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기념하는가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미래는 추상적이고 과거는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돌고돌아 다시 이념의 시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무척이나 모호하다.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인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 民이 한둘이 아닐진대 누가 주인이라는 건지..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유행(메인스트림)이기 때문이다. 멀리는 용산과 도쿄, 워싱턴에, 가까이에는 해병대 전우회나 북파공작원 동지회 간판이 걸린 콘테이너를 찾아가면 된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때맞춰서 홍범도 흉상의 육사 방출 계획(내부에서 외부로)도 나왔다. 내보내는 것도 유행인 모양이다. 홍 장군은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체적으로도 위인으로 추앙받는 분인데 왜 기념이 아니라 방출하고자 하는가? 아재의 짧은 식견으로 헤아려 보고자 한다.
우선, 적합한 장소를 찾아 이전시킨다는 것이지 폄훼나 모욕은 뜻은 아니란다. 그럴 수 있다. 누군가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에 날달걀을 던진 후에 폄훼나 모욕의 의도가 아니라 열일 하시고 과음하시느라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 드리기 위함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역시 자유는 중요하다.
소련 공산당 입당 이력이 육군 창군의 취지와 맞지않다고도 말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아쉽다. 스케일이 너무 작고 창의성이 부족하다. 차라리 홍 장군이 고려 무신정권의 잔당이라든가, 임꺽정이나 십자군과의 연관성으로 묶으면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확립이라는 거창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홍 장군의 동상을 방출하면 자유민주주의가 되찾아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그토록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있는 권력의 소원 쯤이야 얼마든지...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피말리는 저항도 뚫는 법이다. 말릴 수가 없다.
지지와 비판을 떠나서 확실한 게 하나 있다.
일본 정부가 보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와 우리 정부가 보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의 위험성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양국 정상이 친해지더니 문제의식과 해결책도 비슷해지고 있다.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고 곤란하니 밖으로 내보낸다는 방침이다. 오염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흉상이 도대체 왜 위험한지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용산이나 빨간당, 육사 대변인은 아니지만 나름 친절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치밀해야 한다. 말이 좋아 자유민주주의지 실은 미국, 서유럽, 일본, 이른바 자본주의 동맹 전선이다. 그들의 반대쪽에 있었다면 국가 영웅이 될 수 없다. 영웅이 아닌 사람을 기념해서는 안된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홍 장군의 흉상을 보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해야지 하고 다짐하면 큰일 난다. 우스개소리가 아니다. 이분들에게는 실재하는 위협이다.
오히려 약간의 비겁함은 추앙할 수 있다. 가령,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이나 백선엽. 이미 도망가 놓고 서울에 있는 척 거짓말을 한 뒤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 국민의 피란길을 막아버린 일이라든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 치하에서 쌓은 친일 행적을 삭제해 주려고 한다든가.. 이들을 기념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된다지요?
요컨대, 이념으로 포장된 친소(소련 절대 아님)관계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리 군과 정부는 이번 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 국가연방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70년 전과 같다. 이들의 애국심인지 노파심인지는 이토록 대단한 것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께서 빨간당 만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라고 말씀했다.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국가원수는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당황스러웠지만 곧 정신을 차린 뒤에는 감탄이 밀려왔다. 레드컴플렉스를 빨간당 의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리더십을 보소!
내년 총선 공천권이 아니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어눌하고 후줄근한 자태에서 저토록 당찬 이데올로기가 뿜어 나오다니 말이다. 역시 역사는 돌고 돈다. 그러니 찬반, 호오, 피아, 지지와 비판을 떠나 평정심을 가지세요.
홍범도 흉상 논란 초기에는 금세 철회될 줄 알았다. 국민여론이 사납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이념의 속성은 그런 것이다. 때릴수록 강해지는 팽이와도 같다. 대통령까지 나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민주주의 이념이라고 하지 않던가. 국민의 여론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소신이 아니라. 공무원들의 사명감이 아니라. 타협과 협치가 아니라(아, 일본 원전수는 방치가 중요)!
이념 구현을 위해 이동관 방통위원장을 앉힌 과정도홍범도 흉상을 내보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학폭 무마, 언론통제, 재산 문제 등에 눈감고 "가장 중요한" 자유민주주의를 기어이 지켜야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기어이, 기어코의 투지가 절박하고 가상하다.
윤 대통령의 이념 강조 말씀에 별로 토를 다는 이가 없는 것 같다. 반대쪽 파란당도 박정희, 김일성맹키로 적대적 공생관계이기 때문이고 이념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념은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 가장 위험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언론이 많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