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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과 헌법

[특집 '윤석열'] 편집위원 석규


들어가며


대한민국 헌정은 초창기부터 유구한 위협이었던 친위 쿠데타에 대한 대응책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대한민국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최초의 대통령 발 친위 쿠데타 ‘부산정치파동’을 겪는다. 10월 유신 쿠데타와 몇 년 뒤 12·12 군사 정변 등의 친위 쿠데타, 혹은 넓게는 5·16 쿠데타 등 굵직한 사건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부산정치파동은 이후 형법 도입에 있어 국회가 독재적 폭주를 최초로 ‘국헌 문란’으로 정의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은 이승만의 부산 정치 파동과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내란을 비교하고, 부산 정치 파동의 대응책으로 당시 제정된 형법의 ‘국헌 문란’ 조항에 12·3 내란을 비춰봄으로써, 윤석열의 쿠데타를 대한민국 헌정에 대해 지금까지 이뤄진 친위 쿠데타 위협과 비교하고자 한다. 또한 ‘국헌 문란’이 단지 헌법과 형법의 조문으로만 방지될 것이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사회적 배경을 통해서만 저지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부산정치파동, 대통령 이승만의 내란


부산정치파동은 단순한 이름과는 달리 한국 헌정사 최초의 친위 쿠데타였다.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지역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의 명분은 ‘금정산 공비 사건’이었다. 당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전쟁 중 공비들이 임시수도 부산 근교 금정산까지 침입해 교전을 벌이다 사살당한 사건이다. 바로 다음날인 26일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 40여 명이 탑승한 통근버스를 강제로 견인하여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무시한 채 강제로 연행했고, 6월 15일에는 야당 의원 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비공개 재판에 넘겼다. 국회는 즉각 계엄해제요구결의안과 구속 의원 즉시석방결의안으로 맞섰다. 당시 야당 민주국민당의 지도자였던 부통령 김성수는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며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헌을 재시도하였고, 찬성표 확보를 위해 국회제출안 중 일부를 발췌하여 수정한 ‘발췌개헌안’을 상정했다.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7월 4일 밤, 국회는 결국 굴복하여 임시의사당이 군과 경찰에 의해 포위된 가운데 거수 표결을 실시하여 개헌안을 찬성 163, 기권 3으로 가결시켰다. 계엄령은 북한의 빨치산 위협을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7월 7일 개정된 헌법이 공포되자마자 즉각 해제되었다.[1]


‘금정산 공비 사건’은 방첩사의 전신인 육군 특무대(CIC) 대장 김창룡과 이승만의 주도로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에게 무기를 쥐어준 후 금정산에서 사살해 공비로 만든 조작 사건[2]이었다. 이승만은 조작된 공비 사건으로 헌정을 침탈하고 있지도 않았던 금정산 공비 대신 국회의원들을 연행해 실제의 ‘안보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동기는 단지 이승만의 연임에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3] 등으로 신뢰를 잃기 시작한 1기 이승만 정권의 여당 대한국민당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무소속 의원들에게 의석의 60%를 내어주고 소수 정당으로 몰락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 연임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 ‘자유당’을 조직해 세력 규합을 시도했고, 이와 동시에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반이승만 세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국회에서 개헌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자, 제헌헌법의 간접선거로는 연임이 불가능해진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정사 첫 개헌이었던 이 ‘발췌 개헌’은 개헌안 공고 등의 절차조차 무시한 위헌적 개헌이었으며, 단순한 정치 파행을 넘어 권력자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법을 장악하고, 위력으로 입법부를 무력화한 사건이었다. 부산정치파동과 그 결과인 발췌개헌은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의 권력을 유지 및 강화하기 위해 일어난 전형적인 친위 쿠데타였다. 헌정으로서는 친위 쿠데타의 재발을 방지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따라서 바로 다음 해인 1953년, 헌정 최초의 형법 「대한민국 형법」 은 국헌 문란의 정의를 명확히 규정한다. 친위 쿠데타 발발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형법이 제정되기 이전이었기에 구 일본제국 형법을 의용(依用)하여 ‘의용형법’(혹은 ‘구형법’)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내란죄의 구성요건, 특히 국헌 문란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1953년 대한민국 형법은 제91조 신설을 통하여 ‘절차를 무시하고 헌법과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강압에 의하여 국가기관의 기능 행사를 막는 행위’로서 국헌 문란을 정의한다. 이 부분은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과 위헌적 개헌이었던 발췌개헌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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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견인된 국회의원 통근 버스 ⓒ우리역사넷

미니버스를 둘러싸고 총을 맨 군인들이 서 있다. 그림 설명 끝.


요컨대 대한민국은 1953년에 이미 친위 쿠데타에 대항하는 장치를 마련해둔 것이다. 10월 유신, 12·12 쿠데타, 12·3 쿠데타 등, 이후의 친위 쿠데타와 크고 작은 시도들은 모두 이 국헌 문란의 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국헌 문란의 조항은, 형법 제정의 배경과 취지를 볼 때, 절차와 요건 상 큰 하자가 있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을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투입함으로써 기능 행사를 막으려 한다면, 이를 명백하게 국헌을 문란히 하는 행위로 규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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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의용형법과 대한민국 형법의 대조표


12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의 내란


지난 12월 3일 오후 10시 23분, 대통령 윤석열은 ‘반국가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단순한 행정조치가 아닌, 비상시에 행정과 사법에 대한 권한을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집중시켜 ‘독재’를 가능케 하는 합법적인 비상조치이다. 윤석열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국회가 탄핵을 남발하고 예산을 삭감하여 국가의 정상적 기능을 막아섰다고 주장했다.[4]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선거의 실체를 밝히고 다시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계엄령 선포를 통한 체포, 구금, 수사가 필요했다며 그의 계엄령 선포가 정당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윤석열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국헌 문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위이다.


윤석열의 계엄은 헌법기관에 대한 계엄군 투입으로 시작되었다. 계엄 시작부터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계엄령 선포의 조건과 절차를 무시한 채 계엄령을 선포했고, 곧바로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 주요 헌법기관에 계엄군을 투입했다. 계엄군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아 계엄해제요구결의를 저지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지하에서는 전력을 끊기도 했다.[5] 이 외에도 이른바 ‘노상원 수첩’에서 ‘수거 대상’을 이동시킬 ‘수집소’로 언급된 양구군청 등에도 계엄군이 투입됐고,[6] 광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계엄사령부 설치가 준비됐다.[7] 윤석열은 계엄령이 선포되자마자 헌법기관의 기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려 한 것이다.


헌법 제77조 제3항에서는 계엄 선포 시 ‘특별한 조치’의 대상으로 영장제도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정부와 법원의 권한에 관해서만 규정하고 있다. 국회와 지방의회의 활동금지를 포고한 계엄령은 그 자체로 위헌인 것이다. 같은 조 제4항이 규정한 국회에의 통고 역시 지키지 않았고, 제5항에 따라 국회가 과반의 의결로 계엄 해제를 요구했을 때에도 3시간 이상을 더 버티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회 파견 계엄군의 철수는 윤석열이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는 사이 이루어진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자의적인 판단이었다.[8]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국무위원과 국무총리가 부서한다는 헌법 제82조 역시 무시됐다. 전두환의 5·17 내란 당시에도 관보에 게재된 계엄 공고문이 이번 사태에서는 아직까지도 올라오지 않고 있으며, 행정안전부 장관 직무대행인 고기동 차관에 따르면 국무회의 회의록조차도 작성되지 않아 애당초 그 실체 자체부터가 의심되고 있다.[9]


윤석열의 혐의는 국회를 침탈하여 무력화시키고, 야권 인사들을 ‘수거’하여 체포 또는 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노상원 수첩’에 관한 보도에 따르면, 계엄령 선포를 계획한 이들은 그 이후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헌법, 법 개정”, “3선 집권 구상 방안”, “후계자는?” 등의 문구[10]가 발견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의 발췌개헌과 마찬가지로 ‘비상입법기구’ 따위로 국회를 묶어둔 채 절차를 따르지 않고 헌법과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려 한 것이다.


현행 헌법은 전쟁, 외환 등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시기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과 그의 지휘를 받는 계엄 사령관이 온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쟁으로 계엄령이 발효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잘 볼 수 있듯, 계엄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절차와 제도가 작동할 수 없거나 그 작동을 포기해야 하는 전시와 그에 준하는 상황을 위해 예비된 제도다. 그렇기에 계엄령은 그 발동에 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헌법 제77조 제1항은 계엄 선포가 가능한 상황을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한다. 헌정질서 전복을 시도한 내란 우두머리, 범죄피의자 윤석열과 그의 지지자들이 믿는 대로 국회의 탄핵이나 예산 삭감 따위를 그러한 국가비상사태로 볼 수는 없다. 1995년과 1996년 부여와 강릉에서 연달아 있었던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8년 여수 반잠수정 격침 사건,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 있었던 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당시에도 발령되지 않은 계엄령이, 수사기관도 거치지 않은 음모론 수준의 ‘부정선거론’이나 국회의 법령에 따른 탄핵 소추와 예산 삭감 따위의 이유로 발령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이 자신에게도 자기기만이나 다를 바 없다.


이상 살피건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후 형사 법정에 서게 될 범죄피의자 윤석열의 혐의는 내란죄가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형법 상 ‘내란의 죄’는 형법에서 각 범죄의 각론에 해당하는 제2편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다. 형법 제87조는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내란으로 규정한다.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폭동’은 무엇인가? 전두환에게 1997년 선고된 대법원 판례(96도3376)[11]에 따르면 폭동은 ‘최광의의 폭행과 협박’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나 외포심[12]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를 의미한다. 국민에게 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것 역시 폭동의 내용으로서 협박 행위가 될 수 있다며,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자체만으로도 폭동을 구성한다고 판시한 것이다. 위헌, 위법적인 비상계엄 선포와 계엄군의 국회 침탈 시도는 폭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


아무리 법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 하여도,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의 행위가 위헌·위법적임은 자명하다. 각종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내란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법 위반이 아닌, 법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의 공화국 질서에 대한 부정이다.

이를 숨기지 않듯 윤석열은 대통령으로서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13]던 자신의 말이 무색하게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조차도 ‘불법’이라며 경호처를 동원하여 영장 집행을 거부했다. 입법부에 대한 침탈 시도에 이어 이제는 사법부 권한을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한 호응으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극우 시위대는 서부지법을 습격하여 폭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박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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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계엄해제요구결의안 가결 이후인 12월 4일 오전 1시 6분 경, 국회 본관 지하 1층의 전력 공급을 차단하는 계엄군 ⓒ국회사무처

앨리베이터 앞 야간투시경을 착용한 군인들이 서 있고, 뒷편 복도에 서 있는 군인들의 위치가 노란 원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림 설명 끝.


내란 진압은 현재진행형


돌이켜보면, 지난 12월 3일 밤은 민주공화국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문을 부수고 총을 쏴서라도 의원들을 끌어내라던 윤석열의 지시가[14] 이행되었다면, 그래서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군인들이 국회에서 철수하지도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입법·사법·행정 3부는 모조리 윤석열과 그의 지시를 받는 군인들의 치하에 있었을 것이다. 그날의 일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나 법리적인 측면에서나 명백한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고, 그들의 음모를 실패시키지 못했다면 윤석열의 독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혹은 또다시 군부가 반기를 들어 윤석열마저도 축출하고는 또다시 국정을 장악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190명의 국회의원들이 발빠르게 모였고, 주요 야권 정치인들이 SNS를 통해 시민들에게 국회 앞으로 모여달라 요청했고, 소식을 접한 수많은 시민들이 혼란을 깨고 곧장 국회로 향했고, 공군이 여의도 공역에 헬기 진입 허가를 늦게 내어주어 특임대 도착이 1시간 반 이상 늦어졌고, 국회에 투입된 군 병력들이 시민들과 보좌관과 국회 직원들의 저항에 막힌 사이 계엄해제요구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윤석열과 김용현이 계엄 해제나 병력 철수 등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고 있자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단독으로 판단하여 병력을 철수했다.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역시 명령 없이 스스로 병력을 철수시켰고, 수방사 병력들도 이들이 철수하는 모습을 보고 철수했다. 아무런 지시 없이 버티던 윤석열은 더이상 병력으로 국회와 시민들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3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포기하며 계엄 해제 담화를 발표했다.


수많은 우연과 개개인의 판단, 결심과 노력이 겹쳐 12월 3일 밤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다행히 무산되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위태롭다. 아직도 대통령의 지위에 있는 윤석열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대통령경호처를 움직여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의 집행을 저지하려 했다. 윤석열이 사법부가 발부한 정당한 영장의 집행을 가로막고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서부지법에 대한 테러를 조장하는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마땅히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최상목은 오히려 영장을 집행하려는 공조수사본부 측에 충돌이 발생하면 책임을 묻겠다며 대통령 경호처를 제어하지 않았다.[15]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후보 3명 중 2명만 선택적으로 임명하며 국회의 헌법재판관 추천권을 사실상 빼앗았고, 특검법과 여러 법안에 대한 명분 없는 대통령 거부권을 반복해서 행사하며 국회의 입법권을 사실상 대통령의 허가 아래로 두고 있다.[16]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자에 대한 체포를 방해하고, 공화국의 질서와 삼권분립을 어지럽히는 데 오히려 일조하는 자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검찰과 대통령실에 대한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최상목 부총리가 시간을 끄는 사이 얼마나 많은 증거가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그랬듯이 최상목 부총리 역시 소극적인 방법으로 내란 진압에 저항하고 있고, 그를 탄핵한다고 하여서 그 다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이가 협조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주권자로부터 직접 선출된 자가 아닌 대통령에게 임명된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권한을 온전히 승계받는 현행 헌법상,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 시도를 온전히 진압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윤석열을 넘어서


1981년,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 산티아고 카리요는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왕당파다!”라고 외쳤다. 프랑코식 독재를 원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방송을 통해 헌법과 민주주의 질서를 지킬 것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짓밟고 군주로 군림하려는 자가 나타난 상황에서 그들에 맞서 싸우는 데 가장 좋은 도구는 헌법이다. 그렇게 올해 겨울 수많은 좌파들은 ‘호헌좌파’가 되어 광장에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헌법 수호가 문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내란 진압을 방해해온 두 권한대행 한덕수 총리와 최상목 부총리가 보여주듯 우리는 헌법을 수호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헌법을 목표로 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첫 도입부에서부터 친위 쿠데타를 예비해두었다. 피로 쓰인 민주주의의 역사는 성공한 쿠데타를 반면교사로 삼아 윤석열의 쿠데타를 막아냈다. 민주화의 역사가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와 달리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는 것을 막았지만,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위협적이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제6공화국 헌법이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인 만큼, 벌써부터 개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내각제 개헌이나 연임제 개헌과 같은 권력구조에 있지 않다. 제6공화국의 대통령제가 때때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판에 직면하지만, 노태우부터 문재인까지 87년 체제의 대통령을 지낸 이들이 모두 윤석열과 같이 노골적으로 공화국을 파괴하려 시도하지도 않았거니와 윤석열의 내란이 헌법과 법률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구조가 아닌 윤석열과 같은 자가 등장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에 있다.


87년 체제가 설계한 권력 분립과 상호 견제의 구조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기보다, 그것이 상정한 정치적 환경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보아야 한다. 윤석열의 무책임한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정치권과 언론이 거부권을 헌법의 의도보다 가볍게 다루며, 이에 따라 여당이 국회의 재의결을 막아서도 그 정치적 부담이 헌법이 의도한 것보다 터무니없이 적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헌법의 의도를 무시하며 국정을 운영하여도 헌법으로 설계된 견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이다. 즉 이러한 상황에서 개헌에 대한 논의는 권력구조 그 자체가 아닌 현대의 정치적 지형에 보다 더 집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헌법에 대한 논의는 권력구조의 미시적 조정에 매몰되기보다 정치·사회적 환경의 근본적 전환을 겨냥해야 한다. 헌정 수호의 핵심은 조항 자체가 아니라 헌정 질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이를 실현할 정치 주체들의 의지다. 이승만의 발췌개헌과 윤석열의 12·3 내란이 보여주듯, 독재의 위협은 헌법의 결함이 아닌 민주적 기관의 무력화와 시민 참여의 침식에서 비롯된다. 개헌이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데 머물지 말고, 국회와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시민사회의 감시 역할과 직접민주주의적 견제를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권력자의 폭주를 허용하는 정치 문화, 극심한 양극화, 진실보다 편향적 담론에 휘둘리는 공론장의 취약성을 치유할 때만이 ‘국헌 문란’을 완전히 방지할 수 있다. 법조문의 완성도만으로는 내란의 반복을 막을 수 없다. 위헌적 친위 쿠데타를 막을 헌정 최후의 보루는, 민주주의의 살아 숨쉬는 실천에 있다.



편집위원 석규 | ksk030306@gmail.com




[1] 이승만, 1인 독재의 길을 열다 [온라인 백과사전] (n.d.). 우리역사넷.

[2] 기무사의 위험한 절대 충성 (2018.05.14.). 한겨레21.

[3] 한국전쟁 중 강제징집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이승만 정권과 군부의 횡령으로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아사·동사·병사한 사건으로, 100여일 사이에 약 5만~8만 명(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추정)이 전투에 투입되지도 못한 채 후방에서 사망했다.

[4] “언급 않겠다”···헌재서 논거 흐려진 윤석열의 ‘부정선거 확신론’ (2025.02.11.). 경향신문.

[5] 계엄군, 국회 본회의장 진입 막히자 지하로 달려가 전력차단 (2025.02.17.). 한겨레.

[6] 노상원 수첩 구금장소로 화천·양구 언급…민주당 지역위 진상규명 촉구 (2025.02.19.). 강원일보.

[7] [단독] 계엄 당일, 광주 제외 전 지역 계엄사 설치 정황 (2025.02.15.). JTBC.

[8] "군 철수 지시 없었다"‥특전사령관의 옥중 노트 (2025.02.04.). MBC.

[9] 회의록도, 부서도 없다‥'위헌 투성이' 계엄 국무회의 (2024.12.24.). MBC.

[10] [단독] 노상원 수첩에 ‘윤석열 3선’ 장기집권 구상 담겼다 (2025.02.14.). 한겨레.

[11] 윤상현 의원'만' 모르는 97년 내란죄 판례 (2024.12.12.). 오마이뉴스.

[12] 두려워 하는 마음

[13] 윤석열 대통령 "계엄 선포 법적ㆍ정치적 책임 회피 안해" (2024.12.07.). 법률신문.

[14] “2번, 3번 계엄” “총 쏴서라도”…검찰에 실토한 ‘윤석열의 명령’ (2024.12.27.). 경향신문.

[15] 최상목 "경찰·경호처 협의하라"‥"범인 저항하면 못 잡나?" 반발 (2025.01.13.). MBC.

[16] 최상목, 헌법재판관 3명 중 2명 임명... 쌍특검법은 거부권 (2025.01.02.). 조선일보.

[17] [역사속 오늘리뷰] 2월 23일 스페인 23-F 발발 (2024.02.23.). 파이낸셜리뷰.





참고문헌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강우량, 김경필 (2025.01.02.). 최상목, 헌법재판관 3명 중 2명 임명... 쌍특검법은 거부권. 조선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chosun.com/politics/goverment/2024/12/31/LKAFTLVY7JEFTB3IAUQZZLWJ4I/

강현구 (2024.12.12.). 윤상현 의원'만' 모르는 97년 내란죄 판례. 오마이뉴스. Retrieved from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3087942#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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