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호

짐은 정리했지만 마음은 정리하지 않아도 돼

by 콩두부

핸드폰 속 캘린더나 저장된 사진첩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연남동의 붉은 벽돌 빌라 304호에 처음 들어간 날이 그중 하나이다. 작은 원룸이 천국처럼 보였던 날이었다.

20대부터 30대가 될 때까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닥을 치는 우울과, 더할 나위 없는 안락함 그리고 이름표 없는 행복이 한데 모여 304호를 가득 채웠다.

크리스마스 전 후로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집에 관해 물어볼 때 "여기 정말 좋았어요..."라고 혼잣말하듯 얘기했다. 전 연인에 미련이 잔뜩 남은 사람처럼 나는 304호를 떠나고 싶음과 동시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콘크리트벽 위로 누레진 낡은 벽지에 옆 집 사람의 기침소리까지 들리는 곳이었지만 나에게는 첫사랑 같은 곳이었다.

마지막 남은 짐 들을 정리하고 방이 다 비워진 후에 한눈에 들어오는 이 작은 집을 눈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눈이 아팠는지 눈물이 삐져나왔다. 304호는 울지 않았지만 나는 그랬다. 304호가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어제, 도배도 새로 하고 청소도 마무리할 것이라는 집주인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또, 새로 이사할 집에 새 가구가 배송된다는 메시지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억지로 마음을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304호도, 새로운 801호도 둘 다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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