리) 홍대 지부’, 그리고 ‘미대의 외침’ 정도가 있다. 개중 유일한 공식 기관인지라 두 단체에 영향력을 기대받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정작 활동 인원의 감소로 단체의 존폐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기대에 부응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4) 제도 내 조직이라는 지위가 구속으로 작용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미술대학 학생회의 스탠스에 따라 매년 달라지며,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올해는 기구를 인준받거나 예산을 지원받는 등에 있어 학생회와 충돌한 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미술대학 학생회 분위기 자체가 자유롭기도 하고, 미대의 외침 활동에 호의적이다. 코로나로 학교가 폐쇄되고 미대의 외침 활동을 중단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대의 외침이 학생회와 함께 미술대학 내 사업을 꾸려 나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오히려 팬데믹을 지나 규모가 축소된 이후, 엄연히 공식 기구임에도 학교로부터 방치되어 겪는 어려움이 더 크다고 느낀다. 일례로, 우리는 공간도 없다.
5) 실천을 이야기하는 여타의 단체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예술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점인 것 같다. 이 부분이 활동 과정에서 어떻게 고려되고, 또 반영되는지 궁금하다.
사실, 우리 단체의 정말 큰 고민이다. 특히 단체의 성격이 초기와 많이 달라지고, 학내 유일의 인권 단체로서 기능하다 보니 ‘예술가의 정체성’까지 챙길 여력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내부적으로 활동 위원들끼리 사회 참여적 전시를 기획해 보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실현된 적은 없다. 다만 단체 티셔츠, 현수막, 홍보물 디자인 등 운동 현장에서 분명히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몇 회원들은 졸업 전시 혹은 그 후의 작업에서 미대의외침 활동 경험을 녹여 내기도 한다.
6)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도권 내 조직이라는 지위는 활동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활동 중 실감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해가 다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눈에 띄게 줄었다.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온전히 ‘열정페이’로 굴러간다고 느낀다. 경제적 보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는데, 혐오 세력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는 상황에 소진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고, 나와 함께 목소리를 사람들과 연대한다는 감각. 그런 것들이 중요한데…. 동기가 되어주는 내적인 연료가 채워지지 못하는 것 같다.
7)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
예술은… 그냥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대중에게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휘발되지 않고 더 오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작업이라는 건,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을 기대할 수 없고,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동기부여로 지속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는 나에게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운동에 뛰어든 경험은, 내적인 동기의 원료가 되었다. 앞으로 예술가로서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그래서 힘이 닿는 데까지 할 것이다. 작업이든, 운동이든. 이 둘을 함께 가져가고 싶다.
‘미대의 외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상상과 많이 달랐다. 그들이 실감하는 문제는 학생사회의 무관심으로부터 비롯한 ‘존재’의 위기였다. 연대할 동료가 없고, 부족한 인력에 활동성을 끌어 모으기 어려워, 운동하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흐릿해진다. 때문에 예술로 실천을 기획하는 일의 지속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의 현실은 이런 모습이었다.
예술운동에 뛰어든 청년이라는 존재는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낭만적이지도 않고, 초라한 ‘현실’의 이야기였다. 탈제도화를 지향하는 동시에 제도적 기반이 지위를 보장해주는 아이러니에서, 제1의 목표는 생존이 된 듯하다. 청년예술운동가들은 일단 살아 남아야 ― 예술계 내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혹은 문자 그대로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해야 ― 한다.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도, 그 양식이 보장하는 제도 안에서 삶을 이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제도권의 억압보다도, 권력에 가 닿지도 못할 만큼 미약한 활동성이 청년예술운동의 존폐를 위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형태로든 예술과 운동을 이야기하는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도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1980년대의 예술운동을 볼 수 없지만, 그 정신은 2000년대의 예술행동으로 이어졌다. 공동의 의제가 사라지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운동’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에도, 청년들은 사회참여적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때로는 제도적 지원 혹은 제도로부터의 배제 사이에서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지금은 예술로 말을 하는 청년들이 없을까?”
예술로 말하는 청년들이 없었던 적은, 없다.
편집위원 혜원ㅣwonderofwon@gmail.com
[1] 실리카겔은 공연 중 해당 문구가 〈Machine Boy〉(2023) 발매 당시 진행한 참여형 프로모션에서, 팬이 작성한 글을 가져온 것이라고 밝혔다. 공식적으로 내레이션 내용이 공유되지는 않아 팬 계정을 참고해 적었다. (X @sakalin_s)
[2] 〈NO PAIN〉(2022)의 가사와 유사한 문장. 정확한 가사 내용은 ‘내가 만든 집에서 우리 함께 노래를 합시다’이다.
[3] 라이브 공연 시에 음악과 함께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김윤태, 2007).
[4] <역사속 오늘> 시인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 구속. (2015.06.02.). 연합뉴스.
[5] [길을 찾아서] 대중 속으로 간 민예총…‘자, 손을 잡자’ 노래패 공연 대박 (2019.10.19.). 한겨레.
[6]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7] 한반도 새 시대] 방북인사 소감 (2000.06.16.). 매일경제.
[8] '노무현재단' 공식 출범…이사장에 한명숙 전 총리 (2009.09.23.). 조선일보.
[9]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 (2019.10.19.). 한겨레.
[10] 문화 예술계도 정권교체?…현기영씨 문예진흥원장 임명 (2009.09.29.). 동아일보.
[11] 물론 예술행동 역시 예술운동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서로 다른 양상의 운동을 구분하기 위해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 전개된 운동을 ‘예술운동’으로, 2000년대의 사회참여적 예술 활동은 ‘예술행동’으로 지칭하겠다.
[12] [‘총성없는 전쟁’ 평택 미군기지터 르포] “세번째 강제이주…이젠 못나가” 긴장의 대추리 (2006.03.21.). 서울신문.
[13] 평택주민들 "미군기지 이전반대 평화축전" 연다 (2004.12.15.). 오마이뉴스.
[14] [팩트체크] 문재인 “한미 FTA는 우리가 한거죠” (2017.05.01.). KBS뉴스.
[15] 미 대사관 앞에 울려퍼진 외침 "한미FTA 반대한다! 중단하라!" (2007.03.25.). 오마이뉴스.
[16] 희망을 가두진 못하리 (2011.12.23.). 한겨레21.
[17] 달빛요정, 최고은, 김운하… 예술인 죽음 못 막나? (2015.07.24.). 오마이뉴스.
[18] 국가법령정보센터
참고문헌
단행본
이동연 (2018). 예술@사회. 학고재.
논문 및 저널
김윤태 (2007). V제잉에서 인터랙티브미디어아트 활용.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7(10), 80-88.
이명원 (2010). 진보적 문예운동의 형성과 전개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0(23), 40-69.
이영미 (2013). 1970년대, 1980년대 진보적 예술운동의 다양한 명칭과 그 의미. 기억과 전망, 0(29), 422-464.
이원재 (2019). 문화적 실천으로서 ‘예술행동’의 궤적들. 문화과학, 100, 357-381.
정주하 (2021). 청년예술인 지원 정책과 예술 활동 지속의 관계에 관한 근거이론 연구 (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기사
김경애 (2019.10.19.). [길을 찾아서] 대중 속으로 간 민예총…‘자, 손을 잡자’ 노래패 공연 대박. 한겨레, Retrived from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58534.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40813
김병철, 이재훈 (2006.03.21.). [‘총성없는 전쟁’ 평택 미군기지터 르포] “세번째 강제이주…이젠 못나가” 긴장의 대추리. 서울신문, Retrived from https://www.seoul.co.kr/news/plan/2006/03/21/20060321003003
노형석 (2019.10.19.).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 한겨레, Retrived from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72414.html?utm_source=copy&
신소윤 (2011.12.23.). 희망을 가두진 못하리. 한겨레21, Retrived from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070.html
송평인 (2009.09.29.). 문화 예술계도 정권교체?…현기영씨 문예진흥원장 임명. 동아일보, Retrived from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30217/7913563/9
안홍기 (2007.03.25.). 미 대사관 앞에 울려퍼진 외침 "한미FTA 반대한다! 중단하라!". 오마이뉴스, Retrived from http://bit.ly/owsOP
윤창희 (2017.05.01.). [팩트체크] 문재인 “한미 FTA는 우리가 한거죠”. KBS뉴스, Retrived from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473769
이규승 (2015.07.24.). 달빛요정, 최고은, 김운하… 예술인 죽음 못 막나?. 오마이뉴스, Retrived from https://omn.kr/enre
조호진 (2004.12.15.). 평택주민들 "미군기지 이전반대 평화축전" 연다. 오마이뉴스, Retrived from http://bit.ly/4nroUm
'노무현재단' 공식 출범…이사장에 한명숙 전 총리. (2009.09.23.). 조선일보. Retrived from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3/2009092301400.html
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40813
<역사속 오늘> 시인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 구속. (2015.06.02.). 연합뉴스. Retrived from https://www.yna.co.kr/view/AKR20150601002800704
[한반도 새 시대] 방북인사 소감. (2000.06.16.). 매일경제. Retrived from https://m.mk.co.kr/news/politics/2331134
기타 인터넷 자료
국가법령정센터, https://www.law.go.kr/법령/예술인복지법. 접속일 2024.08.12.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https://koreaminyechong.org/a-declaration-of-foundation/. 접속일 2024.08.12.
사카린(2024.05.19.09:57). 접속일 2024.08.12.. 세계는 언제쯤 연대할 수 있을까요 [X 게시글]. Retrived from https://x.com/sakalin_s/status/1791996476123762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