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쏟아지는 밤
와인천국 퀸스타운에서 와인을 두둑하게 준비해서 출발했다. 다음 목적지는 트위젤, 산악지대에 있어서 겨울에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베이스캠프로 많이 이용하는 곳이라 한다. 우리는 스키는 못 타지만 멋진 별장에 머무르기 위해 행선지를 그 곳으로 정했다.
가는 길에는 멋진 라벤더 농장이 있어 그 곳도 들르기로 했다. 삿포로 라벤더밭에 가 보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그보다 더 먼저 뉴질랜드에서 라벤더팜을 가 볼 줄이야. 기대를 안고 라벤더팜에 들어서자 창문을 내리지 않아도 벌써 차 안으로 라벤더 냄새가 스며들었다. 코 안 가득히 채워지는 꽃향기를 맡으며 문을 열자 동시에 위잉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차 그렇다. 꽃이 있는 곳에는 벌이 있는 것이 이치이다. 게다가 뉴질랜드 꿀이 유명한 것은 벌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귀여운 꿀벌들이라 비교적 괜찮았던 나와 달리 모든 종류의 벌레를 무서워하는 공주는 벌써 아연실색이다. 그가 움츠러들어있으니 나는 괜히 더 벌이 신경쓰이지 않는 척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강한 햇살이 건조한 공기로 내리쬐는 탓에 강렬한 보랏빛 꽃이 진한 연두색 잎사귀와 대조된다. 멀리 배경으로는 낮고 넓게 펼쳐진 돌산이 펼쳐져서 더욱 그림 같았다. 농장은 꽤나 넓은 부지에 꽃과 양과 조랑말도 키우고 있었다. 향기에 코가 마비되고 벌소리에 귀에서 환청처럼 들릴 때쯤 농장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서늘했던 퀸스타운에서 청량한 여름으로 잠시 공간이동해서 온 느낌이었다. 폐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넣어 농장을 나섰다. 다음 숙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시골길을 달려 트위젤에 도착해 집 앞 기둥에서 키를 찾고 문을 열었다. 탄성을 질렀다. 넓은 창으로 이어지는 호수의 갈대빛에 온 집안이 은색으로 빛났다. 연못과 창으로 이어진 거실과 해가 넓게 들어오는 주방이 있었고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세탁실과 각자 창이 넓은 세 개의 침실이 있었다. 빨래를 널 수 있는 넓은 뒷마당까지 그림같았다. 멋진 뷰와 넓은 공간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집” 같은 느낌이었다. 이 곳은 여행 중 처음으로 묵는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에어비앤비의 장점은 장기여행에서 빛을 발한다. 친구의 별장을 빌려 잠시 놀러온 것 같은 느낌. 남의 시골집을 잠깐 빌린 것 같은 이 느낌은 호텔방을 옮겨다니던 우리에게 일순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장 봐온 식재료를 차곡차곡 냉장고에 정리해 넣었다.
가득 찬 조그만 냉장고가 든든했다. 마트에서 구해 온 삼겹살을 굽고 신선한 야채와 치즈, 토마토로 샐러드를 식탁 위에 올렸다. 햇반과 볶음김치까지 올리고 나니 어느 새 근사한 식사가 되었다.
연못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는 부른 배를 꺼트리러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 동네에는 집이 몇 채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인데 그조차 사람의 인적이 없는 것이 다들 별장으로 사용되는 느낌이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동떨어진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자유롭고도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싫든 좋든 연결된 사람들이 있을 때 불안감이 지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집 뒤에는 낮은 나무 울타리를 사이로 양떼들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울타리로 다가가 보았지만 양들은 겁이 많다. 한 마리가 뒤로 물러서자 다 같이 뒤로 도망가버려서 접선은 실패했다.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니 어느 새 날이 어두워지고 공기가 차다. 이 때를 기다렸다. 벽난로 앞에 앉아서 불을 피워보기로 했다. 호스트가 상세히 적어둔 가이드에 따라서 불을 피워보았다. 착화제 위에 얇은 장작에 공기가 통하게 두고 성냥을 그어 불을 피운 후 문을 닫고 기다린다. 이후 나무에 불이 붙으면 큰 장작덩어리를 넣고 덩어리까지 불이 옮겨붙으면 불피우기 완성이다. 하지만 캠핑에서 해보던 것과 달리 잘 붙지 않아 헤매었다. 불을 피우다가 꺼트리다가를 반복하며 따뜻해지다가 말아버리는 거실에 그만 주저앉아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깊어진 밤에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기대했던 트래킹을 가는 날이다. 마운트 쿡이라는 트래킹 명소가 숙소 주변에 있었다. 이 곳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산봉오리를 기준으로 왼쪽은 기온이 낮아 빙하가 많고, 오른쪽은 기온이 온난해서 아래쪽은 트래킹하기 적당한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날이 좋은 날엔 빙하를 볼 수 있는 멋진 트래킹코스인데 그에 비해 난이도는어렵지 않아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Whitehorse campsite를 찍고 가면 시작점과 가장 가깝다. 도착한 곳은 이미 그 곳에서 밤을 지낸 캠핑카들이 많았다.
아침 산 냄새를 맡으며 도착한 캠프사이트에는 트렁크를 열고 커피를 가는 사람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나도 언젠간 뉴질랜드에 꼭 캠핑카를 타고 오고 싶다는 마음을 굳게 다지게 한 곳이었다. 차에서 문만 열면 이렇게 멋진 풍경과 진한 초록색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캠핑장의 주방시설에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커다란 사워도우 덩이를 썰거나 통에 싸온 음식을 각자 접시에 덜어 담고 있었다. 스스로 준비해 온 요리를 먹고 치우는 모습이 왠지 건실하게 느껴졌다. 다음에는 꼭 캠핑카를 타고 와 보기로 성민과 약속했다.
트래킹 코스는 장엄했고 종종 건너는 출렁다리는 무서웠지만 세 번째 다리 쯤에서는 익숙해졌다. 빙하를 보기를 기대했지만 날이 흐려 빙하는 보지 못했다. 두어 시간 즈음 걸었을까 어느새 도착한 코스 종점은 에메랄드빛 호수였다. 두껍게 깔린 구름 아래로 넓게 드리워진 호수에는 아직 얼음이 얼어 있었다. 날씨는 기껏해야 가을날씨 정도인데 이렇게 아직 호수에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저 아래 호수는 얼마나 차가울까? 그러고보니 호수 가까이에 다가가는 사람들은 있어도 호수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빙하에서 내려오는 물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오전부터 공복에 움직인 우리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후다닥 집으로 향했다. 양고기를 냅다 구워 밥을 먹고는 햇살 들어오는 욕실에서 배스솔트를 풀어 향기로운 목욕을 했다. 이 곳에서 여행하면서는 목욕을 참 많이 하게된다. 숙소마다 넓은 욕조가 있고 공기가 은근히 건조하고 차가운 덕에 목욕이 참 잘 맞는 지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뻐근한 다리를 따뜻한 물로 풀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커튼이 나부끼는 거실에서 잠시 낮잠은 자다가 마저 자는 성민을 두고 나는 빨래를 넌 후 글을 쓴다. 화려한 호텔방에서 지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이 든다.
나는 여행지에서도 새로운 내 집을 찾고 싶다. 관광명소보다 다른 누군가의 손때가 뭍은 집이 좋다. 지금 이 순간이 호사롭다. 삼면으로 넘치게 들어오는 햇살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연못에 비치는 파란 하늘, 은초록빛으로 빛나는 갈대잎과 금빛갈대, 저어 멀리 몽글몽글한 구름과 초록갈색빛의 산까지. 들리는 건 새소리와 먼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소리뿐. 이거 하려고 이 머나 먼 뉴질랜드까지 온 거다. 청각과 시각에 공백을 두려고, 세탁한 깨끗한 옷가지를 미세먼지 하나 없는 빨랫줄에 걸려고 온거다.
시드니에서는 설렜지만 막상 행복하지는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와인을 계속 맛봤지만 즐거움을 찾는 여정일뿐 아직 바라던 곳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생 처음 간 도시니 맛잇는 거 찾아먹고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움직인 느낌은 들지만 그곳에 온전히 속한 느낌도 그곳에서 내가 행복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곳에서 나는 완전한 이방인 같았다. 어쩌면 여행의 시작 도시라서 언제든지 떠난 준비가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퀸스타운을 거쳐 이 곳에 오면서 나는 드디어 이 여행이 나의 여행이라는 느낌을 찾아갔다. 드디어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간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누워 있거나 책을 읽고 있어도 시간이 온전히 나의 것 같았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부분은 그것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것. 어느 새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된 것처럼 말이다.
저녁이 되자 오늘은 미리부터 난롯불을 켜보기로 했다. 오늘도 실패하면 안되니까 미리미리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어제의 실패들 덕분인지 오늘은 두어 번의 시도만에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신기하게도 온 집안에 훈기가 돌았다. 공기가 위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며 습하지 않은 증기사우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닥부터 데워서 공기를 위로 올리는 온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뜨끈뜨끈해진 공기 덕에 나른하고 편안했다. 영화를 보며 쉴까 하다가 애플티비에 파칭코를 찾아 정주행을 시작했다. 와인과 간단한 저녁을 먹고 짐을 정리하는 내내도 파칭코는 틀어져 있었다.
아아 내일 또다시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잠시나마 진짜 집 같았던 이 곳을 뒤로 하고 다음 집으로 가야 한다니 아쉬웠다. 밤 늦게까지 파칭코를 보다가 탄내가 나는 것 같아 집을 샅샅이 뒤졌다. 벽난로 탓인지 보려고 마당으로 나갔는데,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쏟아지는 별빛에 황홀할만치 놀랐다.
별들이 너무나 많은 나머지 별자리를 찾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안드로메다 행성의 형체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10여년 전 하와이 천문대에서 쏟아지는 별들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그 때의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쏟아지는 별들에 큰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적막 속 저 멀리 차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이 곳에 쏟아지는 연노랑 빛으로 반짝이는 별들만을 바라보며 멈춰 있었다. 자연은 뭐길래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