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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특집 '윤석열' 닫는 글] 편집위원 하영

세상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 이후 (어쩌면 그 전부터) 매일 뉴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낙관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바뀔 수 있는 게 맞나’ 회의했다. 사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나의 속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야’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윤석열을 뽑았다고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막연히 대학에 가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언급한 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거야’라는 비관만이 점점 커져갈 뿐이었다.


제주의 한 마을에서 신경다양인 친구 Y를 만났다. 그 마을은 Y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Y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던 어느 날,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Y를 바라보고, Y의 말에 경청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속에서 나는 떠올렸다. 매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쫓겨나는 장애인을. 지난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투쟁하는 이들을. 그리고 존재를 위해,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을. 제주의 작은 마을에서 생긴 변화가 어쩌면 더 큼직한 세계에도 아주 조금씩 생길지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을 때, 그날 밤 수많은 시민이 국회 앞으로 달려갔을 때, 남태령에 수많은 시민이 모였을 때, 그리고 광장에서 무수한 이름들이 외쳐질 때. 그 순간들을 마주하며 다시금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비관이 무너지는 그러한 순간을 지금껏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글을 쓰고 집회에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한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대문자 구호 아래 사라지는 이름은 없을까. 윤석열 이후의 광장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까. 윤석열 이후의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가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이유는—그가 저지른 수많은 위헌·위법적 행위에 대한 처벌을 포함하여— 광장에서 외친 이름들이 존재를 인정받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2016년의 촛불 이후 윤석열이 당선된 것처럼, 불과 몇 년 후에 또 다른 윤석열이 당선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 지금 당장 윤석열 이후의 세상을 함께 그리지 않는다면, 제2의 윤석열은 언제든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을 ‘개돼지’라고 부르거나, 멧돼지에 비유하며 탄핵 집회에서 ‘멧돼지 사냥’을 외치는 사람들. 윤석열을 비하하기 위해 정신병자를 멸칭으로, 김건희를 비하하기 위해 성노동자를 멸칭으로 호명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한편에 비인간 동물, 장애인, 성노동자는 멸칭이 아님을 외치는 사람들도 보았다. 변화는 그러한 절망과 희망 틈새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비관하지도, 분명히 바뀔 수 있다고 낙관하지도 않겠다. 다만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의심할 것이다.


광장에서 외치는 이름들을 듣는다. 떠올린다. 외쳐지지 않은 이름들을. 납작한 인간의 언어로 차마 담지 못하는 무형의 마음들을. 그래서 나의 마음은 여전히 쿡쿡 쑤신다. 하지만 그 마음을 꼭 간직하겠다고 다짐한다. 광장에 그 무엇도 남겨두지 말자고 외치지만, 우리는 아마도 무수히 남겨둘 것이기에. 여전히 어떤 이들은 광장에 남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는 모두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성노동자, 비인간 그리고 억압받는 모든 존재—의 세계를 향한 지난한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편집위원 하영 | choibook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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