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어느새 내일이면 떠난다. 싱숭생숭하다. 오늘은 서핑 두 세션을 타기 위해서 휴가를 냈다. 짐도 싸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이 너무 무겁다. 이제 내일이면 떠난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내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쳐서 몸도 이제 의지의 끈을 놓아버렸나 보다. 미적대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서 서핑스폿으로 갔다. 오늘도 파도가 작을 예정이라 팝스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보드를 들고 해변까지 가는 것도 힘든 것을 느끼며 오늘 팝스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이 앞에서 편하게 타야겠다.
오늘도 어느 날처럼 에런이 스폿에 있다. 에런은 이곳에 온 지 18일째다. 나와 같은 날인 내일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데, 오늘이 마지막 서핑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인만큼 슥슥 잡아탄다. 너무 지친 나와 달리 그는 마지막날이라 committed 되었다고 했다. 어쩐지 원래 딱 두 시간 타고 나가는 사람이 여덟 시가 되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나는 너무 지쳐서 거의 보드에 엎드려 누워있었다. 지치면 패들도 잘 안 되고 패들이 잘 안 되면 오히려 작은 것까지 끌어다가 패들 하게 된다고(scrappy) 그와 얘기하고 있던 차였다. 저어 뒤에서 파도가 오는 것 같아서 타려고 끙차 패들을 했는데 깨지지 않는 작은 파도였다. 돌아와서 나를 쳐다보는 그와 동시에 scrappy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와 3주를 같은 스폿에서 매일같이 있었지만 그와 얘기를 한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에드가 떠나면서 그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연한 금발의 새 파란 눈을 가진 날카롭고 예민한 유럽인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현실은 애리조나에 살고 있는 겸손한 직장인이었다. 매년 이맘때 장모님네 가족과 함께 온 가족이 하와이에 온다고 한다. 아기가 있는 아빠라서 그런지 나에게 말할 때 가끔 아이한테 말할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 내 영어구사력이 아이와 비슷한 점도 일조할 것이다 - 오늘은 호텔 바로 앞에 얕은 비치에서 엄청 큰 장어랑 문어를 봤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해주었다. 산 낙지 얘기하려다가 참았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나는 humble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도 너무 좋지만 겸손한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더 편안함을 느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도 (가진 게 없지만) 더욱더 가진 체, 아는 체하지 않고 나를 낮추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생각할 때 나도 그들을 편하게 느낀다. 끙끙대며 파도를 잡아탔는데 생각 없이 타다 보니 어느새 비치까지 나와버렸다. 이대로 나갈까 하다가 그와 인사를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라인업에 돌아왔다. 서로 나랑 놀아줘서 고맙다고 하며 인사를 하고 겨우 다른 파도를 잡아타서 나왔다. 애런은 내년에 또 이곳에 올 거니 내년 이맘때 오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으니 다시 보자고 했다.
이제 내일이면 이 바다에서 매일 아침 보던 사람들 중 한 명 더 없겠구나. 모레면 나도 없겠다. 처음 왔을 때는 아침마다 보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초반에 보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없다.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자유로이 미국 본토로 유럽으로 훌쩍 떠났다. 맨 첫날 만났던 다니엘은 아시아로 장기여행을 떠났고 매일 다정하게 눈인사를 해주었던 헨리아저씨도 - 그는 생김새가 우리 아빠를 닮았다. 우리아빠의 인상을 조금 더 선하게 바꾸면 헨리아저씨다. - 내일이면 손주들을 보러 오클라호마로 몇 주간 떠난다. 에드도 이미 몇일 전 캘리포니아 집에서, 또 유럽에서 머무르다 올 예정이다. 얼마 전에 봤던 넬슨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이태리로 떠났다. 이들은 어쩜 이렇게 떠나는 것이 자유로울까? 그들은 이미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와이에서 매일 서핑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 아주 부자인가 싶었다. 그들의 삶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오늘 오후에 예즈랑 같이 팝스에서 타기로 했었는데 그녀에게 못 갈 것 같다고 디엠을 보냈다. 밝은 그녀의 에너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못 봐서 아쉽다. 그렇지만 이대로 갔다가는 죽도 못 쑤고 나올 것 같았다.
씻고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을 해치우고 한 시간 정도 멍하니 유튜브를 보다가 비치로 갔다. 피곤하면 전두엽이 일을 하지 않아서 내 손이 습관처럼 손이 유튜브를 찾도록 그냥 놔둔다. 휴 유튜브 좀 그만 보고 싶다. 겨우 정신을 차려서 낮잠을 자더라도 비치에서 자리라는 마음으로 와이키키로 왔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종종 가던 쿠히오 해변이 아닌 사람 많은 모아나서프 앞으로 갔다. 그늘에 자리 잡으려고 누웠는데 쉬야 냄새가 나서 머리 위를 보니 웩 어떤 노숙자가 쉬야를 해 놨나 보다. 자리를 옮겨 잡고 누워서 책을 본다.
요 며칠 째 보고 있는 아니 에르노의 세월, 어쩐지 지금 이곳과 잘 어울린다. 내 앞의 소녀 무리와 중년의 무리, 그리고 노년을 맞이한 이들까지 한눈에 보며 그들의 세월을 짐작해 본다. 바닷가의 소녀들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예쁘다. 어릴 때 어른들이 그렇게 얘기했던 풋풋한 그 예쁨을 이제 느낄 수 있다. 그녀들은 끼리끼리 비슷한 비키니 탑을 입었다. 수영복의 뒷모습이 모두 똑같다. 한 그룹은 세 명 모두 끈으로 된 홀터넥을, 다른 그룹은 네 명 모두 어깨끈으로 된 수영복을 입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시절의 풋풋함이 젊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최소 10년은 더 남았을 그들의 앞날과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마지막 만찬을 뭘 먹을까 고민을 했는데 말이다, 나에게는 야드하우스가 최고였다. 포케나초와 참치타다키 모두 정말이지 나는 여기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다. 그래서 야드하우스에 다시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은 다행히 아직 웨이팅이 없었고 매번 갈 때마다 앉았던 테라스 그 자리에 앉았다. 내심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었음 하고 갔는데 오늘도 앉을 수 있어서 러키다. 게다가 앞에 티브이에서는 WSL(World Surfing league)도 하고 있다. 신난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염불을 외던 마티니도 팔고 있다. 주문했다. 진으로, 봄베이 사파이어로. 미국은 특이하게 마티니를 주문할 때마다 보드카를 넣을지 진을 넣을지 물어본다. 잘 모르지만 보드카는 도전하기 무섭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잔디밭 앞 테라스석 앞에서 맛 좋은 타다키를 먹으면서 또 마티니를 마시면서 WSL을 본다. 아 진짜 너무 완벽하고 너무 행복해. 마지막 야드하우스는 너무나도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마티니가 맛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다. 맥주 잘하는 집에서 칵테일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지. 2차전으로는 포케나초와 화이트와인을. 화이트와인도 조금 달달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요 며칠 냉장고에 남은 맥주를 처리하느라 1일 1 맥주 했더니 맥주보다 다른 주종이 훨씬 당겼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포케나초는 진짜 별거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맛을 내는지!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맛이다. 술이 꽤나 알딸딸하게 취해서 집까지 살살 걸어가기로 한다. 구글맵을 찍어보니 9분,,, 나 여태 왜 버스 타고 다녔는지? 좀 찾아볼걸 그랬다. 운하 따라 기분 좋게 집에 와서 꿀 같은 낮잠을 잤다. 너무너무 잘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여덟 시가 넘었다.
아아 짐을 싸야 하는데, 그리고 ABC마트도 가야 하고 호놀룰루쿠키도 가야 하고, 와이키키월도 한 번 더 봐야 하고. 머릿속에서 '해야 하는데'만 한참을 맴돌다가 드디어 미적대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 와이키키월까지는 못 가고 와이키키비치에 앉아서 밤바다를 보았다. 달이 반달인데도 이렇게나 별이 밝다니, 진짜 너무 감격스럽다. 별자리를 셀 수도 없이 별이 많다. 쏟아질 것 같은 별을 한참 바라보다가 주변이 조용해져서 돌아왔다. 분명 별을 보려고 앉았을 때만 해도 주변이 참 소란스러웠는데 어느새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와이키키는 9 시대까지는 사람이 엄청 많은데 10시가 넘으면 다른 세상처럼 조용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상점들도 10시면 문을 다 닫는다.
돌아와서 노래를 틀어놓고 짐을 싼다. 생각보다 짐이 없으면서도 짐이 많아. 짐을 다 싸고 열두 시쯤 누웠는데 낮잠을 많이 잔 탓에 말똥말똥. 한 시간 즈음을 그렇게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