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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관흠 Apr 15. 2020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이 예술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내 대학시절 전공은 사진이었다.


'사진도 전공이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랬다. 고3이 되어서야 알았다. 취미를 업으로 삼아보기로 결정을 하고 예술대학에 들어갔다. 너무 좋았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전공으로 들어갔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칭찬도 꽤 받았다.

스무 살의 나는 확신이 있었다. 


예술가로 살아야지.


예술가를 꿈꾸던 스무 살의 나


예술가 지망생에서 현실주의자로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실패했다.

예술가가 되지 못했고 지금은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다. 비록 예술가가 되지 못했어도 예술대학에 들어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학교생활은 즐거웠고 고3 학생이 있다면 예술대학 입학을 추천해주고 싶다.

입시생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시 예술대학에 들어가고 싶다.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은 예술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광고사진 과제. 라이트 박스 위에 꽃을 두고 촬영했다.

1. 이 세상에는 천재가 있다.


미술이나 조소는 뛰어난 손재주를 가질수록 유리하다. 음악 또한 타고난 연주 실력, 가창 실력을 가질수록 유리하다. 사진은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선천적 재능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단 셔터만 누르면 사진은 나오니까. 그래서인지 사진을 전공하면서 '얘는 천재다'라고 느낀 적은 사실 없었다. (그래서 예술가의 꿈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술대 타과 애들은 그런 걸 빨리 느꼈다. 학기 시작하고 과제 몇 번 해보면 천재는 바로 보인다. 같은 나이인데도, 나보다 어린데도 노력해도 닿지 않을 무언가를 해내는 이를 보게 된다. 천재를 마주한 사람은 처음엔 놀라고 그다음엔 시기와 질투를, 그러고 나서는 절망한다.


그걸 느낀 애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절망하고 포기하는 부류.

이 부류가 많다. 그래서인지 예술대 잔디밭에서는 늘 술판이 벌어졌다. 학교 뒤 술집도 사람들로 가득했고 낮에 취해있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는 풍경이었다. 역시 예술대는 술을 많이 먹는구나.

졸업을 앞두고 알았다. 재능이 크지 않은 사람은 취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겠다.


둘째는 천재를 인정하고 제 갈길 가는 부류.

이 부류의 친구들은 생존력이 높다. 그리고 유쾌하다. 굳이 정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예술로 돈을 크게 못 벌 것을 알기에 각자의 생존기를 터득한다.

(다른 일을 준비하거나, 예술을 지속하되 금전적인 성공을 바라지 않거나 등등)


당연히 두 번째 부류가 멋져 보였다. 쿨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생존기를 키우는 그들을 동경했다.

나는 내가 재능은 있다고 믿었지만, 천재의 축에는 끼지도 못했다. 재능이 예술가로 성공할 만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두 번째 부류의 길을 걷기로 했다.


2. 안목


예술대는 등록금이 비싸다. 내 기억에 한 학기에 450만 원이었다. 이 비싼 돈 주고 듣는 수업의 질은 굉장히 낮았다. 20년 동안 바뀌지 않은 역사와 전통의 커리큘럼은 기본이었다. 과에서 빌릴 수 있는 기자재는 구렸고, 학교 암실은 귀신이 안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학교 수업으로 배울 수 있는 건 극히 적다. 사진 기술은 스튜디오에서 3개월 일하는 것이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 수업의 내용은 유튜브가 훨씬 좋다.

이 비싼 돈 주고 그럼 뭘 배웠을까?


광고사진 과제. 유리잔만 5만원이 넘었다.


안목을 배웠다. 좋은 것을 보는 법을 배웠다.


실기수업에는 보통 한 주당 하나의 과제가 나온다. 광고사진 수업이라면 화장품, 식기류, 음식 등을 찍어가야 한다. 사진이 잘 나오려면? 피사체가 예쁘면 된다. 그리고 예쁜 피사체는 비싸다.

비싼 와인, 화장품, 그릇들은 확실히 이뻤다. 디테일이 달랐다. 저 색깔과 곡선 때문에 가격이 몇 배로 뛰는구나.

과제를 하다 보니 고가의 브랜드를 알게 되고 브랜드의 가치를 알게 됐다.

그래서 과제 하나하나에 돈을 많이 들였다. 공부에 들이는 돈이라고 생각하니 아깝지 않았고 실제 결과물도 좋게 나와서 학점도 잘 받았다.


광고 사진 과제. 검은 아크릴 판 위에 식기를 두고 촬영.


과제를 하면서 참고될만한 것을 정말 많이 찾아봤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인터넷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사진학과가 있는 대학답게 도서관에는 정말 많은 사진집이 있었다. (심지어 에디션 넘버가 적힌 한정판 사진집도 있었다.) 사진집은 한 권에 10만 원을 훌쩍 넘는 게 많았기에 학생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사진집 한 권을 보는 데는 크게 시간이 들지 않으므로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갔다. 한 권에 10만 원이라 치고 45권만 읽어도 등록금이었다. 안타깝게도 예술대학이 공부하는 분위기는 아닌지라 도서관은 한산했다. 그러나 자주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최고였다. 누군가 대출해갈 일도 적었으므로 나는 정말 마음껏 사진집들을 탐독했다. 의식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결국 사람은 美에 끌린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배웠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진짜인 척하는가에 대해 공부했다.


3.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美를 보는 눈을 기껏 키웠건만 이건 현실을 파악하는데 너무 잔인하게 이용됐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다.


학생 때 작업했던 '기도하는 무신론자' 中


소위 힙스터들이 예술대에는 많았다. 비싼 브랜드의 옷을 입고, sns에 해외여행 사진이  넘쳐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수의 음악이 자취방에서 흘러나왔다. 주차장에는 외제차도 많았다.

처음에는 멋졌고 부러웠다. 따라 하고 싶었다. 집안 사정으로 복학 후 가세가 확 기울었지만 그때만큼 막 쓰고 다녔던 때가 있나 싶다. 장학금도 받았고 사진 알바도 많이 했다. 지금도 쓰지 않는 신용카드를 그때 썼다.

후배들을 마주치는 족족 술과 밥을 사줘서 호구라는 별명도 들었다. 문화활동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힙스터가 됐을까? 나는 힙스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고작 그 정도 돈 써서는 될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이건 '힙'이 아니라 그저 허무한 추종이었구나. 힙스터로 보이는 애들도 결국 부모 돈으로 뽐내고 다니는 '불효 힙스터'였다.


우리 과에는 정말 집이 부자인 사람들이 10% 정도 있었다. 그들과 나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음 달 생활비를 고민할 때, 일 년 치 생활비와 맞먹는 카메라를 아무렇지 않게 사는 부류였다. 빈부격차를 느꼈다.

이 점도 내가 예술가를 택하지 않은 이유였다. 졸업을 하면 집에서 나를 지원해주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업으로 돈을 벌 수는 있을까? 4학년 때 사진으로 밥 벌어먹을 수 있을지 참 많은 고민을 했고 여러 실험을 했다. 4학년 2학기 때는 취업계를 내고 한 교수님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어시스턴트(라 쓰고 '시다바리'라고 읽는) 일을 하면서 가늠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열정도 넘쳤고 일도 재밌었다. 촬영이 많은 스튜디오여서 다양한 분야의 사진 일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고 종종 실장님은 교수님 모드로 바뀌어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일은 짧은 기간 동안 많이 배웠다.


문제는 비전이 없었다. 한 달에 이틀 정도 쉬었다. 집에 가서는 쓰러져서 잤다. 그리고 월급은 100만 원이었다. 월세, 통신비, 식비로 쓰기에 빠듯했다. 나중에는 독립을 해야 할 텐데 그럼 그 돈은 어디서 모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집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버티면 성공한다는 실장님은 초중고를 대치동에서 나왔고 뉴욕에서 유학을 했었다. 그의 조언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2월 내 생일이 되기 며칠 전,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사진학원에서 1년 정도 강사를 했다. 그때 사진계의 이면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성공하는 작가는 결국 인맥이었다. 돈과 백이 없으면 누군가의 노예로 십 수년을 살아야 했다. 좁디좁은 사진계는 파이도 작은데 깨끗하지도 않았다. 갤러리든 미술관이든, 예술이 들어간 어느 곳이나 돈 없는 사람을 원치 않는다. 박봉에 격무이니까 금방 그만두기 때문이다. 힘든 건 둘째치고 생활을 걱정해야 할 정도이니 집안에 돈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다. 돈 걱정 없는 사람만이 예술의 문턱을 넘기 수월했다.


학교에서 배운 안목을 나에게도 적용했다. 내 현실을 파악해보았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집은 부자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배곯으며 예술하고 싶지 않았다.

취업을 하자. 할 수 있으면 카메라를 다루는 직업을 하자.

그렇게 촬영기자를 준비했다.


아름다움을 잘 보기 위한 연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




 후회는 없다.


예술대학에서 내가 배운 것은 예술 그 자체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현실적인 눈이었다.

등록금은 비쌌지만 수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형편없었다. 예대 학생들은 옷을 잘 입고 잘 놀았지만 부모 돈으로 청춘을 태우는 불나방들이 더 많았다. 존경할 만한 전임교수는 한 명 있을까 말까 였고, 열정 많은 젊은 강사들만이 등록금 값을 해주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다.

터무니없고 부조리하다. 예술대학은 그런 곳이었다.


예술대학의 안 좋은 얘기만 잔뜩 써놓은 거 같다. 그럼에도 나는 대학생활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전공을 공부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촬영을 위해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일반 대학생이라면 접하기 힘들었을 일들을 공부라는 명목으로 많이 했다. 비싼 레스토랑에 가보고, 갖가지 비싼 물품도 구입해보고, 사용도 해보았다.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맘껏 보았고, 뜻이 맞는 친구들과 예술에 대해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얘기한 기억도 있다. 암실에서 밤새 사진을 인화하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었지만 얼마나 낭만적인 추억인가.


2015년 자화상.


예술대학의 낭만을 기대하고 글을 읽었던 분들에게는 미안한 글이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느낀 바를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들어갔으나 내가 날개가 없음을 알게 해 주었고,

도리어 땅에 두 다리를 단단히 딛고 일어서게 해 주었다.


낭만에 젖은 이상주의자가 아닌 채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 생존기는 현실주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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