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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 Dec 14. 2019

영성지능에 대해서

오늘 블로그 이웃되시는 분께서 질문을 한 가지 해 왔는데, 그 속에서 영성지능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였다. 

흔히 9번째 지능이라 말들을 하던데... 오래전 KBS 1 방송에서 세상을 바꾸는 9번째 지능: 영성지능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다. 

9번째라 함은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에서 언급한 8가지 지능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뇌가 가진 8가지 지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하나가 9번째 영성지능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지능이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인류애적인 고민과 우주적, 실존적인 이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리고 화제는 과연 어떻게 하면 이런 영성지능을 키울 수 있나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성지능을 위한 교육은 이미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우리보다 먼저 살아왔던 조상들이 이미 해왔던 교육들이다. 그 교육이 현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부적합하고 불편한 것으로 인식되어 퇴보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전의 조상들이 공부했던 것들을 폄하하며 바라보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우주 삼라만상을 공부했던 조상들의 교육은 바로 명리학이 대표적일 것이다. 현재는 단지 사주팔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치부되지만 중국의 경우 주나라를 시작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당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기본이 되는 요인을 근거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았었다. 특히 나의 운을 설명할 때 상대를 함께 고려함은 미미하지만 일종의 이타적인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이미 인류애, 태어난 이유, 삶의 목적,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많이들 교육해 왔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그리고 유교에서도 같은 질문을 추구했었다.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를 볼 때 유교의 경전 중 3경의 하나인 역경, 주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외에도 예의를 기본으로 가르쳤던 수많은 교육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경우, 금강경에서 세상만사의 원리와 존재의 이유 그리고 삶의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역으로 보자면, 이전에 해왔던 교육을 이제는 천시한다는 뜻도 된다. 

그만큼 우리는 오랜 역사보다 짧은 시간 동안 물질 만능과 성공우선주의 사회에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많은 것들이 손쉽게 손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귀족이나 양반, 왕족들이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신사 계급이나, 조선의 경우 상인이 일 것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늘 부족함이라는 단어와 살았고, 그 부족함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서로를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과 행동이었다. 부족해도 함께 함으로써 인정받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으니까. 단적인 비유로 협동이나 단결의 경우,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 발현이 가능한데, 있는 사람보다는 부족한 사람들에게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왕족이나 귀족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할 정도의 돈을 벌어 자기가 원하는 옷이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수가 절대적으로 예전보다는 우월하게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못 사는 사람도 잘 살 수 있도록 해 준 산업혁명, 기술혁명이 가져온 복인 셈이다. 그리고 사회의 정의와 진리는 다수의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 만큼 가난했던 대다수와 부족하지 않은 대다수의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더욱이 사람은 원래 id를 기저에 깔고 있다 보니 가지면 더욱더 가지려는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보니 사회적 부가 개인적으로는 약이 아닌 독이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구축된 우리나라 사회 구조가 돈이 있어야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많은 부분에 걸쳐 정착이 되어 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점차적으로 개인 및 이기주의화가 되어가는 모습에서 수많은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어 사회적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써야 하는 지경에 놓인 거라 봐도 무방하리라 본다. 잘 알다시피 사회적 비용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스스로가 유지하고 지탱하는 데 많이 힘이 든다는 소리와 같다. 즉, 사회가 무너질 확률이 높아진다. 


넘쳐남에 약이 독이 되어 스스로를 해하려 하니 이제는 영성지능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며 타당성과 당위성을 내세워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교육이나 오래전 조상들의 교육에 대해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잊지 않았더라도 옛 지식을 배우기엔 너무나 불편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현시대에 배운 지식으로는 근접하기 너무나 지루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 학자들만 공부하는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사실 "돈이 곧 종교다"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게 지금 세상 모습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종교의 가르침은 이단이 될 수 있고, 오래전 교육은 불필요한 교육으로 치부될 수 있다. 


영성지능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지금까지 개인적인 생각을 적고 있는데, 2019년 마지막 달에 나에게 임팩트를 준 단어가 아닐까 싶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을 헤엄치고 다니고 있다. 


세상은 분명 변했지만, 그 속에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id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ego나 superego를 통해서 삶을 통제하며 지켜나간다. 단지 변화해서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라 본다. 

넉넉한 환경으로 인한 편리함이 가져온 사람들의 게으른 사고와 행동, 고통 없이 얻으려는 모습들이 사람의 영성지능을 낮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영성지능을 높이려면, 그리고 이타적이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먼저 움직여야만 한다. 그리고 절대 게으를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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