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 떠나기 전 나의 마음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오늘도 파도가 미쳤다. 진짜 이 파도 두고 집에 어떻게 갈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와이키키는 0.7 언저리라면 항상 좋은 것 같다. 여름은 스웰 방향을 볼 필요가 없다. 항상 정확히 꽂히는 스웰이 어메이징 하다. 바람도 세지 않고 피리어드도 항상 길다. 매일 최소 10초는 된다. 이 정도 피리어드는 한국에서는 다대포니아 말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다대포는 영상으로만 봐도 패들 해서 나가는 길이 영겁과도 같을 만큼 길다. 나는 이렇게 집에서 10분 거리에 패들 해서 나가기도 쉬운 스폿에 심지어 파도가 완벽한 정스웰이니 너무 행복하다. 여름에 와이키키가 파도가 좋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 아님에도 한 달 내내 이런 완벽한 파도를 만났다니. 올해의 운은 여기다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파도를 읽는 법을 조금 알고 싶다. 파도를 타다 보면 파도가 깨지면 방향을 틀어 파도와 수직으로 가고 깨지지 않으면 방향을 파도와 평행하게 간다. 그러다 보니 파도가 깨지는 줄 알고 파도 뒤로 넘어갔는데 사실은 파도가 깨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파도가 죽은 줄 알고 정면으로 갔는데 파도 면이 아직 꼼지락 살아있었던 경우도 있다. 이걸 잘 알아서 파도를 뼈를 발라내서 타고 싶은데 아직 그걸 보는 눈이 별로 없다. 큰 파도는 명확하게 보이니까 그나마 괜찮은데 작은 파도는 정말 어렵다. 이런 눈을 키우려면 파도를 많이 보고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는 매일같이 파도가 있는 이곳이 정말 최고인데 떠나다니 아쉽다.
다른 스폿도 가 보면 좋았을 것 같은데, 초보스폿(=내 수준)인 카누스에서 너무 만족한 나머지 다른 어느 곳도 가 보지 않았다. 카누스에서 15-20분 정도만 패들 해서 나가면 팝스라는 스폿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도 가 보고 싶었지만 굳이 싶어서 영영 가 보지를 않았다. 오늘도 파도를 타고 에너지가 뿜뿜이라서 함박웃음을 짓고 나왔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랜만에 카피올라니 공원으로 갔다. 이제 오늘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아서 공원에 가서 글을 쭉쭉 썼다. 역시 공원에서 쓰는 글이 가장 잘 써진다.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괜히 일할 생각에 단 게 당겨서 맥도널드에 들러 밀크셰이크를 픽업했는데 너무 달아서 혀가 아팠다. 입이 너무 달았던 나머지 쌉쌀한 커피를 마셨고, 그러고 났더니 입이 터져서 또 쿠키랑 요거트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제대로 돌아버렸다. 할 일은 많은데 마음은 붕 떠있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챙겨야 하는 일이 점점 밀리고 있어서 스스로 눈치는 보이는데 절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한국에서보다 적으니 일을 다 채워 할 수가 없었다. 하와이에서의 시간과 체력이 아까워서 최근 야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차였다. 야근을 하지 않으니 일이 밀리고 일이 밀리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점심을 잔뜩 먹은 터라 저녁에 배도 안 고픈데 괜히 가락국수가 당겨서 마루카메 가락국수로 갔다. 배가 이미 부른 상태라서 그냥 가락국수만 시켰는데도 배가 짱 불렀다. 마음이 불편한 것이 이렇게 스스로를 식고문하는 식으로 나타났다. 떠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나마 휴일이 많은 주에 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주 동안 각각 4일, 3일씩만 일을 하면 되니 2주를 어찌어찌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제 딱 3일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포케도 아사히볼도 미련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먹고 싶은 한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한국의 정갈하고 속 풀리는 한식이 조금 그리운 것 같다. 물론 이곳의 음식들은 일식이 많이 섞여서 음식에 대한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냉장고에는 올 때 짊어온 볶음김치가 아직도 반 넘게 남아있었고 옆건물에 있는 한식집을 매일같이 지나다니면서도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하와이를 반쯤 점령한 일본 덕분에 거의 모든 식당에서 쌀밥을 찾을 수 있었고 저렴한 가격에 아시안 음식을 어디서나 먹을 수 있었다. 포케 또한 미국 음식보다는 아시아 음식에 가까운 맛이었다. 싱싱한 회를 깍둑 썰고 해초류, 에다마메를 밥이나 샐러드야채 외에 올려 먹는 음식이라니, 그 재료 하나하나가 아시안의 입맛에 와닿았다.
D-2. 오늘까지만 일을 하면 내일부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부터 계속 파도가 작을 예정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뭉그적 뭉그적 바다로 향했다. 역시나 파도가 너무 작고 지친 내 몸뚱이도 힘이 없어서 파도가 잘 잡히지 않았다. 차트로 봤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라면 여기서 파도 몇 개도 못 잡아타겠다 싶었다. 문득 팝스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을 저어 그곳으로 향했다.
처음 가본 팝스는 외딴섬 같았다. 조그맣고 평화로운 스폿. 일본인들이 꽤나 있었고 모두 로컬 같아 보였다. 파도가 힘 있게 들어오고 아직 바람도 세지 않아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라인업을 못 잡아서 조금 헤맸지만 그래도 시도하는 대로 잡혀서 머리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두세 개 재밌게 탔다. 다만 여덟 시쯤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파도가 뚝뚝 끊겨서 타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팝스는 카누스보다 훨씬 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었고 라인업이 좁아서 사람들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 타고는 바람이 더 강해지고 파도가 잦아들기에 다시 카누스로 돌아왔다.
아차 팝스에서 로스와 넬슨이라는 친구들을 만났다. 로스도 캘리포니아에서 5년 전에 하와이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매일같이 팝스로 나온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파도 타는 것이 수준급이다. 인스타에서 보는 잘 타는 사람들 급이 카누스나 팝스나 항상 몇 명씩 있는 것 같다. 대단하다. 영차영차 20분 정도 팔을 넣어 카누스로 돌아왔다. 파도 타고 비치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결국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타지 못해서 어영부영 물에 떠밀려 나왔다. 보드를 반납하고 돌아가는 길, 길가에 대어진 쿨한 차를 보았다. 까만 테슬라 모델 Y에 서프랙이 달렸다. 서프랙이 투박한 것까지 멋짐 가득이었다.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가 나리가~~ 부른다. 하쉬 돌아보니 로스와 넬슨이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그 차 위에 보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으악 민망해라. "차 너무 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하고 말았는데 로스가 옆에서 보드 올리면 더 멋있다며 보드 올리고 찍으라고 한다. 하하 하고 말았지만 속으로 너무너무 민망했다. 넬슨의 차였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 주차비 비싸서 멀리 공원에 대던데, 짜식 부자인가 보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누워서 유튜브로 의미 없는 팝콘콘텐츠를 보다가 그저께 먹었던 브리스킷 생각나서 다시 집 앞에 바비큐집으로 갔다. 진짜 이번에는 마지막이니 더블코울슬로로 해서 잔뜩 먹고는 낮잠 자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제 오늘로써 하와이에서 일하는 것도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