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행일지

#13. 뉴질랜드 말보로 와이너리 투어

by 담다리담

말보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남섬의 가장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달렸는데 바다의 끝에는 첩첩산중이 있었다. 뉴질랜드의 산은 우리나라와 달리 둥근 산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못지않게 산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굽이치는 길을 하나 돌 때마다 겹쳐있던 산이 하나씩 사라졌다. 눈앞의 산을 하나씩 둘러 넘으며 조금씩 우리는 말보로에 가까워졌다. 주변의 풍경이 노랗고 황량한 풍경으로 바뀌어 갔다. 말보로는 여태 보았던 곳과 완전히 다른 자연을 가진 지역이었다. 하지만 양 떼가 풀 위를 잔뜩 노니는 것은 어디든 같았다.


굽이 치는 산을 하나 돌 때마다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하는 날씨에 마음이 들렸다 놓였다 하며 도착한 곳은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시내는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시내의 중심에는 고딕 양식의 웅장한 교회가 있었고 교회는 매 30분마다 시계탑을 울렸다. 교회 옆에는 아기자기한 노란색 벽과 초록색 풀로 둘러싸인 공원이 있었고 가운데 작은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주변에 먹을 것을 파는 상점들이 몇 개 있고 그게 다였다. 하루만 살아도 모든 마을을 다 둘러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도시였다. 이때 여름이라는 이디스 워튼의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에 나온 배경이 딱 이런 작은 도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건이라고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


말보로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와이너리 투어를 위해서였다. 작년 여름 나는 쇼비뇽 블랑의 맛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것은 뉴질랜드 프루티하고도 청량한 맛을 내는 말보로 지역의 와인이었다. 잔에 코를 들이밀자마자 올라오는 상큼한 여름 과즙 내 - 시트러스, 복숭아, 라임, 풀내음 - 에 이어 적당한 미네랄이 느껴지는 상큼한 목축임, 그렇지만 달지 않아 끝이 깔끔한 그 와인은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먹기 전에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먹는 그 맛에 수많은 여름밤을 말보로 쇼비뇽블랑으로 마무리했다. 언젠가 한 번 꼭 가봐야지 했던 말보로를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다니 행운이었다.


신이 나서 숙소 예약을 마치자마자 말보로 일정을 예약했다. 여행 전 미리 예약한 거의 유일한 항목들이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반년이 지나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피노 누아에 관심이 훨씬 더 많아진 후였다. 여름이 끝나고 쌀쌀한 계절을 보내는 동안 피노 누아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예약할 때의 신나는 마음만큼은 닿지 못했지만 그래도 날씨도 맑아졌고 시골길에서 자전거도 탈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말보로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렌터카를 반납하고 자전거를 빌리러 갔다. 주변 와이너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우리는 페달에 발을 올렸다. 말보로 지역은 와이너리 투어가 흔했다. 양조장이 들어선 지 아직 5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와인을 만들고 있는 지역이다. 바다와 인접한 짭조름한 토양이 강렬한 햇빛과 건조한 공기와 만나 말보로만의 청량한 여름맛을 만들어냈다.


태어나서 와인용 포도밭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지 위 연초록 포도나무가 정갈하게 줄지어있었다.(이렇게 줄 맞춰 키울 때 가장 수율이 좋다고 한다)


가까이서 본 포도는 내가 평소 알던 포도에 비해 훨씬 알이 작고 알이 많았다. 어릴 적 그리스로마신화 만화나 이태리 명화에서 보던 포도알 같았다. 인간을 위해 개량되기 전의 포도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곳 렌윅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와이너리 십 수개가 모여있었다.


11시부터 5시, 자전거를 빌린 시간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갈 곳은 너무 많았다. 청포도로 만드는 쇼비뇽블랑과 리슬링을 위주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우리는 피노 누아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을 위주로 골랐다. 햇살 가득 들어오는 정원의 빈백에 기대어 앉아 와인 테이스팅을 즐기기도 하고, 감각적인 건물 내부에서 해를 피하며 쉬어가기도 했다.


그중 기억에 가장 남았던 경험은 역시 Cloudy bay였다. 워낙 유명하기도 해서 한국에서는 오히려 손이 잘 안 갔고 실제로 와인의 맛도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같아 인상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한 경험은 단연 한 수 위였다. 서비스의 질이나 건물의 꾸밈새는 여행 중 들른 그 어느 곳보다도 세련되고 쾌적했다. 테이스팅이라 조금씩 먹었는데도 와인마다 잔을 새로 바꿔주었고 잔을 교체할 때마다 물방울 자국이 잔에 남아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확인했다.


널찍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프로페셔널한 와인에 대한 설명까지 하나같이 인상 깊었다. 그곳에서 와인과 페어링 해서 먹은 굴은 뉴질랜드 그 어디서 먹은 굴보다도 맛이 좋았다. 굴 자체가 질 좋고 신선했던 것도 있었지만, 굴 위에 오이와 유자를 갈아 셔벗으로 올렸던 음식은 파인다이닝에서 맛볼 것 같은 메뉴였다. 뒤늦게 알았는데 클라우디베이는 LVMH의 소유라 한다. 그제야 아하하고 이해가 갔다. 역시 자본의 맛이 좋다.


점심 먹을 곳이 마땅찮아서 이곳저곳 들러보다가 다행히 자리가 없을 것 같았던 No.11에 자리가 있었다. 햇살이 가림 없이 들어오는 예쁜 정원에 앉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침부터 운전하고 와인만 때려부었던지라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록입홍합 요리와 피시파이, 시푸드차우더를 와인과 페어링 했다. 하나 아쉬운 점은 굴이 품절이었다는 것.


난생처음 도전해 본 피시파이는 대구의 흰 살만 발라 버터향 가득한 크림에 버무린 후 파이에 넣어 구운 음식이었다. 피시파이라고는 SNS에서 정어리 머리가 튀어나온 영국식만 봤던 터라 일단 이 정도라면 비주얼은 아주 멋있었고 맛도 괜찮았다. 다만 생선과 버터의 조합이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많이 못 먹었는데 의외로 성민이가 맛있게 잘 먹었다. 여행에서는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큰소리 땅땅 치던 나였는데 사실상 성민이가 모든 음식을 나보다 훨씬 더 잘 먹었다. 그보다 여행경력이 월등히 많은 자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이후 아기자기하고 감각적인 노틸러스의 정원에서 피노누아 두 잔을 느긋하게 즐기며 우리의 와이너리투어를 마무리했다. 멋진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말보로에 왔으니 꼭 굴을 먹자고 다짐했다. 말보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좋은 굴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뉴질랜드 굴을 전 세계 최고라고 유명한데 말보로 굴은 그중에서도 최고라고 한다. 어느 레스토랑을 가든 “말보로 굴”이라고 자신 있게 써 놓았던 것이 기대를 고조시켰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내에 유일한 굴 전문점은 월요일이 휴일이었다.


주변에 물어보고 구글맵을 뒤져 굴을 파는 레스토랑을 하나 찾아냈다. 그나마도 마땅하지 않아 얼마나 지도를 뒤지고 또 뒤졌는지 모른다. 이렇게 유명한 굴 생산지에서 굴 전문점이 하나밖에 없다니,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굴 전문점은 다 교외로 나가야 있었다. 조그만 시내에서는 오히려 주민들이 찾을만한 피시 앤 칩스나 버거, 아시안음식 말고는 크게 먹을 게 없었다.


오랜 검색과 고민 끝에 레스토랑 하나를 찾았다. 동네의 핫플인지 도착했을 땐 사람들이 넘쳤고 야외테이블이 한 개 정도 비어있었다. 서버를 기다렸는데 주방이 너무 바빠서 손님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다고 한다. 기다릴 수 있다고 하니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면 가게 영업을 종료할 것 같다고 했다. 무려 영업종료시간은 두 시간 뒤였는데도 말이다. 창가 테이블 손님 한 팀이 더 빠져나가자 인내심 있게 서버를 다시 기다린 후 저기에 앉아서 조금 기다려도 된다고 말했지만 바빠서 음식을 판매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테이블이 다 차있거나 재료 소진이거나 마감시간이 아닌데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퉁명스레 얘기하는 와중에 다른 손님과는 웃으며 즐겁게 얘기했기에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가자는 성민이의 말에 그냥 나오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오전부터 이 도시에서 은근히 느껴지던 찝찝했던 기운이 혹시 인종차별인가 싶었다. 그 옆 태국 음식점에 가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왔지만, 도시의 끝이 기분 좋지는 않았다. 나름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던 숙소에서 화장실 지린내가 풍겨 나오는 것까지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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