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시간과 돈과 체력의 삼각구도
다음 날도 8시에 골프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전날 먼저 프로샵에 가서 초보라서 우리 주변에 잘 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른 빈 시간대로 옮겨줄 수 없는지 물어봤었는데, 우리 앞에 20명 그룹이 골프를 치고 우리와 같은 시간대에 배정된 사람들도 여행객들이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을 듣고 왔다. 아무리 못 쳐도 나만큼 못 치지는 않을 텐데 반신반의 조마조마하며 새벽같이 일어나 프로샵으로 갔다.
벌써 그곳을 분주했다. 두꺼운 뭉게구름이 푸른 잔디 위로 낮게 깔려 있었다. 해도 많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딱 야외활동하기 좋은 날씨다. 우리가 오늘 시작할 10번 홀 앞에 가서 몸을 풀고 있었는데 어느 노부부가 와서 인사를 했다. 호주 퀸즐랜드에서 오신 스튜어드 아저씨와 조이 아주머니였다. 아 이곳도 조인해서 치는 곳이구나, 싶었다. 인사를 하고 초보인 나의 정체를 밝히며 답답하면 언제든지 먼저 가셔도 된다고 알려드렸다.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며 게임을 시작했다.
역시 나는 뒤땅을 치거나 비거리가 짧거나 하는 등 잘 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이 아주머니네가 별말 없이 기다려주신 덕인지 점점 괜찮아졌다. 조금씩 비거리도 더 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조이아주머니랑 비슷하게 나가는 드라이버 샷도 꽤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찾아 즐겁게 치고 있을 때, 저 앞에 소와 양들이 보인다.
오 마이갓 골프장 바로 옆에 사는 소 양 떼라니. 심지어 소들이 사람에게 경계가 하나도 없다. 내가 가까이 가자 소들도 나를 보고 다가왔다. 게임 중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다가가서 교감하고 싶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라운드로 향했다. 골프 치다가 소와 양을 보는 곳은 이곳 밖에 없을 거다. 인간 문명과 자연이 이리도 가까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어느새 라운딩이 끝나간다. 생각보다 그리 많이 밀리지도 않고 조이 아주머니 내외와 함께 18홀을 내내 돌았다. 누군가와 조인해서 끝까지 친 것이 처음인데 이렇게 마음이 여유로운 분들과 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벙커(장애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은 거라고 잘 치고 있는 거라고 계속 격려해 주셨다. 그들은 호주에서 4박 5일 골프여행을 오셨는데 4일 내내 골프를 치는 일정이라 한다.
우리는 신혼여행이라 하니 아이처럼 기뻐하시고 축하해 주셨다. 덕담을 나누고 그들은 바로 드니든으로 장거리운전을 해서 넘어갔다. 그들의 활력 넘치고 여유로운 삶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막 가족이 된 사이로서 앞으로 함께 맞춰 끼워갈 퍼즐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그들은 이제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때이다. 우리도 나중에 우리의 그림에 만족하고 여생을 함께 움직이며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골프가 끝나고 라면이 급히 당기는 탓에 우리는 호텔식당에서 키위버거를 테이크아웃해서 올라왔다. 여기서 테이크아웃이라 하면 서빙하는 접시에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 그 위에 쿠킹포일로 덮어주는 형태였다. 거의 룸서비스를 직접 픽업하러 온 느낌이었다. 묵직한 은장 커트러리까지 야무지게 챙겨주신 덕에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라면에 컵떡볶이과 시원하게 칠링 한 피노 그리로 행복한 점심을 먹고 한숨 자고 나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별 고민 없이 오늘도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굴과 가리비관자요리, 시금치수프, 파스타까지 배가 부르게 먹었다. 매 끼에 국물이 있으면 식사의 퀄리티가 달라지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엄연한 으른의 입맛을 갖추었나 보다. 골프 치고 먹기만 한 크라이스트처치에서의 일정도 이렇게 끝이 난다. 놀고먹는 것의 가장 큰 단점은 시간이 너무나 잘 간다는 것이다. 인생을 보내기 위한 자원 두 가지는 시간과 돈인데 이 두 가지는 놀고먹을 때 가장 잘 가니 아무래도 큰일이다.
[유랑하는 자본주의자]라는 책에서 여행이 자본주의의 끝판왕이라 했는데, 그 말에 완전히 공감한다. 여행의 질은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숙소에 돈을 아끼지 않을 때 여행의 질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모른다. 내 짐을 놓고도 발 디딜 곳 넉넉한 공간에서 폭신하고 잠 잘 오는 침대에서 자는 것이 여행의 피로도를 얼마나 낮추어주며,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맛을 보장해 주는 식당에 기꺼이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시간을 아껴주는지.
여행은 시간과 체력과 돈의 삼각구도이고 이 중 돈의 힘이 가장 세다. 돈은 시간과 체력을 무한정 아낄 수 있는 치트키와 같다. 매일 잘 곳과 먹을 곳을 결정해야 하는 여행에서는 돈의 힘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여행이야말로 자본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표본이다. 집에 가면 조금 더 돈을 필요한 곳에만 쓰며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SNS광고에 홀려 쓰는 몇만 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돈의 힘이 강한 곳이 여행이다. 잘 모아서 돈의 힘이 강력한 적재적소에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