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행일지

#9.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이 하는 것

by 담다리담

어느새 여행 후반부에 들어섰다. 크라이스트처치에 가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크라이스트를 향해 가고 있다. 트위젤에서 가는 길, 어제 날이 흐려 보지 못했던 빙하가 도로 왼쪽 호수 너머로 펼쳐졌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빙하가 끊임 없이 펼쳐지며 나를 따라온다. 이렇게 날이 따뜻한데 멀리에는 얼음산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양을 뜯는 초원이 보인다. 앨리스의 나라에 온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다 보니 터콰이즈색 멋진 호수가 보여 잠시 차를 세웠다. 알고 보니 여행자들이 필수로 들르는 테카푸호수였다. 잠시 멋진 호수를 둘러 산책하고 커피를 사서 다시 출발했다. 오늘은 하늘마저 예쁘니 땅의 멋진 색들을 조화롭게 받쳐주었다.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하는 길, 작은 마을 사이을 통해 지나가다가 조그만 규모의 farmer’s market을 발견했다. 대도시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작은 규모였지만 손으로 직접 짠 양털스웨터와 직접 잡은 생선과 직접 기른 토마토, 브로콜리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 스스로 만들고 가꾼 것들을 장에서 팔고 또 사는 것이 정성스럽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기르거나 만든 것을 파는 것은 가끔 채소를 파는 행상 할머니나 직접 짠 수세미 정도일뿐이라 더 생소하다. 직접 잡은 생선을 판다거나 직접 키운 가축(고기ㅠ)을 파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내가 사는 곳도 언젠가 직접 생산한 것에 대한 가치가 그대로 전해질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다. 아쉬운 눈길로 구경하다가 발길을 재촉해 차에 탔다.


어느덧 배가 고파져서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들르기로 했다. 치열한 메뉴 고민 끝에 소고기를 선택했다. 우리가 달려온 길 내내 도로 양옆으로 소가 굉장히 많았고 특히 와규(흑우)가 눈에 많이 띄었다. 이렇게 소가 많다면 소고기도 질 좋고 신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더욱이 내륙이니 해산물보다는 육고기가 품질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내내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아직도 불편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이런 불편함은 조금 더 컸다. 평화롭게 들을 누비는 동물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경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끝내 대부분 도축되고 말 그들의 운명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길가의 양이나 소를 귀여워하면서 또 그것을 먹을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을 어린 아이의 눈에 비추어본다. 내가 어릴 때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 - 동물을 좋아하면서도 그들을 먹는 것은 별개로 생각하는 - 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이 비추어졌다. 나는 지금도 차를 세우고 그들과 교감하지만 한 시간 뒤에는 그들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그럼에도 다시 채식을 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상황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채식을 하느니 몸 편히 맛이라도 있는 고기를 먹고 맘이 불편한 쪽을 큰 망설임 없이 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주변에 너무나 많은 소들이 있었지만 마을에는 막상 대부분 동네주민들이 편하게 사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였다. 정육점에 보이는 고기는 너무 질이 좋고 저렴한데 막상 그것을 요리해서 파는 곳은 적었다. 자고로 정육점이 있다면 정육식당도 있어야 하기 마련이건만. 찾은 곳은 정원이 있는 브런치가게였다. 마을 핫플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았고 아이들과 함께 오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팬케이크와 양고기샐러드를 시켰다. 호주뉴질랜드는 어딜 가든 팬케이크가 참 맛이 좋다. 적당히 도톰한 팬케이크 위에 메이플시럽과 버터를 잔뜩 올렸는데 맛이 없을수가. 나도 집에 가서 꼭 해먹어 봐야지 다짐했다. 한가로운 주말 정원의 사람들과 잠시 동화되어서 식사를 즐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로 돌아가는 길, 치즈가게에 들러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무화과 크림치즈맛. 콘에 올린 아이스크림을 양 입 가득 먹고 마을을 구경하고 다시 출발! 즐거운 리프레시였다.


달리다보니 어느새 뉴질랜드 내내 2차선이었던 도로가 한줄씩 넓어져간다. 오랫만에 보는 넓은 도로에 얼레벌레하고 있을 때 이정표가 크라이스트처치를 나타냈다. 그동안 차선이 두 개밖에 되지 않는 시골길이라 좌우가 반대라도 어려움 없이 운전했던 성민도 이제는 조금 긴장을 했다. 이곳은 남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 나름 큰 공항이 있어서 인천에서 내리는 비행기가 오기도 하고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은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크라이스트처치의 테마는 쉬어가기였다. 오기 전 크라이스트처치를 알아보았을 때는 도심과 야생동물구역도 구경해볼까 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뉴질랜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것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숙소에서 시간을 제약 없이 쓰고 여유 속에서 자연과 바람을 느끼는 것이 뉴질랜드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럭셔리라고 생각했다.


제법 큰 건물과 항구를 지나쳐 조심조심 달려 도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숙소에 도착했다. 이번 숙소는 리조트였는데 집터를 분양을 하기도 하는지 여러 집이 마을처럼 모여있었다. 들어가는 길부터 높게 나무가 양 옆을 벽처럼 둘러싸고 있어 들어가는 길부터 멋진 경험을 선사했다. 들어갈수록 서양 영화의 인트로에서나 보던 한가로운 휴양지같았다. 뭉게 구름 낀 푸른 하늘을 뒤로하고 녹색 잔디가 드넓게 펼쳐진 곳에서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골프를 연습하는 사람들, 그 옆으로 지나가는 골프카트들과 여기저기서 옹기종기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로 들어가자 너무 마음에 들어서 탄성을 질렀다. 높은 박공천장을 한 천장을 거실과 방이 나누어쓰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실에는 은초록 나뭇잎 사이로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로 햇살이 쏟아졌고, 방에는 오래되었지만 멋진 가구들과 널찍한 침대가 벽 끝에서 끝까지 연결된 창으의 옆에서 안정감 있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새로 지어진 고급호텔과는 또 다른 오래된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숙소에 누워 쉬다가 시내에 가서 와인과 치즈, 체리를, 또 와인과 함께 먹을 팟타이를 사 왔다.


호텔 식당에서 가볍게 굴과 두부구이, 스테이크를 먹고 호숫가를 산책했다. 곳곳에 들어선 나무들이 지는 해의 빛을 받아 파스텔주황색으로 빛이 난다. 나무가 온 몸으로 빛을 뿜어내는 느낌이다. 자연은 너무나 멋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이대로 자기 아쉬운 마음에 아까 산 와인과 안주를 꺼냈다. 배가 불렀음에도 불어터진 팟타이를 먹었을 때 감동이 밀려왔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팟타이의 향신료향을 느꼈다. 매운 향이 아닌 레몬, 고춧가루, 피시소스 등의 향신료 향이 다채롭게 밀려오는 그런 맛이었다. 아 아시아 음식은 이런 맛이었지. 그 동안 아이올리와 감자튀김에 밀려 잊고 있었던 아시아 음식 맛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톡톡 튀는 향신료맛 없이는 못 사는 아시안인가보다. 맛 좋은 쇼비뇽블랑과 페어링해서 오랫만에 자극적인 맛을 먹고 마시고 즐거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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