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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위한 냉소

[특집 '윤석열'] 편집위원 은희


회색 구슬


‘노란 구슬’이라는 말을 꽤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2015)에서 나온 말인 ‘노란 구슬’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의미한다. 영화에서는 사람의 기억이 그때 느꼈던 감정에 따라 각각 다른 색으로 저장되는데, 좋았던 기억은 노란색, 슬펐던 기억은 파란색, 화가 났던 기억은 빨간색을 띠는 식이다.[1] 형형색색의 기억 구슬들을 보며 마음속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면 무채색의 구슬도 있을까. 그건 어떤 감정일까.


최근에야 나는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건 냉소다. 그리고 냉소의 색은 필시 회색일 것이다. 주장과 판단을 회피하며 영원히 냉소하기를 택하는 자들과, 검정에도 하양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 12.3 계엄 사태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는 냉소주의적 반응들이 넘실거렸다. 탄핵소추안 가결을 위해 많은 이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향했던 그날, 온라인에서는 ‘다들 SNS에 자랑하고 싶어서 간 거다’, ‘다른 사람들이 가니까 뭣 모르고 간 거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와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그 진부한 회색빛 언어들을 보며 나는 그들의 논리를 낱낱이 도려내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하나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네… 지금 엄청 비겁하다고.


그들은 왜 냉소주의자가 되었는가


김왕배는 냉소주의에 대해 “타자에게 무관심을 표명함으로써 타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나르시시즘적 감정”이면서 “타자를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는 자신의 주체를 세울 수 없다는 열등한 자긍심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2]


『감정과 사회』를 바탕으로 냉소주의의 원인을 재구성하면, 냉소주의는 크게 IMF 사태에서 비롯된 냉소주의와 현실과 이데올로기 간의 간극이 드러나면서 생긴 냉소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둘은 냉소적 반응이 나타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 글에서는 전자를 ‘소극적 냉소주의’로, 후자를 ‘적극적 냉소주의’로 칭하고자 한다.


먼저 소극적 냉소주의는 IMF 사태를 겪으며 서민들이 느꼈던 부자들에 대한 배신감, 허탈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서민들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던 반면, 부자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서민들은 ‘우리가 사회를 위해 헌신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체득한다. IMF 사태 이후 세상은 남을 돕는 게 바보 같은 일이 되어버리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 것이다. 또한 IMF 사태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도입[3]으로 경제는 물론, 복지·교육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신자유주의화[4]가 진행되면서 각자도생과 경쟁은 하나의 ‘사회문화적 논리’로 자리 잡았고, IMF 사태 이후 태어난 청년 세대들 역시 이러한 가치들을 내면화하게 되었다.[5] 따라서 연대와 관용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소극적 냉소주의자들은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거나 회피하기를 택하는 등, 말 그대로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한편, ‘적극적 냉소주의’는 자신이 믿어왔던 이데올로기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때 소극적 냉소주의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인의적 가치가 허상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나타났다면, 적극적 냉소주의는 자신에게 ‘응당’ 주어져야 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감정이다. ‘노력하는 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빈익빈 부익부’와 ‘수저계급론’ 앞에서 해체된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6] 본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남성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적극적 냉소주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의 청년 남성들은 과거 남성성에 대한 ‘신파적 향수’와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사회적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7] 12·3 계엄 사태와 관련해서도 청년 여성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정리하자면, 소극적 냉소주의가 ‘타인을 돕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고, 일말의 손해도 입지 않겠다’는 태도라면 적극적 냉소주의는 사회적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번 촛불집회의 냉소주의자들에게서는 소극적 냉소주의와 적극적 냉소주의적 면모가 모두 드러난다.


각자도생을 위한 전략들


IMF 사태를 겪으며 탄생한 각자도생적 인간들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자 한다. 남을 도와봤자 자신은 손해만 보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12·3 내란 사태에서 그들은 판단을 회피하는 것을 택한다. 판단을 유보하면 자신의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확인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은 현 정국에 있어서 주권자나 주체가 아닌, ‘관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놓고 판단을 회피하면 그들은 사회로부터 ‘정치에 무관심한’, 소위 말해 ‘대가리 꽃밭’인 사람처럼 비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원하는,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전략이 필요하다. 판단을 회피해도 여전히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의 냉소가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정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소극적 냉소주의자들이 꺼내 든 카드는 크게 3가지다.


1) 쟁점의 소환; 본말전도

사전에서는 ‘판단하다’를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리다’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를 판정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8]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의 대상이 될 쟁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냉소주의자들은 12.3 내란 사태와 무관한 수많은 쟁점을 소환함으로써 사태에 대한 대중들의 집중을 흩트려 놓는다. ‘윤석열의 12·3 계엄령 시행’이 위헌, 위법적이었다는 주장에 ‘그럼 민주당의 연속 탄핵 시도는 잘한 것이냐’, ‘그렇다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맞느냐’, ‘계엄령 시행이 법률적으로 내란죄에 해당하는 것이 맞느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태와 무관한 쟁점들을 소환할수록, 냉소주의자들은 현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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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에브리타임 게시글. 해당 게시글의 글쓴이는 자신은 계엄 자체는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에브리타임

출처: https://everytime.kr/370456/v/362498286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에브리타임 게시글. 글쓴이는 “보수 망한 거 맞지. 탄핵당할 만행인 것도 맞고 시위 나가는 친구들도 다 멋지다고 생각함.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응원봉을 흔들어도 (지극히 개인적으로 시위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결국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는 시일만 가까워 진다는 게 무력하게 느껴짐. 진짜… 그건 좀 아닌 거 같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특히,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소환하는 것은 그들에게 퍽 매력적인 선택지처럼 다가온다. 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정권 교체론과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된다’는 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국민 절반—정확히는 48.56%[9]—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실제로 그의 전략은 꽤 유효하게 작용하였는데, 《시사IN》에서 대선 직후 시행한 웹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 중 90.7%가 ‘정권교체를 위해’, 82.3%가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고 답했다.[10] 냉소주의자들은 바로 이 지점을 이용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쟁점을 소환함으로써 현 계엄 사태에 관한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손쉽게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계엄령도 잘못된 건 맞지만 민주당/이재명도 잘한 건 없다’는 말이나, ‘거대 양당의 정쟁일 뿐이다’는 양비론은 언뜻 보기에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냉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다. 이재명 대표의 재판 결과나 더불어민주당의 연쇄 탄핵 시도와 상관없이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령이 위헌⋅위법적이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냉소주의자들은 마치 야당에 정치적⋅사법적 잘못이 있다면 현 사태는 그저 진흙탕 싸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양비론이나 구조적 문제 등을 꺼내 드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내란 세력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극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직접적인 주장이나 판단은 회피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객관적이고 냉철한 것처럼 느껴지는 냉소주의자들의 주장은 그저 영원히 자신에게 돌아올 주장과 판단을 회피하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2) 정치적 무균실 만들기

냉소주의자들이 두 번째로 꺼내 드는 카드는 바로 팩트주의 전략이다. 판단에서 ‘정치적인 것’ 자체를 제거한다면 ‘정치적 판단’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회피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이 제거된 상태가 정상 상태임을 피력해야만 한다. 정상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들은 비정상적인 ‘그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에 맞서는 ‘우리’를 결집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자들은 혐오의 기표를 바탕으로 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와 같은 ‘정치적인 집단’을 곧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마땅한 ‘그들’로 만들어버리고, 그에 속하지 않는 ‘순수한 시민’만을 ‘우리’로 인정한다.[11] 정상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만이 진정한 시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무균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계속해서 순수한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 부재를 통해 자신이 직접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유보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집회에 나가려고 했지만 내가 원하는 집회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시위 일정에 민노총 껴있는 거 보고 고민하다가 지하철 내리고 집 가기로 했습니다. (…) 총학도 어제 총회에서 한 것처럼 중립성을 최대한 지켜주실 거라 믿습니다. 또, 애초에 오늘 발언하는 민노총 간부가 실제 간첩 지령을 받았거나 했을 확률은 아주 적으니까 말입니다. 근데도 저는 혹시라도 반국가세력 처단에 다른 반국세력이 힘이 아주 적은 확률로라도 들어가면 안된다고 갠적으로 느꼈습니다. 당장 끌어내고 내란죄로 처단해야 할 윤석열만큼이나 북한이 우리 헌정질서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적대세력인데, 저는 설마 민노총이 주도하게 되고 총학이 제지를 제시간에 못한다면 그 자리에 낄 것을 감수하지 못하겠습니다.”[12]


한편,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 ‘정치적 순수함’을 추구하는 그들은 선동과 조작, 편향이라는 언어를 자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수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게 선동은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선동이 공격 전략으로 매력적인 이유는 선동이 ‘팩트’의 대립항이라서가 아니다. “사실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며,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것이라면, 이 반대항은 거짓일 것인데, 여기서 선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도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3] 따라서 거짓이 단순히 틀린 정보일 뿐인 것에 비해, 선동은 어떠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선동의 주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게 된다.


특정 정보가 선동임을 주장하려면, 그러한 선동을 펼치는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나 북한, 공산당이라는 언어가 자주 사용되는데,[14] 대부분의 20대 남성이 갖고 있는 군 생활 경험과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은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논리로 자주 활용되고는 한다. ‘우리는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고,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에서다.


이때 중국·북한·공산당·간첩 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작금의 사태를 ‘상식 대 비상식’, 혹은 ‘정상 대 비정상’의 대결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그들이 믿는 집단을 선동의 주체로 명명함으로써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의 싸움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헌법 질서 수호와 같은 구호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불리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더욱 큰 파괴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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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에브리타임 게시글. ‘중국인’, ‘멸공’, ‘민노총’, ‘언론의 선동’ 등과 같은 키워드를 강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에브리타임

출처: https://everytime.kr/370456/v/365644016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에브리타임 게시글. 글쓴이는 탄핵반대집회를 두고 “응원봉 들고 춤추면서 노래나 따라부르며 중국인과 민노총 퀴어 페미들이 섞인 집회와 다르게 진짜 나라 하나만 생각하고 추운날 나와서 광화문과 한남동을 지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애국자라는 용어가 맞다. 언론은 이런 사람들을 극우단체, 태극기부대, 틀딱들로 프레임씌워 선동하고 있고 항상 탄핵집회는 시민이라 표현하지. 난 그냥 성별갈등 세대갈등 없고 공산주의 세력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가고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또한 냉소주의자들은 때때로 MBC나 JTBC와 같은 특정 언론매체가 편향되었다고 비난하고는 한다. 탄핵 찬성 집회는 우호적으로 보도하지만, 탄핵 반대 진영과 ‘중립’ 진영은 보도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이유에서다. 즉 언론이 편향된 채로 팩트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아⋅이예슬이 지적하였듯, “단순히 자신의 기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특정 측면을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팩트’의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것, 자신이 보고 싶은 것에 한정될 때만 ‘팩트’로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15]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냉소주의자들의 공격 패턴을 정리하면 크게 다음과 같다.


1차. 민주노총, 민주당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정치 집단을 공격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도 이미 순수하지 못한 집단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된다.

2차. 표면적으로 정치 세력이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이 ‘일반적인’ 시민처럼 보일 경우에는 그들이 중국인, 북한 간첩, 공산당 세력 등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3차. 이러한 사실들을 보도하지 않고, 탄핵 찬성 집회는 긍정적으로 보도하지만 탄핵 반대 집회는 극우세력들의 집회라고 보도하는 언론들이 ‘편향’적이라고 비난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냉소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집단이며, 이와 반대되는 세력은 전부 특정 집단에 의해 선동당했다는 일루미나티와 다를 바 없는 음모론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이들의 논리는 내부적으로는 매우 탄탄한데, 설령 다른 사람들이 본인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자신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하더라도 “전부 중국인/북한/공산당/간첩의 소행이야.”라는 말 한마디로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언론조차도 그들에겐 이미 편향되어 믿을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렸으므로 그 무엇도 그들의 논리를 상처입힐 수 없는 것이다.


3)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냉소주의자들의 세 번째 전략은 말 그대로 ‘냉소’[16]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집회에 나가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 계발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앞선 두 전략이 판단을 ‘미루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판단 자체를 영원히 회피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각자도생에 부합하는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손해도 보기 싫은 그들은 자신의 기준에서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 참여는 바로 그 쓸데없는 것에 해당한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정치 참여는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과 관련하여 김홍중은 ‘생존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생존주의란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인지되고 체험되는 경쟁 상황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마음”[17]을 뜻한다. 이러한 김홍중의 논의를 바탕으로 김왕배는 “기존의 생존이 도태되더라도 가족, 친지, 친구 등의 연줄망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은 협동, 공존, 상생이 없다”라고 설명하며, 따라서 생존주의 시대에서는 타자 성찰이나 배려와 같은 윤리적 가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8] 그러니 생존주의를 체득한 냉소주의자들이 연대와 평등을 외치는 광장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소주의자들이 단순히 정치에 대해 잘 몰라서, 혹은 정치와 광장의 의제들에 무관심하고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인간처럼 비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자신들의 이미지를 깎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에게 분명한 ‘손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정치 참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매력적인 근거로 소환되는 것이 바로 2016년의 촛불집회다.


“나 역시도 박근혜 최순실에 분노하고, 교실에서 헌법재판소 판결을 라이브로 보며 박수쳤던 학생이었는데 울컥하게 만드는, 따듯하고 정의에 가득 찬 정치인들의 말들이 세월호의 전국민적 충격과 슬픔을 이용한 민주당의 알맹이 없는 선동쇼였다는 것을 문재인 정부 때 깨닫고 (…)”[19]


냉소주의자들은 자신의 2016년 촛불집회 참여가 무의미한 결과로 돌아갔기 때문에 지금 집회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왜 하필 2016년의 촛불집회인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집회라는 점에서도 연관성이 있겠으나, 핵심은 대부분의 국민이 해당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음에 있다.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던 혹은 촛불을 든 시민들을 지켜봤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9년 전의 사건이기 때문에 2008년 촛불집회와 비교했을 때 사람들이 더욱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2016년 촛불집회와 정권교체 이후 느꼈던 무력감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 또한 냉소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용한 카드가 된다. 촛불집회를 통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기대했던 청년들은 다시 절망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벌어졌던 조국 사태 역시 청년들에게 거대한 실망감을 안겼다.[20] 청년들은 무력감에 빠졌고, 냉소주의자들은 이러한 공감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냉소를 정당화한다. 시위 나가는 거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너희도 이미 겪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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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에브리타임 속 냉소주의적 반응. 게시글이 올라온 12월 14일은 여의도에서 제2차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에브리타임

출처: https://everytime.kr/370456/v/363150044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에브리타임 게시글. 글쓴이는 시위 나가는 것이 부모님께 부끄러운 일이라며, “내가 내돈벌고 자리 잡았을 때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돈 대주는 대학생따리인 상태에서 기말 시작 하루 앞두고 시위 참여하는 건 아니라고 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정치 참여 자체의 무의미함을 주장한 냉소주의자들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 계발이나 공부 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정치 참여에 대한 비교 대상으로 자기 계발을 꺼내 든다는 것은 냉소주의자들이 능력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냉소와 능력주의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해진은 “극단적 폭력으로서 능력주의는 주체를 무기력하고 좌절하게 만들며 기존 권력과 지배 체제에 복종하게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21] 즉, 능력주의가 탈정치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에 의해 탈정치화된 냉소주의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능력주의를 강요함으로써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자신의 냉소가 옳은 선택이었음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이다.


주체 말고 심판자 되기


“냉소주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궁상을 떨거나, 혹은 무관심과 ‘비웃음’ 등의 미소로 드러나지만, 이를 넘어선 무차별적 증오와 적개심, 혐오와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22]
“냉소적 문법에서의 혐오는 내가 지키는 원칙을 스스로는 지키지 않으면서 나에게 여전히 원칙을 강요하는 존재, 즉 나에게 손해를 강요하는 존재, 나를 속이려 드는 존재에 대한 무차별적 복수로부터 시작한다.”[23]

현 사태에 대한 적극적 냉소주의자들의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성의 위기와 그로 인한 여성혐오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개선되고 성평등 수준이 향상되면서, 성차별적 환경 아래에서 특권을 누리던 남성들의 반발이 나타나고 있음은 이미 199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됐던 사실이다.[24] 그리고 강덕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성성에 내재한 위기에서 비롯된 담론적 구성물인 이대남[25]들의 냉소에는 남성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피해자화와 자기연민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상상된 착취{imagined exploitation}’라는 개념을 참고할 만한데,[26] 이는 “자신을 부당한 착취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을 몫을 내부의 타자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박탈감은 ‘불공정성에 대한 직관적 인식’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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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에브리타임 게시글 속 댓글. 사진 속 ‘익명(글쓴이)’은 자신은 자기 계발하며 취직할 것이지만, 상대방(청년 여성)은 ‘경단녀’가 될 테니 중년 남성에게 손을 벌리라고 말하고 있다. ⓒ에브리타임

출처: https://everytime.kr/370456/v/363197586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댓글. 익명(글쓴이)은 "난 공부해서 자격증 따고 취직할 테니 너넨(2030 여성) 시위 나간 걸로 30년 우려먹다가 경단녀 되고 4050(중년 남성)한테 손 벌리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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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청년 여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나오는 모습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에브리타임에서는 이를 군 복무와 비교하며 언론 보도를 비꼬는 현상이 나타났다. ⓒ에브리타임

출처: https://everytime.kr/370456/v/363199464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게시글. 글쓴이는 탄핵찬성시위와 관련해 2030 여성들을 긍정적으로 보도한 기사들을 캡쳐한 사진과 함께 "1년 반씩 청춘을 바쳐가며 국방의 의무를 지는 꼴등시민보다 콘서트 응원봉 들고 나와서 몇 번 흔든 여러분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입니다."라고 말하며 해당 내용들을 비꼬고 있다. 해당 게시글 아래에는 "(시위 현장에 청년 여성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남자는 군대에서 *뺑이치니까 *발"이라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다.


‘상상적 착취’는 크게 ‘강자 선망’과 ‘피해자 되기’라는 논리를 통해 만들어진다. 먼저 ‘강자 선망’은 “강자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이자 동시에 약자와 자신의 분리”로 설명된다.[28] [그림 4]에서 익명(글쓴이)은 ‘자신은 공부해서 자격증 따고 취직할 테니 너네(청년 여성)는 경단녀[29]가 되어 중년 남성에게 손이나 벌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아직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성공한 강자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에게서는 강자를 선망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피해자화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이러한 ‘피해자 되기’[30]는 그들의 멸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이때 냉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군 복무를 제시한다. [그림 5]에서 글쓴이가 ‘자신들은 청춘을 바쳐가며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는데 언론은 그런 자신들보다 고작 시위에 나가 응원봉을 흔든 청년 여성을 더 주목한다’고 비꼬고 있듯이 말이다.


이들을 두고 박권일은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에서 ‘성난 젊은 예비역{The Angry Young Reservists}’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크게 ‘예비역’과 ‘젊음’으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기본적으로 군 복무는 젊은 나이에 약 2년의 세월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희생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희생해야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데, 실제 현실에서 사회 고위층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군대를 가지 않거나 군 내에서 편법을 통해 이익을 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조적 불평등은 군 내에서 개인이 경험한 고통스러운 경험과 결합하면서 피해 의식으로 치환된다.[31]


한편, ‘성난 젊은 예비역’의 다른 중요한 정체성적 특징은 바로 그들이 ‘젊다’는 점에 있다. ‘젊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못했거나, 설령 일자리를 구했더라도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임을 내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은 피해 의식과 결합하면서 다른 집단을 향한 공격성으로 이어진다.[32] 대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인 에브리타임에서 군 복무를 바탕으로 한 피해자화가 자주 드러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불안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남자들은 돈을 벌어야 해서 집회에 나가지 못한다’와 같이 경제활동을 근거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여성을 타자화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남성성 개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근대 사회에서는 ‘능력’ 자체가 젠더화되어 ‘남성적 능력’과 ‘여성적 능력’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남성적 능력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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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근대 사회에서의 남성적 노동과 여성적 노동.[34]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노동 자체가 젠더 중립적으로 변화하거나 여성적 능력의 중요성이 높아졌고,[35] 이는 남성적 능력의 시장가치가 하락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시장가치의 하락은 기존의 남성적 능력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이제 세상은 남성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은 남성적 능력만의 발휘가 아니라 남성적·여성적 능력을 균형 있게 사용하며 이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것으로 변화한다.[36]


‘남자들은 돈을 벌어야 해서 집회에 나갈 수 없다’는 말은 단순히 정치 참여보다 자기 계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말속에는 남자는 경제 활동을 통해 누군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숨겨져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화한 남성성과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피해자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상적인 가장의 모습을 그리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상상적’ 착취 혹은 박탈인 이유는 그들의 화살이 자본이나 국가와 같은 사회구조가 아니라 여성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37] 적극적 냉소주의자들은 실제로 청년 남성을 착취하고 있는 거대한 주체에게는 저항하지 못한 채로, 자신들보다 약자인 집단[38]에 의해 자신들의 권리사실은 특권이었던 것를 박탈당했다고 상상한다.[39]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회적 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능력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능력이나 사회적 조건들과 상관없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명제 자체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진보성조차 거세’된 능력주의는 피해의식과 결합하면서 자신보다 ‘자격{membership}’과 ‘능력{merit}’이 없음에도 더 큰 몫을 누리는 것 같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40]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는 집단을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성차별을 통한 남성성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앞선 소극적 냉소주의자들이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고 마치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저 세상을 ‘관조’하기를 택한다면, 적극적 냉소주의자들은 사회적 진리를 부정하며 자신의 특권을 빼앗아 간 이들을 ‘심판’하고자 하는 이들에 가깝다.


심판은 행위의 주체(심판하는 자)와 대상(심판받는 자) 간의 분명한 위계질서를 포함한다.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 신이 온 세상을 홍수로 휩쓸어버렸다는 성경 속 이야기처럼 말이다. 냉소주의자들은 여성을 벌함으로써 자신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신의 남성성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받고자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남성성의 회복이 아니라, 그들은 결코 피해자가 아니며 그저 타인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려 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진실을 부정하고 타인을 멸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이들은 결코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신도, 정의를 구현하는 심판자도 될 수 없다. 그저 비겁한 냉소주의자일 뿐이다.


냉소주의적 관찰자 시점


결국 이 모든 냉소와 멸시는 역사의 ‘주체’ 혹은 ‘행위자’가 되는 것을 회피하고 언제나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그저 붕 떠 있는 채로 가만히 관조하는 것이든, 세상에서 유리되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뿐, 삼인칭 관찰자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삶은 불가능하다.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아무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그들은 냉소했지만, 그들이 세상과 자신을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하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주체 되기’를 회피하는 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세상과의 분리가 아니라 오직 비겁함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명한 손해다.


Epilogue;


히프노스가 겨울을 장악해서 화강암으로 덮어 버렸다.

겨울은 잠이 되고 히프노스는 불이 되었다.

그 뒷일은 사람들의 몫이다. - 『히프노스 단장』(Feuillets d'Hypnos)의 제사 [41]


프랑스 시인 르네 샤르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해 나치에 저항하면서 『히프노스 단장』을 썼다. 히프노스{Hypn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인격신이자 밤의 아들이라 불린다. 그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으로, 대지와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날면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신이다. 새까만 어둠을 떠오르게 하는 히프노스는 한편으로는 연인인 엔디미온{Endymion}을 항상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선 채로 잠을 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을 발판 삼아 히프노스의 어둠은 르네 샤르의 시 속에서 불면과 인내의 시간이 되고, 이윽고 변화와 희망의 힘을 가진 ‘불’로 전환된다. [42]


르네 샤르의 시를 읽고 나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했다. 12월 3일부터 지금까지 사회에 자리하고 있는 히프노스의 어둠. 그건 군홧발에 의해 국회의사당이 짓밟히던 순간이었고,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자동 폐기되던 순간이었고, 남태령에서 농민들의 트랙터가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인내의 시간이 되고, 마침내 세상을 밝힐 불로 바뀌던 순간을 생각한다. 시민들이 계엄군을 온몸으로 가로막을 때, 탄핵소추안 가결과 함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질 때, 트랙터를 가로막던 경찰 차벽이 열릴 때, 나는 그래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던 냉소주의자들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세상을 바꿀 불씨가 우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히프노스 단장』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이 전쟁은 허울에 불과한 휴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발작적인 격동 속에서, 그리고 제 권리는 확신하는 위선의 탈을 쓰고, 정치적 개념들이 갑론을박 계속해서 뿌리를 내릴 것이다. 냉소하지 마라. 회의와 체념을 멀리하고, 도성(都城) 안에서 미생물 세균 같은 냉동 사탄들과 대적할 수 있도록 당신의 필멸인 영혼을 준비시켜라. - 『히프노스 단장』 7번째 시 [43]


편집위원 은희 | a0520choi@naver.com



[1] [Opinion] 당신은 어떤 구슬을 가지고 있나요? [영화] (2022.07.13.). 아트인사이트.

[2] 김왕배 (2019). 413.

[3] 김대중 정권이 실시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대표적 예시로 ‘노사정 위원회’를 들 수 있다. 제1기 노사정 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1998년 1월 15일 구성되어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정리해고제도 즉시 도입 등의 협의가 이루어졌으며, 5개월 뒤 제2기 노사정 위원회에서는 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 및 구조조정 촉진을 주요 과제로 다루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2014). 이를 두고 송제숙(2016: 63)은 노사정 위원회가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핵심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4] 여기서 말하는 신자유주의화는 폴라니적 관점에서의 신자유주의와 푸코적 관점에서의 신자유주의를 모두 내포한다. 먼저, 폴라니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관념이자 사상으로서 케인즈주의와 대결하면서 대안적인 이론적, 규범적 시각으로 등장했으며, 1970년대의 경제위기 국면에서 케인즈주의를 대체하는 지배적 경제관념이 되면서 광범위한 정책적, 제도적 개혁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푸코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거대한 전환' 이후 본격화한 사회적, 문화적 영역의 변화"에 주목하며, "대중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하게 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박찬종, 2024:86-99).

[5] 박소진 (2009). 18-19.

[6] 김왕배 (2019). 417-418.

[7] 최태섭 (2018). 183-189.

[8] 네이버 국어사전.

[9] ‘0.73’ 차기 대통령이 새겨야 할 숫자 (2022.03.16.). 시사IN.

[10] 열심히 투표한 당신 왜 찍고 왜 안 찍었나 (2022.03.24.). 시사IN.

[11] 김내훈 (2021). 86.

[12] 익명 (2024.12.07. 15:11). 여의도 가다가 중간에 내렸습니다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13] 김수아⋅이예슬 (2017). 94.

[14] 더불어민주당이나 민주노총과 같은 집단을 선동의 주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근거로는 민주당이 중국에 우호적이라서, 혹은 민주노총 내에 간첩이 있어서 등과 같은 내용이다.

[15] 같은 글. 96-97.

[16] 쌀쌀한 태도로 비웃음. 또는 그런 웃음. (네이버 국어사전)

[17] 김홍중 (2015). 186.

[18] 김왕배 (2019). 422.

[19] 익명 (2024.12.31. 12:50). 좌파가 우파가 될 순 있어도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20] 이해진 (2023). 65.

[21] 같은 글. 75.

[22] 김왕배 (2019). 421.

[23] 김민하 (2016). 273.

[24] 김수아⋅이예슬 (2017). 66.

[25] 강덕구 (2022). 196.

[26] ‘상상된 착취’와 비슷한 개념으로 최태섭은 『한국, 남자』에서 ‘상상적 박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박탈은 상상적 박탈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가짜 기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을 가장 쉽게, 그러나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 향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향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해결책으로서도, 참조할 만한 것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책임한 반동일 뿐이다(최태섭, 2016:214).”

[27] 박권일 외 (2014). 57.

[28] 같은 책. 57.

[29] 경력 단절 여성.

[30] ‘무능한 너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는 인식을 뜻한다(박권일 외, 2014:57).

[31] 같은 책. 32.

[32] 같은 책. 32-33.

[33] 다가 후토시 (2017). 83-84.

[34] 같은 책. 83.

[35]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노동의 ‘젠더 중립적’ 변화가 성평등이나 사회 정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래윈 코넬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정치는 정의에 전혀 관심이 없다. (···)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의 탈규제화를 지지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증대했고, 여자들이 지배적이던 경제 영역인 공적 부문의 고용을 축소했고, 여자들에게 이전되는 세금의 주된 기반이던 인적 과세의 비율을 낮췄고, 여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출세할 수 있는 핵심 경로이던 공교육을 압박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래윈 코넬, 2013:364).

[36] 같은 책. 88-97.

[37] 때때로 냉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알아주지 않는 언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이조차도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알아주지 않으면서 여성만을 조명하는 것에 대한 분노다.

[38] 냉소주의자들의 시선에서는 약자가 아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집단.

[39] 박권일 외 (2014). 59.

[40] 같은 책. 58.

[41] 르네 샤르 (2023). 101.

[42] 같은 책. 267-270. (『격정과 신비』 뒤에 실린 심재중의 해설 「르네 샤르, 아포리아에 대한 명석성」을 참고함.)

[43] 같은 책. 104.




참고문헌


단행본


강덕구 (2022). 밀레니얼의 마음: 2010년대, 그리고 MZ의 탄생. 민음사.

김내훈 (2021). 프로보커터: ‘그들’을 도발해 ‘우리’를 결집하는 자들: 주목경제 시대의 문화정치와 관종 멘털리티 연구. 서해문집.

김민하 (2016). 냉소 사회 : 냉소주의는 어떻게 우리 사회를 망가뜨렸나. 현암사.

김왕배 (2019). 감정과 사회: 감정의 렌즈를 통해 본 한국사회. 한울아카데미.

다가 후토시 (2017). 남자 문제의 시대: 젠더와 교육의 정치학. 책사소 (번역). 들녘.

래윈 코넬 (2013). 남성성/들. 안상욱ᐧ현민 (번역). 이매진.

르네 샤르 (2023). 격정과 신비. 심재중 (번역). 을유문화사.

박권일 외 (2014).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Memento hoc Momentum: 이 순간을 기억하라. 자음과 모음.

송제숙 (2016). 복지의 배신. 추선영 (번역). 이후.

최태섭 (2018). 한국, 남자: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은행나무.


논문 및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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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2015).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1), 179-212.

박소진 (2009). ‘자기관리’와 ‘가족경영’ 시대의 불안한 삶: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주체. 경제와사회, 통권(84), 12-39.

박찬종 (2024). 신자유주의의 세 개념: 폴라니, 마르크스, 푸코. 경제와사회, 통권(141), 81-115.

이해진 (2023). 촛불 사회운동에 참여한 청년 주체의 탈정치화: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과 인간학적 차이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57(1), 37-83.


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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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지 (2022.03.16.). ‘0.73’ 차기 대통령이 새겨야 할 숫자. 시사IN. Retrieved from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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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12.14. 21:41). ??: 1등시민 여러분 덕분에 탄핵이 성공했습니다!!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접속일 2025.02.05.. Retrieved from https://everytime.kr/370456/v/363199464

익명 (2024.12.14. 21:30). Re: 대한민국의 현주소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댓글]. 접속일 2025.02.05.. Retrieved from https://everytime.kr/370456/v/363197586

익명 (2024.12.31. 12:50). 좌파가 우파가 될 순 있어도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접속일 2025.02.05.. Retrieved from https://everytime.kr/370456/v/364731349

익명 (2025.01.12. 15:13). 탄핵반대집회 [고려대 서울캠 에브리타임]. 접속일 2025.02.05.. Retrieved from https://everytime.kr/370456/v/36564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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