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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청년’들에게: 탈진한 세계에서 길 잃기

[특집 '청년] 편집위원 민상 

청년에 관한 한, 청년들은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청년 당사자들은 종종 본인의 ‘청년됨’에 호소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만 18세 이상 34세 이하’라는 인구학적인 범주 내에 들어왔다고 해서 바로 청년이 되진 않는다. 청년은 제도를 비롯한 통치성에 의해 응시당함으로써, 그 응시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발명되는 중의 가설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늘 청년임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당장 여러 청년 지원 정책에 응모하기 위한 자격요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청년’이라는 호명은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원 정책의 슬로건에 빈번히 사용되는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청년은 ‘내일’로의 ‘도약’을 준비함으로써 정의되고, 그와 동시에 탄생한다. 이처럼 청년이라는 정체성에는 줄곧 미래의 시간성이 비집고 들어앉아 있다. 그 미래가 ‘청년됨’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만큼, 청년됨 속에서 청년의 자리는 비좁아진다. ‘MZ 세대론’처럼 이름을 달리해 반복돼 온 사이비과학이 청년을 미성숙하고 무질서한 존재들로 그려낼 때, 이 재현의 납작함은 청년의 ‘저주체성’[1]을 불러오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저주체성은 청년의 주체성이 기성 담론에 의해서 수탈당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원과 주체성을 분유 받는 과도기에서 발생하는 임시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청년은 방주네프의 통과의례 도식에서 두 번째 단계인 ‘전이’를 이행하고 있는 존재다. 아동기와 결별하고, 새로운(그리고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통합’ 이전하는 도중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때 의례의 상징적인 성격이 청년이라는 보다 공식적이고 인구학적인 범주에 개입한다.


노동시장의 관점에서 청년은 의무교육제도를 통과하며 노동공급자로서 스스로의 ‘질{quality}’을 향상시키는 과정에 놓여있고, 국가공동체의 차원에서는 국가를 상상적으로 구성하는 주체의 잠재태로서 높은 기대를 투자받는다. 한국 정치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고 ‘청년 정치’가 승인받는 한편 그 인정이 제한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청년은 주체성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계란을 나눠 담는 바구니와 같다. 언제든지 투자자가 원금을 회수하면 바구니는 텅 비어버린다. 아직 청년 빈곤과 청년 바깥의 청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청년이라는 범주는 이미, 그 자체로 조금은 빈곤하다.


오래된 청년 


청년이라는 기호 속에서 발생하는 이같은 긴장과 모호함은, 그것의 발명부터가 문학적이고 수사적인 양식들에 기대고 있던 탓일 수 있다. ‘청년{靑年}’이라는 용어는 개화기 일본에서 영국의 보이스카우트나 독일의 ‘유겐트플레게{Jugendpflege}’를 ‘청년단’ 운동으로 번안하고 장려하던 맥락에서 처음 유통되었다. 최남선, 이광수 등 근대 초기 조선 지식인들이 근대적 지식과 정동을 한 톨도 빼놓지 않고 정욕적으로 흡수하는 ‘소년’이라는 형상에 관심을 가졌던 것의 연장선에서, 청년은 애국-군사주의의 맥락 속에서 근시기에 도래할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완벽한 주체의 형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청년은 봉건 사회에서 소년-성년으로만 생애주기를 분절하던 때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젊음’이라는 시기를 포착하고 정초해 내는 틀이기도 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에서 출발한 문학 양식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이 이 ‘젊음’을 성공적으로 유통시킨 매체였다. 어른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성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심리적인 불안함과 역동성을 테마 삼는 교양소설은, 혼란스러웠던 근대이행기의 주체가 마주한 여러 모순적인 가치들을 우선 봉합하고 안정화하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는 곧 교양소설이 청년 당사자들만의 것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청년의 시간성이 ‘소년’의 그것과 분화되는 한편 ‘장르화’되었고, 교양소설의 주인공이 마주한 모순의 ‘화해’는 청년의 삶에 곧 도래할 메시아적 사건으로 정박해 버렸다.


청년들이 마주한 불안정성은 그 덕에 근대 국가의 통치성과 저항적인 청년 주체들이 공유하는 코드일 수 있었다. 젊음의 파국, 실패마저도 ‘성숙’이라는 다음 단계가 전제되는 한 교양소설이 중심화한 서사 속으로 회수되기 십상이었다. 근대 이후 젊음이 누려온 특권은, 어디까지나 유예된 특권이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청년운동을 적극적인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던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청년운동 등 군사개발주의의 자장 속에서 청년의 이같은 양가성을 통제하려 했다. 국가를 군대로 은유하는 군사주의의 레토릭 속에서, ‘청년’은 헤게모니적 남성상에 기대어 형상화되는 한편 그것을 보편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 속에서 ‘근로’하지 않는 청년, 국가에 저항하는 청년은 훈육과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는, 그들이 지배적 남성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초남성의 발 아래에서 ‘여성화’된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고로 ‘청년’ 앞에는 언제나 ‘남성’이 괄호 쳐져 있었음을 함의한다.


이렇듯 억압된 채 형성된 청년의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며 전개된 대항적 청년문화 역시 정권이 선점한 청년 담론 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소설가 최인호가 1974년 한국일보에 발표한 「청년문화선언」은 청년 문화가 제도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창발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당대 청년담론을 비판했지만, 당대의 제한된 표현의 자유 속에서는 우회된 비판일 뿐이었다.


이는 단순히 저항의 수위나 농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최인호의 소설들은 억압된 당대 청년문화의 균열들을 보여주며 국가에 의해 공식화되지 않은 청년들을 호명해왔다. 그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하위계급 남성들은, ‘퇴폐청년’으로서 지배적 담론에 의해 남성성의 주변부에 배치된다.


이때 헤게모니적 청년성과 최인호의 퇴폐청년성은, 헤게모니 남성성과 대항적 남성성이 경쟁하며 큰 틀의 남성성을 성립시킨다는 코넬의 모델을 답습한다. 실제로 최인호가 그려낸 이런 실패한 남성들의 표상은 4.19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대학 (남성) 지식인들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저항하는 동시에 순응해야만 했고, 엘리트로 호명되는 동시에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서 훈육되고 관리당했다. 이런 틈에서 박정희와 최인호의 두 ‘청년’은 각자 허구의 ‘초남성’을 의식한 채 남성-탈락자들, 여성, 동성애자 등의 존재를 폐제함으로써 성립했다.


청년 이준석과 잔인한 낙관


애당초 ‘청년’이라는 존재는 이런 이중의 약속 위에서 탄생했고, 갱신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도 하나의 약속이 되었다. 대개의 경우에, ‘청년’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법 앞에서’ 신체를 특정 기호로 해석될 수 있도록 연기하는 것이자, ‘말할 수 있는’ 특정한 청년의 자질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박정희와 최인호의 두 청년의 형상의 대립은 그 첨예함을 잃고 ‘청년됨’을 뒷받침하는 여러 서사적, 시각적 기호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이 서사적 모순과 균열의 봉합 자체가 청년을 구성하는 항으로서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독특하고 고유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저출산, 저성장 등 국가적 과제에 행정 언어의 차원에서 개입할 것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이를 마주하는 청년 당사자들은, 그 요구의 대가로 주어진 약속 속에 잠재해 있고 코 앞까지 당도한 파국을 예감하고 있다. 로런 벌렌트의 말을 빌리면, 기성 세대가 하나의 장르로 빚어낸 ‘청년’과 어설프게 감침질되어 연결된 청년들의 일상은 이처럼 “다수의 역사{histories}가 수렴하는 영역(로런 벌렌트, 2024: 24)”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아래의 모든 프레카리아트{precariat}[2]들처럼 IMF 이후 만성화된 불안정 속의 삶, 불안정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삶을 앞장서 마주한다. 벌렌트는 이것을 관리하는 서사적 자원으로 이전 시대에 형성된 ‘좋은 삶’의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이 약속의 매트릭스를 향한 애착으로서 ‘낙관’을 제시한다.


이 낙관은 애착의 대상이 약속하는 내용(가치, 장면, 세계관)이 위기의 불안정성 속에서 그 서사적 형식과 해리되어, 주체의 삶을 유지시키는 한편 그것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때 대두되는 것은 이 고통의 관리와 통제다. 낙관을 유지시키려는 주체의 신경증적 면모와, 이미 파산해버린 낙관 속에서 상실한 대상을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우울감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관리와 통제를 정치적인 이용 가능성으로 열어놓는다. 이 은은한 우울증적인 상태에 빠진 저주체에게 세계를 중개하는 회로는 끊어졌다고 여겨지지만, 가족, 국가, 지역 등 지나간 ‘좋은 삶’의 자원들은 그 회복 가능성의 완전한 회의를 차단하며 낙관을 살려놓는다. 다만, 이 낙관은 그 낙관이 가능하게 만드리라 여겨지는 ‘좋은 삶’을 서서히 마모시킨다는 점에서 잔인할 뿐이다(로런 벌렌트, 2024: 49).


이 속에서 청년 정치의 모습은, 정치 그 자체라기보다는 ‘근사 정치적인 것{the juxta-political}’이 될 가능성이 크다.[3] 청년 정치는 규범적 공공 영역의 정치, 기성세대의 정치와 이항 대립적으로 나름의 의미론의 형식을 정초해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주체적인 제도권 정치를 통과하고 그에 동일시하는 방편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21년 이후 일상적 의미에서 ‘청년 정치’와 부당하게 동일시된 인물인 이준석이야말로 ‘청년 정치’라는 근사 정치의 으스스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학준이 앞서 올바르게 지적했듯, 이준석은 ‘평범’함을 향한 잔인한 낙관을 정치적으로 무기화한 인물이다. 양대 정당을 가리지 않는 그의 폭넓은 ‘비판’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수사로서 ‘상식’은, 회사원의 아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고 최고의 학교를 다니고 나중에 제1야당 당대표까지 할 수 있”[4]는 기반으로서 공정-평범의 내러티브에 깊이 기대고 있다(김학준, 2022: 358). 그는 말하자면 기성 정치가 마련해준 ‘청년’이라는 범주를 입고 ‘단절’을 선언하지만, 실상 수사를 벗어난 그의 정치적 내용물은 ‘청년의 위기’를 낳는 조건을 탐색하는 대신 연속적인 내러티브에 애착을 투여하고 이용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컨대 그는 냉소적인 넷우익이 정통보수 정치의 제도에 적응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하이브리드다. 바로 여기에 이준석류 청년 정치의 확장성과 보편성이 있다. 그가 말하는 “회사원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위치, 그리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밥을 해주고 아들 집을 나와 아파트 주차장에서 혼자 한 3시간을 우”[5]는 헌신적 어머니의 존재는, 정말 그가 처한 ‘중산층’의 계급적, 문화적 좌표를 독자/유권자를 향해 고백하는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서브컬처를 비롯한 동시대 문화양식에서 관객이 대입될 수 있는 가상의 자리, (미술평론가 권시우의 개념을 빌리자면) ‘유닛’[6]으로서 작동하기를 목표하는 것이다.


이 이입, ‘유닛’으로 주체가 동일시하는 회로는 주체와 딱 들어맞지 않아 효능감과 권능을 실질적으로 누리게 해주지는 못한다. 유닛은 저주체의 주체화를 돕는 보철물이지만 동시에 새장이기 때문이다. 이준석이나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형’이라고 부르는 넷 상의 남성 호모소셜은, ‘우리형’에 대비되는 ‘아우’의 자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틈에서 이준석이 제시하는 “좋은 삶”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는 “나쁜 삶”이 되어 그것을 소진시키는 선택지를 선전할 가능성이 더 크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더러 “아픔이란 건 상대적”이고 “이분들 못지않게 굉장한 아픔을 가진 분들이 있”다며 이들의 요구를 일축할 때, 이 정동적 회로를 찾는 저주체들은 유닛에 이입해 획득하는 ‘보편적인 상대성’ 속에서 초주체의 권능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다. 여기엔 ‘청년’도, ‘정치’도 없다. 오직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둔갑한) ‘세계’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환생했더니 한국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청년’이 실존하지 않는다거나, 청년 담론과 정치의 가능성을 회의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청년’이란 기표가 청년 존재들을 비루하게 남겨놓는 한편, 그 속에서 가능성과 생존 전략을 찾는 것 역시 언제나 청년들의 몫으로 조금씩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개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즉각 독해되지만, 아직은 ‘근사 정치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여러 저주체들의 하위 정동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1] Me vs My Parents 밈. 

출처: https://ar.pinterest.com/pin/810648001706256067/

밈 이미지의 상단에서 ‘20대 시절의 부모님’은 풋풋한 표정으로 ‘우리 이 집을 사고 아이는 둘 낳자’고 말하고 있는 반면, 하단의 ‘20대의 나’는 포토샵을 이용해 해당 밈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한국에서도 갖가지 변형을 낳으며 유행하고 있는 ‘Me vs. My Parents’ 밈은 상대적으로 “좋은 삶”의 근처를 공전하는 이들에게도 낙관의 ‘잔인함’이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이 밈은 날로 가속되고 있는 사회적 삶의 진행 속도와는 달리 개개인의 생애주기의 속도는 오히려 감속되었다는 데서 오는 열패감과 당혹감을 자원삼는다. 이 밈이 절규하는 식으로 주장하고 싶은 바는, 말하자면 우리는 날이 갈수록 쓸모 없어지고 하찮아지고 있다[7]는 것이다. 밈의 매개성을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내는 [그림1]은 낙관과 절망이 서로를 참조하며 영원히 순환하는 회로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밈에서 표면화되는 실패한 남성들의 패배감은 밈을 플랫폼 삼아 정동적 연대를 이루기도 한다. 이 경우, 밈이 소재 삼는 청년의 유예된 성장 상태는 완성도 높은 안락함을 제공한다. 서브컬처 비평가 우노 츠네히로는 주인공 소년과 다양한 타입의 미소녀가 등장하는 ‘하렘물’의 서사적 특징으로 모라토리엄(유예된 성장 상태)이 한도없이 연장됨을 든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마지막화를 위해서 물러나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반복되는 일상만이 소년 주인공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이와 유사하게 오쓰카 에이지는 전후의 일본 만화가 캐릭터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의 변화를 그리기 어렵고, 따라서 성숙/성장을 재현할 수 없다는 ‘아톰의 명제’를 제하기도 한다. 이것이 ‘기호적인 신체로 근대문학적인 내면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를 던진다면,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이 질문은 ‘기호적인 정체성(‘청년’)으로 교양소설적인 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굴절되어 들릴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질문은 해결불가능하다.


실제로 이것은 서브컬처나 문학 양식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용접노동자 출신으로 지방 공단에서의 노동 경험을 풀어낸 『쇳밥일지』로 호응을 얻은 천현우는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 '지방 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의 다음 부분으로 인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계급 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지난한 현실 속에서도 지방 총각들은 가정을 꿈꾼다. 내 차를 타고 퇴근해, 내 집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를 맞이할 아내와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천현우 자신도 이후 인터뷰에서 인정하듯이,[8] 이 글은 ‘구린’ 글이다. 그에게 가해진 비판과 그의 자기방어는 이 ‘구림’이 표현 층위에서 발생한 것처럼 뭉개고 있지만, 얼마간은 ‘지방 청년들’의 일상이 이미 ‘구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방 공단의 부족한 여성 일자리 인프라 속에서, 지방 남성 청년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서사적 자원인 가족주의의 약속은 그것이 희소해지면서 본래 가족주의의 편집증적 이형을 낳는다. 이것은 더 이상 가족주의가 아니라, 현실의 구조적 체계와의 접점이 끊긴 채 마치 서브컬처와도 같은 의사-가족주의에 불과하다. 대개 우리는 이 무능함을 ‘구리다’는 미적 판단으로 퉁쳐버린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담론적 빈곤 속에서 이들은 가족주의라는 ‘유닛’에 이입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이들은 유닛이 제공하는 제한된 시야 속에서 최선의 주체성을 획득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불화감과 망설임, 물러섬을 수반하는 한에서다. 이 망설임은 ‘청년’을 재생산하고 선전하는 여러 장치들에도 그 시차와 균열을 기입하고 있다. 일례로, 올 여름 개봉한 이종필 감독의 영화 〈탈주〉 (2024)는 우울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청년-자기계발 주체를 반공 영화의 틀에 놓음으로써 위로하려는 영화적 시도였다.


〈탈주〉에서 ‘북한’이라는 공간은 분단 상황이라는 지정학적 상황과 냉전 구도보다는 억압적이고 부패한 관료제로 인해 자기계발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성격이 더 강조된다. 10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가기 직전인 규남(이제훈)은 이러한 자기계발의 불모지에서 장르화된 ‘청년의 불안’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때 ‘규남’이 처한 북한의 군대라는 상황은 한국의 군대와 복무기한의 차이만 있을 뿐, 자기경영의 책임과 불안 앞에 내던져졌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불안은 규남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분단 구조에 대한 별다른 성찰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회피하며) ‘남한’을 매끄럽게 선택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한국상업영화사에서 탈북자를 재현하려 한 첫 시기에 탈북자를 남/북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랑자’로 그려냈던 〈이중간첩〉 (2003)과 국민국가의 실패를 담아내는 〈태풍〉 (2005)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분단 체제와 탈북자를 그리는 〈탈주〉의 인식은 퇴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직 자기계발이라는 하나의 동인으로 평준화된 세계에서, 규남은 지뢰가 매설된 휴전선이라는 스테이지를 반복하면서 클리어할 공략을 수집하는 게임적 인터페이스 속에 떨어진 플레이어-유닛 뿐이다.


[그림2] 〈탈주〉의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북한 인민군복을 입은 규남이 들판을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규남이라는 인물 형상의 이러 특징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남한 정착에 성공한 이후 함께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동혁(홍사빈)의 가족을 만나 그의 죽음을 숨기며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한편, 자신이 설립한 여행사로 ‘청년창업지원금’에 지원해 당선된다. 떠나온 세계를 애도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규남은 ‘도전하고 성장하는’ 남한의 허구적 청년상에 완전히 동기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대목에서 ‘사람이 미래다’ 같은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이 나오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규남의 탈북을 막으려는 현상(구교환)과의 대면에서, 현상은 남한에 넘어가도 실패하고 말 것이며, 북한에 남는다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득한다. 이에 규남은 말한다. ‘실패라도 해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렇다기엔 결말에서의 규남은 충분히 실패해본 것 같지 않다. 혹은, 이 유닛을 바라보는 페르소나는 규남의 실패를 화면화하고 싶지 않은듯하다. 더구나 이 ‘청년창업지원금’이 공모와 경쟁 속에서 승자와 패자를 변별하는 상황임을 떠올려 보면, 〈탈주〉라는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매끄럽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으로 읽힌다. 한국의 ‘청년’에겐 헤쳐나가고, 반복적인 플레이를 통해 타파해야할 ‘지뢰’조차 없는 것인가? ‘코리안 드림’은 한국인의 꿈인가? 〈탈주〉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부서지는 상상력의 실패를 대질해보고 싶게끔 하는 파열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천현우의 칼럼으로 돌아오게 된다. 천현우가 그린 지방 청년들이 가족주의의 안온함 속에서 생존을 위한 잔인한 낙관을 찾듯이, 〈탈주〉는 이전 세대의 반공 영화의 세계관을 게임화하고 자기계발적 청년 주체를 플레이어로 던져넣으며 최종보스 클리어 이후의 보너스 크레딧으로 남한이라는 인터페이스를 부각한다. 이미 파산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반공/가족주의는 장르화를 통해 불연속적으로 갱신된다. 휴전선 너머의 ‘규남’ 같은 타자들을 유닛으로 호출해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에 이입하는 방식이다. 이때 게임의 인터페이스가 분단 체제를 단순히 장르화(강하게 말하면 포르노화)하고 있다는 식으로만 볼 수 없다. 리얼 버라이어티, 유튜브 콘텐츠를 비롯한 동시대 문화양식들이 이미 이런 장르화, 인터페이스화를 통해서 나름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듯이, 〈탈주〉는 분단 현실을 ‘선별’하는 한편, 규남이라는 플레이어-유닛을 가상적 인터페이스에서 ‘경쟁’시킴으로써 나름의 진실성을 획득한다. 때문에 결말에서 규남은 누구보다도 진정한 ‘청년’이다. 규남의 청년 인정투쟁은 ‘청년’이라는 범주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대사활동 속에서 회수된다. 당연하게도 ‘청년’ 앞에 선 청년의 망설임과 물러섬을 전복적인 것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 역의 경우-천현우가 보여주는 ‘꿈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오늘날 청년의 주체성은 반복되고, 플레이(연기)되고, 자동화되어있다. 1700년 전 수메르의 석판에 적혀있었다는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푸념처럼, 지금까지 청년의 주체성은 (다소 비약을 허용하자면) 그들을 통제하려는 기성 세대의 노력을 거부하고 회피하며 글리치를 만드는, 오이디푸스의 그것처럼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청년의 저주체성은 초주체적 담론에 의해 가공되고, 그 담론의 구멍에서만 숨을 트고, 기존의 ‘안전한 선택지’라고 여겨졌던 것들을 거리낌없이 재-선택한다. 특정 기호, 특정한 생애주기의 양상을 ‘주체성’에 한정시킨다면, 어떤 ‘MZ세대’들은 그다지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등의 세대론이 2,30대 청년들이 처한 경제적 불안정함을 공통성으로 호명하며 성립했던 반면, MZ세대가 마케팅 언어에 의해서 이들의 ‘소비 습관’을 패턴화하려는 시도에서 확산된 용어였다는 점은 이런 인상을 강화한다. 물론 MZ세대론은 여느 세대론처럼 청년 세대의 이질성, 그리고 ‘버릇 없음’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강조하는 ‘MZ주체’의 개별성은 소비자로서의, 혹은 자기-판매자로서의 그것이다. 청년들이 소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취향’은 ‘평등’을 상상적으로나마 가능케 해준다. 대중문화 이후의, 문화적 동질성이 쪼개진 이후를 살아가는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평등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취향,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정체성을 문화적 지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전장으로 바꾸어놓는다. 취향은 이들을 살려놓지만, 그와 동시에 서서히 마모시키고, 소진시킨다.


소비자 정체성과 짝지어지는 자기-판매자로서의 정체성, 한스 게오르크 묄러가 ‘프로필성’이라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정체성을 대체하는 프로필은 프로필 뮤직, 싸이버불링을 당할 때 뒤늦게 발견된 과거 발언 등 가장 표면적인 것들로 이루어진다. 지난 시대 이상적인 공론장과 민주주의의 전제였던 주체의 진정성은, 이제 뽀얗게 필터링되어 프로필의 장식으로 환원된다. 조문영(2022)이 소개하는 해외 봉사활동을 떠난 대학생들의 자기서사는 이러한 진정성과 프로필의 라벨링 사이에서 진동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차적으로 이들은 무한대로 차려진 대외활동들을 ‘쇼핑’하는 소비자이자, 스스로를 신자유주의 레짐에 맞춰 리믹스한 도덕성을 프로필에 새겨넣으려는 피투자자(미셸 페어)이다. 조문영은 이들이 실제의 사회경제적 계층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헬조선을 살아가는 빈곤한 한국 청년’에 자신을 거리낌없이 대입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의미론적 결핍은, 기업이 주도하는 공식적이고 정돈된 봉사활동 속에서 흥미로운 오배들을 만들어낸다. 글로벌 빈곤을 ‘글로벌 리더’를 빚어내는 자기계발의 과정으로 호명하는 ‘빈곤(그리고 젊음) 포르노’는 금융화된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소해줄 수 없기 때문에, 청년들은 그 산업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가길 택할지언정 최소한 냉소적인 거리만큼은 남겨두었다. 묄러는 ‘진정성 이후’의 프로필 사회를 살아가는 방편으로 자아와 프로필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라고 제안하지만, 신자유주의 레짐과 금융 자본주의 사이의 의미론적 불화는 이 실천을 위한 숨통을 이미 터놓고 있다.


그렇다면 섣부른, 그래서 무용한 낙관을 걸지 않고도 이 사이 공간을 이용할 수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우선 청년 저주체의 차원에선 ‘논란’이라는 즉각적 감정 피드백을 파훼하는 K-POP 팬덤의 ‘망설이는 사랑(안희제)’일수도 있고, ‘중독’ 속에서 시야 안에 잡히는 것들을 향한 애착과 우정(도우리)이거나, 신자유주의 레짐이 모순적으로 동시에 요구하는 ‘즐김’과 ‘생산’을 거부하는 아마추어리즘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애초에 우리를 부당하게 ‘청년’으로 지목하고 자신들의 자본을 투기함으로써 청년됨을 텅 빈 특권으로 만들어 놓은 그 조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지근한 청년. - 젊음 포르노의 파상력


상징적 투기자본에 의해 허구적으로 형성된 숙명적 저주체인 청년은, 임금 노동자보다는 피투자자로서 기성 세대의 시선에 포착된다. 신생아 10명 중 1명만 저소득 가정인 시대(정재훈, 0.6의 공포, 사라지는 한국, 도우리(2024)에서 재인용)에 불안정,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청년’ 밖의 청년들은 퇴사 후 아쿠르트 매니저로 취업한 명문대생에게 재현의 우선순위가 밀린다. 이들은 상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명백히 사라지고 있다. 이런 청년의 희소성은, 청년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더더욱 포르노그래피화한다. 마치 트로트를 부르지 않아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종편 트로트 예능에 출연해 노년층 시청자의 손주딸을 연기하는 미성년자 가수들처럼 말이다.


유미주(2020)는 이같은 ‘젊음 포르노’가 자본과 권력은 있지만 권위는 없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청년의 젊음 그 자체를 포르노그래피의 피사체 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트로트 시장을 비롯해 그 포르노그라피 산업의 규모는 실로 거대하며, 이미 거기에 얽혀서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TV조선 등 종편트로트예능이 만들어낸 젊은 트로트 스타인 임영웅의 성공 요인에는 그가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사실, 데뷔 전후의 무명시절 다양한 저임금 비숙련 노동과 노점상을 오가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서사적 자원이 있다. 음악 외적으로 보자면 그는 젊음-빈곤 포르노에 탑승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영웅이 문화적 세대 갈등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호감’ 연예인으로 자리잡은 데에는, 여느 케이팝 아이돌들을 규모면에서 압도하는 ‘선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팬덤 주도의 ‘선행’ 문화를 안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축구팬인 임영웅이 K리그 FC서울과 대구FC의 경기에서 시축으로 나서기 전, 그는 팬덤의 상징색인 하늘색이 원정팀인 대구FC의 유니폼 색과 겹치므로 자제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효과적이었다. 한편, 임영웅이 유튜브 생일 기념 라이브에서 ‘남혐’ 용어인 ‘드릉드릉’을 썼다며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의 공격이 이어지자, 팬덤은 해당 유튜브 영상에 "세상을 혐오의 눈으로 보며 싸울 생각만 하지 말고 뭐든 사랑의 눈으로 보는 연습을 해라. 늘 '건행'하시길 바란다", "먼 길 오셨으니 임영웅 노래 한 번씩 듣고 가라", "세상을 삐뚤어진 시선과 잣대로 재지 말고 임영웅 '모래알갱이' 들으며 세상을 품어보라.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들"[9] 등의 댓글을 달며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임영웅과 랩몬스터를 추천하는 우스개를 밀고 나가서, 만약 임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커먼즈 공유경제를 주장한다면 그의 팬덤-지지층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그가 만드는, 세대 갈등이나 “남녀 갈등”의 미묘한 재배치에 미셸 페어가 게임스탑 사태[10]를 비롯한 ‘대항 투기’에 거는 기대에 버금가는 가치를 부여해볼 수 있을까?


물론 높은 확률로 싸구려 그랜드스탠딩에 지나지 않는, 더 이어볼 가치가 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임영웅은 임영웅이다. 하지만 임영웅만이 젊음 포르노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우 경제 유튜버 윤루카스는 조야한 자유시장론을 펼치며 5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했고, 여기엔 보수 성향의 중장년층 시청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울대출신의 200만 경제유튜버 ‘슈카월드’와 달리 경제학에 전문성이 없는 ‘고졸’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 서적’  『차가운 자본주의』를 출간한 사실이 알려지자,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그를 조롱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시작된 밈이 ‘똑똑한 청년’이다.


그가 펼친 광신적인 자유시장론으로 인해 ‘차가운 청년’으로 변용되기 시작한 이 밈은, 윤루카스의 파시즘적인 사고관을 꼬집는 ‘콧수염 청년’ 등 수많은 변형을 낳다가 윤루카스의 전략 변화와 함께 다른 국면을 맞는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유사경제학 방송을 시작했다고 인정하는 한편, 스스로를 ‘그렇게 차갑지는 않은’ ‘미지근한 청년’이라 부르며 이 정체성을 바탕으로 방송 방향을 바꾼다. 물론 그는 실제로 극우주의자이며 자유지상주의자지만, 캔슬컬처와 냉소적 열광의 틈에서 그는 자신이 받은 ‘투자금’을 들고 도주하며 유연하게 생존해 나간다.


당연하게도 이런 사례들은 유효한 정치적 대안도, 희망을 걸어볼 만한 것도 아니다. 자기계발적 청년 담론이 보수/극우화하는 과정에서 연발하는 헛발질의 순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청년 포르노에 기생하는 청년들은, 분명히 청년이라는 기표 속에 걸려있는 투자수익 배당의 순간, 화려하게 빛나는 순간을 실행하기에 실패함으로써 포르노의 제작자들을 배신한다. 팝업스토어나 덕질에 수입의 상당량을 바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청년들, 청년창업기금에 우선순위가 밀려 몇번이고 낙선하는 청년들, 니트족으로 남아 ‘전업 자녀’라며 자조하는 이들의 실패와 함께 ‘배신과 헛발질’의 집합이 탄생한다. 이 배신은 안정적인 삶의 토대의 실종 속에서 내몰린 선택인 한편, 그 토대를 향한 의심을 함께 소환한다.


이 불안과 의심이 서로 꼬리를 물고 냉소라는 타나토스를 향해 수렴해 가는 한편, 이 청년들의 경로에는 조금 다른 죽음들이 난입한다. ‘말할 수 있는’ 고학력 프레카리아트들(조문영, 2022) 바깥의 프레카리아트들, 약자들부터, 그러나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위협하는 기후위기와 만성화된 불황은 공교한 ‘청년’ 속의 위계를 재확인하는 한편으로 조금씩 이 위계를 뒤섞는 요인들이다. 이 복수의 ‘파국’은 동시대 청년들이 처한 난국을 관조하거나 숙고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벤야민이 경쾌하게 낙관했듯, 마지막 근대인으로서 청년들의 ‘전통의 빈곤’과 ‘체험의 빈곤’은 고통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파괴와 뒤이은 창조로 떠미는 힘이기도 하다. 이 힘을 벤야민은 ‘파상력’이라는 용어로 요약하는데, 이는 “근대의 파괴적 힘을 모방함으로써 그 넘어설 수 없는 힘을 ‘악마적으로’ 분쇄(김홍중, 2007: 292)”하는 원동력이다. 여기엔 분명 희망이 있다. 그 앞을 수많은 허구와 가상들이 겹겹이 가리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흐릿한 허구들, 뭉게뭉게 떠다니는 꿈들을 응시하길 멈추지 않을 때, 미래는 그제서야 온다. 이렇게 말해보는 수밖엔 없다.


편집위원 민상 hitch9662@gmail.com


[1] 저주체{hyposubject}는 영문학자 티모시 모턴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그는 객체와 세계를 분석적으로 인식해 통제할 수 있다는 서구 전통의 앎을 향한 태도를 ‘초주체{hypersubject}’라고 요약하는 한편, 그 태도에 미달하는 주체, 혹은 그러한 주체의 일면을 저주체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모턴은 기후위기, 초연결, 불황, 비인간 주체 등의 부상으로 초주체의 시간이 끝나가는 동시대의 여러 국면들을 엮어낼 임시적인 개념으로써 저주체를 상정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2] 프레카리아트는 이탈리아어로 ‘불안정한’을 의미하는 프레카리오{precario}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합성어로, 신자유주의와 초연결 사회 속에서 등장한 ‘불안정 노동계급’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절에서 말하는 ‘청년 정치’란 2020년대 들어 이준석에 의해 사실상 재탄생하다시피한 범주로서 20-30대 남성 정치인들의 담론 전략을 말한다. 

[4] "20대 여성, 어젠다 형성 뒤처지고 구호만". (22.01.20.). 오마이뉴스.

[5] "준석아 힘들지"…유세차 오른 이준석 어머니 '눈물'. (2024.04.09.). 한국경제.

[6] 유닛이란 무엇인가? 유닛은 사용자- 주체가 동기화할 수 있는 가상의 주체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GPS 객체일 수도 있고,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유무형의 계정들일 수도 있으며, 게임 캐릭터/아바타일 수도 있고, 심지어 사용자 자신일 수도 있다. (중략) 마지막 사례, 즉 유닛이 ‘사용자 자신’이 될 수 있는 여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사용자- 주체는 디지털 환경과 조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닛들에게 스스로를 대입하지만, 이는 단순히 익명성의 가면을 편의적으로 탈착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주체에게 유닛에 대한 몰입의 순간을 허용한다. 즉 사용자- 주체는 일시적으로 유닛이 됨으로써 비로소 디지털 환경에서의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권시우, 2019: 5). 

[7] 장동기(2021)에서 변형.

[8] 천현우 "칼럼 '지방 총각들' 구렸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2022.09.21.). 오마이뉴스. 

[9] 임영웅 한마디에 아들들 뿔났다…"불매운동할 판" (2024.06.30.). 한국경제.

[10] 게임스탑 사태란 2021년 1월 마지막 주, 미국의 오프라인 비디오 게임 판매 업체 게임스탑의 주식 가격이 급격히 변동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태는 1월 22일 멜빈 캐피털을 포함한 대형 헤지 펀드들이 게임스탑 주가가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주식을 대량으로 공매도{short selling}한 사실이 투자 커뮤니티 레딧 월스트리트베츠에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소식을 접한 월스트리트베츠 회원은 자신들이 게임스탑 주식을 추가 매수해 주가를 유지시키면, 공매도를 위해 빌려 온 주식을 특정 일[특정일 or 특정한 날?]까지 되갚아야 하는 헤지 펀드 세력들이 필요한 주식을 구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주가가 급격히 상승하는 ‘숏 스퀴즈’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게임스탑 주식 구매 캠페인을 벌여 나갔다. 실제로 게임스탑 주가가 1월 22일 이후 급등해 40달러 선에서 1월 28일 장중에는 483달러까지 상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식 구매 앱 로빈후드는 게임스탑 주식 구매 버튼을 비활성화해 버렸고, 이에 따라 주식 구매 속도에 제동이 걸리면서 주가가 하루 만에 폭락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게임스탑 사태로 인해 헤지 펀드 공매도 세력은 약 200억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멜빈 캐피털은 이 손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2022년 5월 파산 절차를 밟았다(미셸 페어, 2023에서 재인용). 


참고문헌


단행본

권시우 (2019). 유닛의 세계. 미디어버스.

김학준 (2022). 보통 일베들의 시대.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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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페어 (2023).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번역). 리시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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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영(2022). 빈곤 과정. 글항아리.

티모시 모턴, 도미닉 보이어 (2024). 저주체. 안호성 (번역).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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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2007). 벤야민의 파상력(破像力) 연구. 경제와사회, 0(73), 26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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