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날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오늘 비행기는 오전 11:50. 9:30에 택시를 예약해 두었으니 그전에 빠르게 서핑을 서핑하고 남은 짐을 싸야 한다.
5:20. 평소보다 10분 빠르게 일어나서 냉장고에 남은 바비큐 플레이트를 처리하고 서핑하러 갔다. 항상 칼같이 여섯 시에 샵에 도착하고 싶었는데 항상 여섯 시 반쯤 뭉그적 갔었다. 오늘은 처음 서핑하러 갈 때처럼 6시쯤에 맞춰 샵에 도착했다. 확실히 어제 많이 잤더니 컨디션이 좋고 개운하다! 30분 차이인데도 여섯 시의 거리는 훨씬 더 차분하고 하늘의 색깔은 아직 어스름하다. 첫날과 같이 쓰레기차들이 보인다. 쓰레기차마저 거슬리지 않는 이곳, 도착한 다음날과 같은 데자뷔 같다.
그날도 잠든 워니를 두고 새벽 여섯 시에 나와서 아직 다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색깔과 새벽냄새를 맡으면서 와이키키로 향했었다. 그날과 다른 것은 지금의 나는 멍 때리면서 가도 발길이 알아서 길을 찾아갈 만큼 익숙해졌다는 것. 이 동네가 다 익숙해졌는데, 지나가는 길의 음식점을 거의 다 가보았는데, 이제 내일이면 더 이상 쿠히오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서핑샵에 도착해서 스카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도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보드를 꺼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들 심성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다. 보드를 받아 들고 바다로 향한다. 멀리서 봐도 파도가 작다. 오늘은 피리어드도 길고 타이밍도 좋아서 - 리키가 알려주었던 간조 후 2시간 - 조금 기대했는데 너무 작다. 사이즈가 작으면 어떤 지표들도 다 소용이 없구나 싶다. 그래도 평화롭고 사람이 적은 덕에 맘 편히 탔다.
파도가 작은 와중에 재미있는 파도를 몇 개 잡아탔다. 문득 생각하니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늘었다. 아마 처음 왔을 때 실력으로 이 파도를 만났다면 오늘처럼 재미있게 타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조금 더 있으면 더 잘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아쉬웠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다에 장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밋밋할 거라 서핑을 못 하는 것과 서핑실력이 멈추는 것이 가장 아쉽다. 재밌는 파도를 잡아타고 방향을 바꾸다가 퐁당 떨어졌는데 저어 멀리서 누군가 "나리가~" 불러서 보니 블레이크다. 착한 블레이크! "헤이 블레이크~!" 하고는 들어가서 또 파도를 기다린다. 하염없이... 쥐어짜며 파도를 타고 8시가 되어 바로 나왔다.
돌아가서 블레이크와 "그리울 거야~" 하며 인사를 했다. 다만 스카이와 인사를 못 한 것이 아쉽다. 그가 잘 가라고 했을 때 길게 인사를 하지 못하고 "you too" 정도로만 얘기한 것이 아쉬워서 그와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미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제대로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그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서핑샵에서 가장 자주 얼굴을 보고 보드를 가장 잘 챙겨준 직원이었는데 말이다.
여기 사람들과 얘기하며 신기한 것은, 다들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내년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돌아오라고 나는 여기 있을 거라고. 헨리나 에드, 블레이크처럼 나이가 조금 잇는 사람들은 이제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하겠지만 로스나 스카이처럼 나이가 적은 사람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여기서 계속 일해왔고/서핑해 왔고 계속 그럴 거라고. 당장 한 치 앞도 확신할 수가 없는 나로서는 참 생경했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내년 이맘때 같은 일을 할 거라고, 같은 곳에 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일터뿐만 아니라 사는 곳조차 바뀔 것 같다. 모든 것이 아직 미정인 나에게 그들의 항상성에 대한 확신은 너무나도 인상 깊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내년에도 이곳에서 서핑할 거라고, 이곳에서 일할 거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걸까? 항상성에 대한 확신은 과거부터 이어온 경험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생활에 대한 만족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평생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년에도 이 자리에서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날이 올까 싶었다. 나의 불확실성의 근간은 불만족이자 욕심일 터였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더 좋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혹은 현재의 삶에서 만족과 안정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큰 결정에 있어서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닌 성공을 위한 선택을 해 왔기에.
돌아와서 빠르게 정리를 하고 남은 냉장고를 털고 맥주도 한 잔 하면서 후다닥 짐을 마저 쌌다. 방도 치우고 쓰레기도 비우고. 젖은 비키니를 가방에 욱여넣고 나간다. 많은 짐을 버렸는데도 많은 것을 산 탓에 짐이 조금 더 늘었다. 환율이 그리도 비쌌는데 뭘 그리도 사댔는 지 모르겠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조그만 공항, 많이 걸을 것도 없다, 아시아나에 줄을 서는데 이렇게 한국인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한국인이 잔뜩 있다. 한국인이 많은 장면이 생경하면서도 익숙하다. 어제로서 30일짜리 통신사플랜도 종료되었기에 공항 와이파이를 잡아 에어비앤비 호스트 릭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내년에 와서도 같은 숙소에 지내면 좋겠다. 만족스러웠다.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못다 읽은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었다. 한 여자로서의 삶, 소녀였다가 노인이 되는 그녀의 삶을 읽었다. 그녀의 삶에 푹 빠져들었고 특히 늙어감에 대한 그녀의 느낌에 너무나 공감했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손에 꼽히는 좋은 책.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 비빔밥이 먹고 싶었는데 맨 뒷자리에 앉은 죄로 비빔밥이 똑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쇠고기 스테이크를 질겅질겅 씹었다. 영화 더 웨일을 틀어놓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서핑을 하고 낮잠 자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들었나 보다. 자고 일어나면 이제 현실로 돌아간다. 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어야지. 그리고 헬스장 가서 사우나를 해야지, 그리고 얼른 담담 이를 보러 갈 테다. 귀여운 담담이 가 너무 보고 싶어!
어느새 인천에 도착해서 공항버스를 탔다. 그리고 내려서 짐을 끌고 집으로 왔다. 그 짧은 사이에 느낀 것들이 있었다. 어느새 그 사이에 1/ 나는 너무 까매졌고, 2/ 머리색깔이 눈에 띄게 밝고, 3/ 하와이에서는 그렇게 말라 보였던 내가 한국사람들의 틈에 있으니 살이 꽤나 찐 것이 느껴지고, 4/ 내 옷은 너무 밝았다. 길가의 사람들은 모노톤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5/ 아차 하와이 집에 마지막 날 입으려고 걸어두었던 셔츠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진정으로 한국에 왔다고 깨달은 것은 6/ 무거운 백팩과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나를 다들 한 번씩 쳐다보는데도 아무도 도와줄까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한국에 왔다. 나의 현실에 돌아와 버렸다. 못내 두고 온 하와이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익숙함도 스쳤다. 하와이에서는 자연스레 띄고 있던 미소도 한국에서 원래 나의 무표정처럼 자연스레 돌아왔다. 이제 단꿈에서 깨어나 다시 나의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한달간 꿨던 달콤한 꿈을 밑천삼아 다시금 살아가야지. 그리고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지는 선택들을 해야지
추신. 하와이에서 비키니 입고 돌아다닐 때보다도 더 한국에서 반바지 입고 돌아다닐 때 더 내 뱃살을 의식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