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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May 10. 2023


‘쉿, 아무도 모르게 나도 나빌레라.’

세상에 오직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

  "누구나 세상에 오직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작년에 머리에 털 나고선 처음으로 글이란 걸 썼다. 그것도 수필 한 권 정도의 분량으로 말이다. 반백 년을 넘게 살면서 초등 시절 글짓기 숙제와 의무 개념의 일기를 벗어나게 된 후, 나의 이 고귀한 두 손으로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해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은 읽는 것이지, 쓰는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느끼고 있는 것들을 글로 한번 적어보고 싶다'라고 누가 등 떠밀어 노트북 앞에 앉혀 놓은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모니터 화면만 속절없이 노려보며 앉아있었다. 


  처음엔 쓰고는 싶은데 도대체 내가 뭘 쓰고 싶은 건지…. 머릿속엔 계속 되돌이표였다.     


  그렇게 혼자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다가 찾은 나만의 이야기. 난 결혼을 늦게 했다. 그리고 나랑 마흔한 살 차이가 나는 이쁜 딸이 있다. 함께 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그녀를 더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늦게 엄마를 시작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 그리고 딸에게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글로 써 내려가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였을땐, 매일 반복되는 추처럼 직장생활하고 꼬박꼬박 정해진 날짜에 통장에 월급이 꽂히면 그땐 그걸로 충분했었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웃음을 보며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뒤를 따라 함께 뒤뚱거리며 걸어 다닐 땐, 아침 햇살 같은 마음의 평온과 함께 벅찬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아이와 마주 보고 웃으면 그걸로 충분했었고 세상 모든 것에 절로 감사했었다.      


  동생이 쓰던 아주 오래된, 뽀얗게 먼지가 쌓인 노트북을 가져왔다. 그리고 동네 컴퓨터 수리점에 가서 이 골동품 같은 노트북을 문서 작업만이라도 가능하게 업그레이드를 해 달라고 했다. 수리점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리비에 조금만 보태면 요즘 노트북을 장만할 수 있다고 했지만, 처음 시작하는 나에겐 그 조금의 차액도 부담스러웠으며 먼지 쌓이고 느리게 돌아가는 골동품 같은 이 노트북이 왠지 엉킨 실타래 같은 내 마음속 이야기를 술술 풀어헤쳐서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아주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줄 마법의 노트북처럼 느껴져 굳이 수리를 부탁했다.     


  노트북 앞에 앉은 내 머릿속 나의 모습은 이미 작가다. 그동안 살면서 책이나 매체를 통해 익히 보고 들어왔던 유명작가 선생님들. 그분들의 책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게 다였던 일개 평범한 독자 1인에서 나도 노트북 앞에서 내 이야기를 끄적대는 그림은…작가였다.

가슴은 시종일관 왜 그렇게 설레고 콩닥거리는지…. 처음엔 내가 심장이 약해지고 몸이 어디 안 좋아서 그런가 하고 걱정까지 했을 정도였다. 좋아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내디딜 때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한 육 개월 정도 매일 밤낮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아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에 남편과 딸아이는 큰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고작 우리 집 안에서만 작가, 그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을 때만 작가였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좋았다. 그러나 왠지 이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이유 없이 주눅 들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나 요즘 글쓰기 시작했어’라고 말하기가 참 많이 망설여졌다. 딸과 남편 말고는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모르게, 마치 재야에 묻힌 은둔 작가처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행사와 모임에 빠지며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었다.     


  어찌어찌 어렵사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권으로 다 써 내려간 후, 떨리는 마음으로 출간을 위해 여러 출판사에 문의하고 원고를 보냈다. 생애 처음으로 내가 쓴 글을 타인에게 읽어달라 보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내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고 심장 박동 소리는 내내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손바닥에 땀이 차서 몇 번을 수건에 닦아야 했고 손끝은 덜덜 떨려서 키보드를 제대로 쳤는지 확인 또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 원고는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내주겠다는 출판사는 없었다. 딱 3초만 생각하고 말을 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충분히 수긍이 가고도 남는 것이었지만, 그 3초 동안은 온 세상이 다 무너지고 너무 섭섭하고 슬프고 누가 보면 한 30년 동안 글쓰기에만 매달려온, 신춘문예 당선 하나만 바라보고 산 사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꾸 눈물이 났다. 밥먹다가도 눈물이 또르르 흐르고 주말저녁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또르르 눈물이 흘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 한번 써봤으면 됐지…. 내가 뭐라고…. 작가는 무슨…. 좋은 경험이었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내 꿈에 도전했던 나는, 또 아무도 모르게 내 꿈을 다시 고이 접어 서랍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내가 쓰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고 책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여 곳이 넘는 출판사에서 단 한 편의 진심 어린 답장조차 받지 못한 일은 소심한 내 성격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어쩌면 시작부터 늘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걱정들이 글을 다 쓰고 난 후의 현실과 손잡고 나를 다시 작아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후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은 오래된 노트북과 함께 깜깜한 서랍 속에서 잊힌 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일상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며 살던 어느 날 동생이 추천한 “나빌레라”라는 TV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나이 일흔에 발레를 시작하는 덕칠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칠십 세에 발레를 시작하다니! 발레를? 그것도 30, 40대도 아니고 70대에?.

이 드라마 장르는 SF인가 코미디인가, 과연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싶은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얼마 전 내 꿈에 대한 수줍은 도전과 참담한 실패를 서랍 속에 구겨 넣어 버리고 열쇠까지 잠가버린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드라마는 꿈에 관한 이야기다. 살면서 한 번도 무엇을 꿈꾼 적 없는 사람, 꿈을 가지고만 사는 사람 그리고 꿈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기사를 읽었다. 평생 자식과 가정을 위해 착실한 아버지 노릇 하느라 한 번도 자신이 좋아하는 무엇을 꿈꿔본 적 없이 그렇게 은퇴까지 긴 인생 여정을 거의 마무리한 주인공 덕칠 할아버지가 우연히 발레를 구경하게 되면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왔던 발레리노의 꿈이 그제야 비로소 꿈틀거리며 덕칠 할아버지를 흔들어댄다. 


  마음속 작은 일렁임이 설렘이 되고 일흔 살 할아버지 몸을 나비처럼 드디어 하늘로 날아오르게 만든 정말 멋진 이야기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할아버지의 망설임, 인생에 대한 회한, 용기 그리고 마침내 설렘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 늦어버린 꿈 앞에서 ‘지금 내가 해도 될까? 그런다고 뭐가 바뀔까?’라고 무한 반복으로 망설이다가 ‘나는 이제껏 뭐 하고 살아왔나’하는 가슴 아픈 회한, 그리고 그걸 이겨내고 ‘그래도 지금이라도 한 번만 날아보고 싶다’를 느꼈을 때의 가슴 벅찬 설렘…. 심장이 아무 일도 없는데 막 뛰기 시작한다. 생각만 했는데도 막 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많이 울었다. 슬픈 드라마도 아니고 배우들도 그리 울지 않는데 나만 눈물이 그렇게 멈추지 않았다. 너무 늦은 거 같아 마음이 아파 울고 그래도 할 수 있어서 좋아서 울고, 그 느낌 아니까 하염없이 또 울었다.     


  어느덧 인생이란 트랙의 반 이상을 돌아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지나온 길보다 더 적게 남았다면, 조금만 더 가면 기나긴 인생 여정의 장대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지점에 있다면 우리는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는 단계일 것이다. 마무리, 결말, 끝을 앞둔 상태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면 혹은 트랙을 벗어나려 한다면,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냥 가던 데로 조금만 더 가면 끝이라고 유난 떨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조용히 마무리하라고 다독이지 않을까.


"나도 어느새 내 앞에 남은 트랙이 지나왔던 트랙보다 적게 남아있다. "


  아마도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높이 쳐들어 보면 저기… 저 어디엔가 나의 결승선이 보이는 자리에 와있다. 마무리를 잘 해내고 싶다. 내 인생의 기·승·전…. 은 이미 흘러가 버렸다면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마무리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껏 몇십 년을 해오던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충실하게 해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 마음속 설렘을 찾아 지금, 이 순간이 끝이 아니니 다시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위해 힘을 내어 도전해야 할까…. 아니 도전해봐도 될까….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재능과 관심 분야를 알아내어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힘껏 응원하고 도와준다. 아이들에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멋진 응원은 적용 나이가 딱 정해져 있는 것일까? 50대, 60대 그리고 70대의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일까?      

 

  "더는 망설이거나 남의 눈치를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

사실 덕칠 할아버지는 발레를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꼭 한번은 날아오르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았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기억하는 발레리노는 그렇게 멋지게 하늘을 향해 나비가 날아오르듯 사뿐히 날아올랐다. 


  나도 덕칠 할아버지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날아오르기를 계속 시도하고 싶다. 오십이 넘어 새롭게 시작한 글쓰기가 어렵고 어려워 멀찍이 서랍에 넣어 뒀다 가도 또 며칠이 지나면 다시 생각나 슬그머니 꺼내 읽어보고 여기저기 고쳐본다.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그래도 계속 생각이 나고 가슴이 뛴다는 건 아마도 좋아한다는 게 아닐까. 내가 뛰어야 할 트랙이 완전히 끝나지 않는 한 나도 계속 글을 쓰고 싶다. 


"다시 서랍 속 먼지 뽀얀 노트북을 꺼내 쓰고 또 고치고를 반복하고 있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모든 갈등이 다 해결되고 주인공이 마음 편하게 좀 살만해지는 순간인가 하면 드라마는 곧 최종회로 끝이 난다. 우리 인생 드라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열심히 앞만 보고 살다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그 갈등이 해결되고 편안한 시간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인생도 끝이 날 것 같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아쉽지 않게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나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덕칠 할아버지처럼 아무도 모르게 나도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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