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윤석열'] 편집위원 민주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
집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단연코 ‘투쟁’이라 답할 수 있다. ‘투표하라’, ‘해체하라’, ‘체포하라’, ‘구속하라’, ‘퇴진하라’를 외칠 때마다 그 끝에 투쟁이라는 구호를 붙였기 때문이다. 사회자가 따로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서서히 들리는 투쟁이라는 외침에 마지막 구호를 외칠 때에는 그 목소리가 커진다. (퇴진하라x3에 이어서 ‘투쟁!’)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은 자유 발언을 시작하기 전 이 문구로 자신을 소개하고 끝인사 역시 ‘투쟁’이라는 외침으로 한다. 하물며 ‘투쟁’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발언자에게 투쟁을 외쳐달라고 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갑작스레 마주한 계엄이라는 폭력은 익숙지 않은 투쟁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투쟁이란 선이라 믿는 것에 대한 쟁취를 의미하고, 집회와 같은 집단 저항으로 이어질 때 그 가치는 가시화된다. 나는 투쟁이라는 단어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지킴, 나아가 쟁취함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투쟁’이라고 명명할 만한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일상생활 속 투쟁 의지를 끄집어냈다.
투쟁은 광장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이뤄진다. 광장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는 국회의사당 앞, 남태령, 한남동 관저, 안국역과 경복궁역, 그리고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를 모두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수렴시킨다. 이 중에서도 실질적인 공간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광장은 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닌다. 미디어와 같은 실재하지 않는 광장에서 여론에 노출‘되는’ 것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광장에 모인다는 것은 정보를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집 밖을 나서는 행위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곧 시민으로서 가시적인 (집회의) 자유를 보장받고 비가시적인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이행할 의무를 마땅히 지겠다는 하나의 다짐을 의미한다.
광장에 나오는 세대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윤석열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각각 대표성을 띠는 세대가 존재한다. 대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있으며 Z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청년 세대’와 베이비 붐 세대로 대표되는 ‘노년 세대’로 분류된다. 통념적으로 탄핵 지지와 반대는 곧 우파와 좌파로 맞아떨어지는데, 현재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더 혼란스러워졌다. 탄핵 반대 진영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하며 통념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깨거나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가 하면, ‘윤석열 퇴진’에 ‘부정선거 척결’이라는 답을 내놓으며 다른 층위의 문제에 관한 갑론을박을 펼치기도 한다. 이에 대응하는 탄핵 찬성 진영 역시 9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띤다. 특히 청년들은 이전의 탄핵 집회를 계승한 양상을 띠면서도 명확한 차이점을 보인다. 박근혜 탄핵 집회 당시 촛불 문화는 현재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로서의 응원봉 문화로 전승되었다. 집회 문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어떤 광장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이 글은 광장에서 주류가 되는 두 진영을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그중에서도 광장에서 이뤄지는 청년 세대의 정치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세대는 집단 기억을 중심으로 조성되며 특징으로는 임의성과 대표성이 있다. 만하임의 코호트 개념을 빌리자면, 세대는 단순히 같은 시기 출생한 연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에 겪은 사회문화적 사건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을 축으로 형성된다. 쉽게 말해, 세대란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또래라고 할 수 있다. 즉, 함께 겪는 사회적 사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렇게 세대의 구성 요건으로 개인의 몸속에 체화된 연대 의식과 동질감을 전제할 때, 세대는 단순히 명목적 또는 분석적 범주가 아닌 그들을 사회 변동의 주체로 부르는 보다 실질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1] 사건을 수용하는 체험이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경험이 될 때 세대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이 정의한 세대와 본인이 직접 정의한 세대는 느끼는 연대감의 정도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집단 기억이 공식 역사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생물처럼 변화하고, 정신적인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다.[2]
베이비 붐 세대; 확실성
베이비 붐 세대로 구분되는 핵심 연령 범주는 1955년생부터 1964년생까지이다. 이들의 출생은 한국 사회에 인구학적 과밀 현상을 초래할 정도로 전체 인구의 상당 비율을 차지했기 때문에 베이비 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국 전쟁을 겪은 부모로부터 생생한 체험담을 들었으며 절대빈곤에 대한 두려움을 자연스레 이어받았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목격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1970년대에 구체적인 성과[3]를 보였는데, 이 경제적 성장의 주체는 이들의 선배 세대인 산업화 세대였다. 따라서 베이비 붐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바로 윗세대인 산업화 세대[4]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산업화 세대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는 전쟁으로 야기된 절대빈곤을 해결했다. 이후 베이비 붐 세대에게 전쟁으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풍요를 물려줬다. 이때의 경제적 풍요가 박정희 정권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은 국가와 보수적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이 세대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을 통해 가시화된 ‘빨갱이’라는 적과 경제적 성장, 그리고 단일한 영웅. 이러한 가시적인 믿음이 너무나 비대해 그들에게 정치적 민주화의 실패는 그리 큰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일단 전쟁을 통해 습득된 ‘삶은 곧 생존’이라는 법칙에서 가장 중요한 빈곤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생존을 가능케 한 경제적 풍요는 정치적 성향에서도 획일화된 선택으로 이어졌다.
광장에 모인 베이비 붐 세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보수 진영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여전히 경제 성장을 곧 강대국, 선진국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개인의 성공을 국가의 성공으로 치환하고 숭상하는 것은 이들이 지지하는 자유의 허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유를 획득한 개인이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려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는 에리히 프롬의 ‘근대화의 역설’의 논지를 빌어, 태극기 군중은 자유로부터 도피한 전형적인 사례로 규정된다.[5] 즉, 자유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국가와 동일시되는 박정희라는 절대적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포기한 것이다. 과거에는 복종의 대상이 되는 절대적 권위가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가족 신화[6]의 ‘개인’이었다면, 지금은 실체 없는 ‘자유’라는 가치가 그 대상이다. 전쟁과 빈곤이라는 삶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베이비 붐 세대가 선택한 것은 거대 권력에 대한 복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늘 자유를 주장하는 그들은 사실상 자유를 포기한 채 스스로를 체제 속에 편입시켰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환상은 신자유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성을 전제로 경제적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기반으로 두는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허황된 가치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자유민주주의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인 평등과 자유 중 자유를 더 중시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진 않는다. 다만 현행 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제 7차 개정 헌법, 즉 유신헌법 전문에 등장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이승만 정권이 수립한 ‘새로운 민주공화국’[7]의 기본적 토대로 적용되었다. 이때의 민주공화국은 대통령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는 제4공화국이며,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중시하지만 진보 진영은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지지한다.[8] 윤석열이 사용한 자유민주주의는 기존 보수 진영의 용어에서 착안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가 중시하는 ‘자유’의 가치를 더한다. 계급화 타파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전개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계급화를 기저에 두고 있다. 예를 들자면, 노동 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은 기업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노동자를 그들의 권리로부터 객체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적 자유는 계급에 따라 보장받기도 하고, 침해받아 마땅하기도 한 어떤 것. 즉 자유를 억압할 자유인 것이다. 따라서 광장에 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외침은 자유라는 가치를 좇는 동시에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Z세대; 불확실성
확실성으로 점철된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Z세대는 불확실성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실은, 살아감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마크 피셔는 이를 무시간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 미래는 모든 게 가능한 무한 긍정의 공간이 아니라 끝이 없는 위기로 인식된다. 미래는 갈망의 대상도, 꿈 그 자체도 아니게 되었다. 현재의 연장선 정도로만 여기고 ‘지금보다는 낫겠지.’라며 현재의 낙관을 이후로 미루는 하나의 방어막이 되기도, ‘난 어차피 망했어.’와 같은 막연한 비관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즐거운 망상인 줄 알았던,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리라는 예측이 현실화가 되고 있기 때문인가, 미래는커녕 현재를 설계하기도 벅차기 때문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사라지는 것은 동심이 아닌, 미래라는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과거, 현재 역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즉, 무시간성이란 선형적인 시간대의 소멸[9]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로서의 가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으로 퇴색된다. 이때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교차하며 그중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곧 무한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지금 세대에게 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내밀한 곳에 있을 불안이라는 감정일 것이며, 이를 초래하는 것은 ‘나’와 나의 ‘국가’이다.
무한한 생존에 갇힌 새
Z세대는 숨 쉬듯 경쟁한다. 그리고 그 경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살아남기이며, 이때 ‘살아남음’이란 곧 생존을 의미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에 스스로 살아내고 있기에 강자라는 위안을 받는 것은 생존하는 것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생존주의 논리에 입각한다.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인지되고 체험되는 경쟁 상황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마음, 마음/가짐, 그리고 마음의 레짐을 가리킨다.[10] 이러한 생존주의는 삶 혹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삶을 보장받는 환경에 놓임에 따라 생존 혹은 낙오의 코드로 변환되었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국 전쟁을 통한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생존 전략의 체험과 냉전 체제하에 고도화된 생존 욕망과 불안은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 성장과 근대화의 심리적 동력으로 이용되었다. IMF 금융 위기 이후 유입된 신자유주의 논리는 자유로운 ‘경쟁’을 부추기며 경쟁하듯 살아가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의 방식임을 주입했다. 한국 근대성의 기원적 트라우마를 이루는 이런 아노미적 상황과 그 이후 전개되는 유사한 장면들의 반복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생존주의적 태도’의 동인을 제공했다.[11] 무한 경쟁의 늪에 빠진 한국 청년들은 당장 내일 적에게 총에 맞거나 의식주를 당장 잃을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 놓여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따지면 인간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기에 생존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생명이 생존을 위해 고투한다는 사실과 특정한 국가의 역사적 조건에서 ‘생존’이 절대적인 가치로 확립되는 것은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생존이 절대적 가치로 부상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공동체를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다.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생존 자체가 ‘나’의 존재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취하고 실이 되는 것을 버리는데, 이때 공동체 역시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설령 공동체에 소속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둘째, 꿈꾸지 않는다. 경쟁 상황에서의 서바이벌을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모든 잠재적 역량을 가시적 자원(자본)으로 전환하는 자기 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12]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의 총체가 서바이벌을 위해 관리되고 계발되어야 하는 자본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에 불필요한 잠재적 역량이라 여겨지는 것은 그 즉시 버려진다. 또한 생존이란 행복과 같은 상위의 무언가를 영위하기 위한 진취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의 자리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효용성이 없는 잠재력을 소멸시키고, 살아감에 있어서 소극적 자세를 취할 때, 꿈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레이버는 아폴로 프로젝트[13]와 맨해튼 프로젝트[14]를 떠올리며 과거의 계획 국가들에는 적어도 ‘꿈’이 있었다고,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가능성’을 꿈꿨다고 말한다. 가시적인 역량만이 전부인 것 같은 세상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비가시적인 역량을 쫓고 그것을 실현할 때 세계는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한다.
생존하지 않아야 살아남는 것
사회 맥락상으로 생존은 개인에게 가해진 내밀한 구조적 폭력을 의심하게 한다. 생존에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엔딩 자체가 없다. 경쟁에 이긴 자들은 그 외부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상황을 연장한다. 청년들에게 있어 대학 합격이나 취직은 더 큰 필드에서 경쟁을 위한 발판이 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배로부터 스스로 구원하는 마음가짐은 효용성이 없다. 이번 경쟁이 끝나면 다른 경쟁, 어쩌면 n번째 패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 혹은 패배는 낙오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불안과 잠재력, 즉 ‘나’가 된다. 그러나 무한 경쟁은 결코 불안을 제거할 수 없다. ‘낙오-고립-불안’의 구렁텅이에 빠진 개인에게 남는 것은 좌절감, 어쩌면 그마저도 익숙해져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다. 결국 생존주의를 거쳐 생존한 것은 무한한 불안감일 뿐이다.
국가는 우리를 위협한다.
어느 순간부터 국가는 평화를 위협하는 유무형의 대상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닌 교육 혹은 노동 환경과 재난 상황에서 국민을 극단으로 내몰거나 위협을 가하는 타자와 같이 여겨진다. 이는 현대의 과학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이 자연뿐만 아니라 인재로 인해 위험을 전면에 마주하게 된 위험사회 도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올리히 벡은 현대 기술 발전의 급진화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게끔 했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위험사회라고 이름 붙인 이 새로운 시대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과 산업화를 통해 만들어진 위험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고 분배(회피)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결이 사회제도의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15] 벡의 위험 사회론은 금융 위기, 실직, 범죄와 같은 폭넓은 위험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세계 위험 사회론은 위험의 범위를 사회적 영역에까지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세계 위험 사회에서 역시 위험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핵심과제이다. 그러나 Z세대가 경험한 국가는 위험을 정의하기는커녕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이 글에서 청년 세대를 언론에서 다루는 것과 같이 MZ세대가 아닌 Z세대로 규정한 이유는 그들이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겪은 사회적 트라우마[16]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Z세대는 학생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가깝게 마주했다. 가까운 나의 미래 혹은 과거의 모습인 고등학생들에게 찾아온 죽음에 충격을 받기도 했고, 또 어떤 학생들은 이 사고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수학여행이 취소되어 반강제로 참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기도 했다. 매일 같은 구조 화면과 이를 책임져야 하는 국가의 미숙한 대처를 중계한 뉴스 화면을 통해 그들은 2차 가해자로서의 정부를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이로부터 6년이 지난 후 이태원 참사에 의해 또 한 번 위험사회의 일면이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에 애도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이태원 참사를 경험할 때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우발적인 것이 아닌 자발적인 사고라고 주장하며 죽음에 냉담히 반응했다.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되었고, 이는 타인의 죽음을 냉소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연속적으로 목격한 ‘나’가 될 뻔한 타인의 죽음에 국가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확장했으며, 사람들은 불안이라는 불쾌한 감정을 지워내기 위해 나와 타인의 위치를 구별 짓는다. 참사 피해자들이 핼러윈, 이태원에 나가기를 ‘선택해서’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은 ‘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Z세대에게 있어 두 참사의 공통점은 희생자들과 비슷한 나이대에 목격했기에 그들의 죽음에 더 잘 이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재의 비극성과 이를 증폭시킨 국가의 미숙함을 더 민감하게 인지한다. 국가의 보호 기능 약화는 다시금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그야말로 소극적이었다. 정부는 매뉴얼과 책임자의 부재를 사건의 원인으로 돌렸고, 경찰에 책임을 돌렸다. 이에 더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참사’가 아닌 ‘사고’, ‘희생자’나 ‘피해자’가 아닌 ‘사상자’, ‘사망자’ 등의 표현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17] 이들은 유족과 생존자라는 약자에게 2차 가해, 즉 국가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스펙타클한 폭력{spectacular violence}”만을 국가 폭력으로 간주하지만, 특정 정체성이나 집단을 상대로 한 현대의 국가 폭력은 보다 교묘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18]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와 대중의 잣대로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된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그리고 이를 모두 지켜본 청년 세대에게 정부는 치유되지 않는 두려움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수면 위로 드러난 국가 폭력
국가 폭력은 매우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 폭력의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앞서 생존/낙오라는 구조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 살펴봤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의 생김새를 파악하고 깨고 나와야 함을 인지했다. 그러나 현 정권은 구조적 폭력에 무관심하다. 이는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한 범죄를 단순 제도주의 방침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무차별 범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구조적, 사회적 요인에 주목하고 있다. 무차별 범죄 가해자 45명을 조사한 2014년도의 연구에 따르면, 75%의 가해자가 무직 상태였고, 23%는 직업이 있더라도 일용직 혹은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가해자들의 평균 월수입은 19만 원에도 미치지 못했고, 고정적 주거가 없는 비율 역시 약 21%에 달했다.[19] 그 공격성의 기저에는 오랜 빈곤으로 인한 고통, 불평등으로 인한 박탈감, 그리고 사회적 경시와 차별로 인한 자아존중감의 상실 및 외로움과 같은 복합적 변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이 해소될 가능성이 없을 때, 사회가 자행하거나 묵인한 폭력에 결국 다시 폭력으로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처벌로 다스리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20] 무차별 범죄가 일어난 원인이 구조적 폭력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한 결정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구조적 폭력을 부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구조적 폭력은 위계질서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므로 피해의 화살은 명확히 소수자와 약자에게 향한다. 교묘한 폭력 또는 느린 폭력은 보통 비가시적인 형태이므로 특히 보이지 않는 영역에 선 약자와 소수자에게 고통과 상처를 입힌다. 예컨대 권리 박탈, 정책 폐지, 보호 규제 철폐, 특정 지역 혹은 집단에 대한 의도적 저개발{underdevelopment}, 예산 삭감, 문제 상황 방치, 폭력 및 차별 방조 등이 그 예시이다. 실사례로는 여가부 폐지 시도, R&D 예산 삭감, 서이초 사건에 대한 미온한 대응, 학교 문화 예술 교육 관련 예산 삭감, 재난 연구비 삭감, 서울 퀴어 축제 금지 등이 있다. 이처럼 특정한 계층에게, 혹은 약자에게만 가해지던 국가 폭력은 계엄 사태를 통해 가시화되었다. 국가 폭력은 주로 법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법은 그 제정 과정에서 권위를 탄생시키는 수행적・해석적 폭력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개념 혹은 국가의 성립 요건은 이미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 국가에서는 오직 국가만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합법적인 폭력의 유일한 권위체로 거듭난다. 일찍이 벤야민{Benjamin}은 국가와 법은 폭력을 독점하고자 하며,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법의 속성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21] 우리는 계엄을 통해 사람 위에 법이 존재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지 몸소 실감했다. 즉, 법은 침묵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때 폭력으로 변모한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파편화된 채로 연대
계엄 사태 이전, Z세대는 연쇄적 생존으로 인한 피로와 국가의 공동체적 의미가 퇴색하면서 무한히 고독해졌다. 이에 더해,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의 붕괴 속에서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뿐이었고, 무한 생존 경쟁에서 비롯한 고립감과 외로움은 세상과 타자를 향한 적대감, 혐오 그리고 공격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 공격성의 기저에는 오랜 빈곤으로 인한 고통, 불평등으로 인한 박탈감, 그리고 사회적 경시와 차별로 인한 자아존중감의 상실 및 외로움과 같은 여러 가지 복합적 변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이 해소될 가능성이 없을 때, 우리는 사회가 자행하거나 묵인한 폭력에 결국 다시 폭력으로 답하는 것이다.[22] 다시 말해, 구조적 폭력을 묵인한 국가 폭력은 공동체를 훼손시키며 원자화의 시대를 열었다.
파편화된 개개인은 계엄이라는 공동의 위험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의 계엄은 장기적인 폭력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뿐만 아니라 계엄의 근거로 남용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근간을 흔들며,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자유민주적 질서를 혼동하게 했다. 폭력에 노출된 상황 속에서 Z세대가 선택한 방법은 파편화된 채로 연대에 나서는 것이다. 무엇보다 밝게 빛나면서도 흠집 날까 소중히 여기는 응원봉을 가슴에 품고 거리로 나왔고, 깃발을 통해 나만 알고 있던 다른 정체성을 외부와 공유했다. 고립감을 해소하기 나온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 단 하나다. 그들의 소통은 일방적이다. 예를 들어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연합이 실제 존재하는지, 정말 여러 사람이 조직해 만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깃발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 추구하는 것이 있음을 드러내며, 깃발은 내가 대단한 것을 위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함을 알릴 수 있는 하나의 기표가 된다. 다양한 조합의 깃발이 광장에 모였지만 대다수는 엄청난 대의를 위한다거나 결연하지는 않다.[23] 이는 어쩌면 앞서 생존주의를 통해 거세될 뻔한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 되는 것으로부터 탈락한 가장 나다운, 잠재성의 일부일 수도 있겠다.
[그림 1] ‘뚫어 송태섭’ 깃발과 ‘불꽃 남자 정대만’ 깃발 ©민주
‘뚫어 송태섭’이 적힌 깃발과 ‘불꽃 남자 정대만’이 적힌 깃발. 그림 설명 끝.
각기 다른 응원봉과 깃발들은 하나의 공통된 카테고리로 묶일 수 없는, 한마디로 파편화된 Z세대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개인들은 곧 광장에 모인다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 묶이고, 이를 통해 서로 존재함을 인지하고 주기적인 참여[24]를 통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형태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계엄 이전 Z세대의 원자화에 대한 수많은 우려가 제기되어왔다. 우리는 정치에 개입하거나 사회 운동을 추동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이 실종된 원자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구조적 변혁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적 결사 및 집합 행동 역시 그 외연을 확장하는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25] 또한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청년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가혹한 경쟁에 노출된 채, 선배들이 누렸던 ‘영웅적’ 청춘을 더 이상 구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관찰되며 저항, 반항, 유희, 자유, 도전, 모험, 정치적 열정은 이들의 리얼리티와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26] 그러나 새롭게 형성된 집회 문화로부터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연대임이 단면적으로 드러났으며, 파편화가 연대를 불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연대의 실마리로 전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리얼리티와 무관한’ 인생에 부가적인 취미로 여겨지던 것이 ‘정치적 결사’의 형태를 띤다. 이때 사회적 참사부터 이번 계엄 사태까지 현 정권이 자행한 국가 폭력이 Z세대에게 유의미한 집단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한남동 관저에서 진행된 민주노총 확대 간부 결의대회에서 자유 발언을 마무리하던 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여러분이 원하는 정권이 집권해도 우리는 또 데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노동권에 문제가 있구나,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함께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반사적으로 ‘네’를 외친 사람 중 얼마가 앞으로도 약자를 경청할까.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과연 계엄과 같이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억압에 맞서 싸울 것인지는 미지수다.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서바이벌을 부추기는 직장 혹은 학교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광장의 순기능은 함께 투쟁하는 것이며, 자신 이외의 것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과 무관함에도 불의한 억압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나를 위한 공동체가 아닌 공동체를 위하는 ‘나’가 모이는 진정한 연대로서의 광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특이한 편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궁리하기
『서양미술사』 (The Story of Art)에서 곰브리치는 말한다.
어떤 시대든 그 사회는 예술과 취향에 관한 한 그 나름의 특이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의 지식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런 생각들을 검토하는 것이 흥미 있는 것은 우리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데 있다.[27]
나는 이 견해가 단지 예술이나 취향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늘 불필요하다거나 논리가 빈약하다고 생각하는 논쟁들은 진리에 대한 사유가 아닌 이 특이한 편견 중 덜 편견인 것을 고르는 형태로 비친다. 각 세대 혹은 각 진영에서 추구하는, 어쩌면 진리라고 여기는 ‘특이한 편견’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자 시대 불변, 세대 불변 진리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쉽게 태극기 부대를 비판한다. 태극기 부대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이고, 그 이면에서는 함께 모여서 행동하며 느끼는 자긍심과 기쁨 같은 감정 동학이다. 또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박정희 신화에 대한 그리움과 종교적 동일시가 만들어내는 시대착오적 감수성과 이제는 밀려난 처지가 되어버린 현재 사회에 대한 울분과 분노다. 결국 이들의 행위는 사회의 주인공이었던, 혹은 그렇게 믿었었던 자신들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정투쟁이다.[28] 대부분의 연구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호의적인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그 기저에는 이미 이들의 불합리성을 비난하고 있다. 특히 그 참가자들의 특성에 주목한 연구가 많았는데, 이 행위는 시대와 사회의 흐름으로부터 밀려난 노년층, 삶의 장소를 박탈당한 탈북민, 그리고 정치권력에서 밀려난 퇴물 정치인들이 벌이는 시대착오적, 과거지향적 반동 행위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는 소외되고 좌절한 이들이 분노와 모멸감과 같은 감정에 휩쓸려서 벌이는 퇴행적, 비합리적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본질적으로 자기들 삶의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인정 투쟁으로 규정되었다.
비판이 아닌 비난은 비합리적인 이유에 주목하며, 감정적인 것은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는 자칫하면 집합행동 자체를 비합리성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집합행동을 비합리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현대적 관점의 등장 이전에 시위 참여자를 부정적으로 낙인찍기 위해 사용했던 정치적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정부나 권력 구조는 기존 시스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에 저항하는 행위인 집합행동을 ‘폭도’와 같이 묘사해 시스템에 대한 부정을 비합리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관점은 사회 내 특정 세력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연대에는 이유도 조건도 없다. 우리가 진정한 연대를 꿈꾸겠다면 우리는 비합리성을 비정상으로 배제해서도 안 되고, 비합리성을 합리성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윤석열 퇴진 집회가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라면, Z세대에게는 현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미래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회라는 중심적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파라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 얻는 것은 분열이 아닌 연대가 되어야 하고, 어느 진영의 편견이 더 특이한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투쟁할 진리가 무엇인지 사유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유와 연대는 더 이상 진리와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참사를 겪으며 개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신경 쓰는 것에 가지는 공격적인 의문으로 표현된다. 또한 디지털의 발달은 타인이 겪는 고통의 상황을 보통의 상황으로 치환하고, 여과 없이 생중계되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통해 무엇보다 자극적인 것이 곧 사실이며 중립이라고 믿게 만든다. 우린 이제 쟁취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와 연대를. 이 단어들은 수호라는 따듯한 말로 지켜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투쟁한다. 연대는 지나가는 감성에 불과한 연민이 아님을, 자유는 억압이라고 오인되는 절제가 필요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기성세대가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규정한 자유를, 우리 세대로 끌고 오면서 잘 다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연대. 이 모든 건 광장에서 자란다.
광장에서 비로소 이뤄내는 것들
어떤 이들은 과거 운동과 현재의 집회를 비교하며 생존에서 재미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한다. ‘저게 투쟁이냐, 노는 거지’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도 목숨 걸고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지금의 민주주의를 위한 이들의 핏값 앞에 숭고해져 미처 목숨을 걸고 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생존이 아닌 공존을 꿈꾸기에 광장으로 나왔다. 그래서 뭐가 바뀌냐는 이들의 냉소는 정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뭐라도 바꾸자고 나온 이들은 무언가를 바꾸고 있다. 비주류로서 조롱과 배척을 당한 이들이 이제는 국가의 중심에 서서 변혁에 앞장서고, 환대받지 못한 이들이 먼저 연대를 건네고 있다.
맞다, 우린 놀러 나와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뭐든 한다. 일단 모인다면, 결연할 수도 있고 신이 날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기쁠 수도 있고 투쟁할 수도 있고 전쟁을 등질 수도 있다.
그러니 자유를 추구할 자유를 누리자. 연대하자, 투쟁!
편집위원 민주 | mjmjlee05@naver.com
[1] 최샛별 (2018). 22.
[2] 강덕구 (2022). 35.
[3]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산업화의 토대를 건설했고, 이와 더불어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운동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최샛별, 2018: 46).
[4] 1940~1954년에 출생한 사람들을 일컫는 세대이며, 그들이 겪은 역사적 사건으로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이 있다(최샛별, 2018: 43).
[5] 최재훈 (2022). 349.
[6] 박현선 역시 보수세력의 감정 구조와 종교적 동일시를 만들어내는 원천은 박정희 신화임을 주장한다. 이상적인 아버지-어머니-딸로 구성된 가족에 대한 로망스는 종교적 신화가 되었고, 동일시의 원천이 되었다. 즉, 과거의 태극기 부대는 아버지의 딸을 지키는 것이 곧 나의 국가를 지키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최재훈, 2022: 351).
[7] 새로운 민주공화국은 이승만 정권이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채택한 국가의 정치 시스템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한국에 도입되는 배경에 반공적 기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 역대 정부 교육과정별 역사 교과서 ‘민주주의’ 서술 표현 변화를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민주주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자유민주주의/ (문재인 정부)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구분하여 표기/ (윤석열 정부)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였다.
[9] 선형적 시간대의 소멸에 대한 문화적 예시로는 레트로 붐이 있다. 1980~1990년대의 다시금 인기를 끌며, 로파이(Lo-fi) 음악, 80년대 신스팝(Synthpop)의 부활하기도 하는 등 과거가 다시 현재의 것으로 소비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10] 김홍중 (2015). 186.
[11] 같은 글. 204.
[12] 같은 글. 195.
[13] 미국 NASA가 주도한 유인 달 탐사 계획으로 아폴로 11호를 통해 최초로 인류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
[14]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트리니티 실험을 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 핵폭발이 일어났다.
[15] 박희제 (2014). 87.
[16] 카를 만하임에 따르면, 세대 인식 형성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경험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따라서 Z세대가 청소년기에 겪은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촛불 집회가 그들의 세대 인식에 중요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7] [단독] 서울시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표기 지시…“다른 표현 삼가라” (2022.12.29.). 한겨레.
[18] 김정희원 (2023). 8.
[19] 같은 글. 12.
[20] 한덕수, 무차별 범죄에 “총기·테이저건으로 제압하겠다.” 가석방 없는 무기형·중증 정신질환자 사법입원제 추진 밝혀 (2023.08.07.). 한겨레.
[21] 김정희원 (2023). 5.
[22] 같은 글. 12.
[23] 실제로 집회 현장에서 본 깃발들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전국 삼각김밥 미식가협회, 엑스를 트위터라 부르는 사람들, 뚫어 송태섭, 토요일 생일파티 망한 사사분기 출생자연대, 전국 얼죽아연합회, 천룡인 탄핵 추진 해적단, 전국 마이너 협회, 전국 북두칠성 연구회, 호그와트 마법학교 민주동호회 등이 있다.
[24] X(이하 엑스)에서는 매주 토요일 ‘불꽃 남자 정대만’이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는데, 이는 매회 집회에 참석하는 불꽃 남자 정대만 깃발에 관한 수많은 인증 후기가 올라옴을 보여준다.
[25] 김정희원 (2023). 21.
[26] 김홍중 (2015). 181.
[2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2003). 465.
[28] 최재훈 (2022). 344-34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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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2025.01.31) 자유민주주의와 의회제도 [이석태 칼럼].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28813?sid=110
장나래 (2023.09.18). [단독] 재난 대응 투자한다더니...정부, 재난 연구비도 18% 삭감.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89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