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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 Dec 10. 2019

고백의 힘

고백이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고백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위선적이지 않고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 고백을...


남들에게 고백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사람이 가진 이미지는 보이는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절충이 만들어 낸다.

보이는 이미지는 말 그대로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이며 남들이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이미지는 나 스스로 판단하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개인의 특수한 향을 발현시킨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태어나서 서로 떨어져 살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속에서 각자의 경험이 다 다를 것이고 내면적으로 쌓이는 고민이나 심도 있는 이야기들이 다 다를 것이다. 이러한 차이와 다름이, 비록 보이지 않는 이미지지만, 매우 크게 개인의 성향과 특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고백의 경우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비치는 행위라고 볼 때 남에게 고백을 한다는 것은 적잖이 큰 일인 셈이다.  큰 일이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고백을 통해서 해방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악용되어 자신을 구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백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 안전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 숨겨왔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는데, 때론 그 고백으로 인해서 안전함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말하고자 하는 고백의 힘은 자신의 잘못이 더 큰 잘못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때론 고백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기 때문에 빨리하느냐 늦게 하느냐에 따라 그 충격의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30대 초반에 사기라는 것을 당한 적이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결론은 사기지만 나 자신의 무지로 인해서 손해를 본 일이며 그 속에서 사람을 잘못 믿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사기당했다고 말을 한다. 그럼 조금은 나 자신을 변호할 테니까. 사태는 점점 커가는데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감에 그 고민의 크기는 비례적으로 커져갔다. 만일 좀 더 일찍 고백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어차피 이젠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경험을 계속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늘 그 경험을 담고 살기 때문에 많이 괴롭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두 번 이상 그런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이것만큼 좋은 치료약은 없다.

그렇다면 고백은 언제 해야 할까? 사견으로는 1차적으로 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게 되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고백을 하거나, 또는 무엇이든 애매할 때 미리 고백하는 것이 리스크와 손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좀 더 빨리 고백하는 것은 상대에게 신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일을 다 저질러 놓고 해결해 달라는 식의 뒤늦은 고백은 상대에게 나 자신이 무책임하다는 점을 보이는 반면, 일이 터지기 전에 말하는 고백은 상대에게도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함께 고민할 시간을 제공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상호 간 신뢰를 보장받는다. 하다못해 상대가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각자가 고백할 타이밍을 설정해 놓고 만일에 일이 잘못되어갈 경우, 고백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며 이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고백 이전에 함께 상의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에 말하는 것은 고백일 테고, 일어나기 전부터 말하는 것은 상의일 것이다.


다음의 고백은 숨겨왔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 왜 고백을 해야 할까? 물론 개인에 따라 고백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경우는 자신의 버거운 짐을 더는 데 있다.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백을 한다. 물론 이런 고백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나 붙잡고 고백을 한다면 상대는 그저 남의 일, 허접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되기 일 수 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산다. 혼자서 살아가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에 귀의하여 혼자서 살아간다. 귀의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말과 같으므로 대상이 사람이 아닐 뿐,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대상에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숲 속에 혼자서 살아가는 노인이 있다고 하자. 그 노인도 자연을 벗 삼아 의존하며 살아간다. 만일 사람에게 의존의 대상이 없다면 그 순간 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며, 인정받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산다.  혼자서 숨은 이야기를 간직하기엔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고백의 진가는 진실된 마음에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자신을 헤아리는 데 좀 더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고, 상대를 기망하지 않고 신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고백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고백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남들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를 어느 특정인에게 한다면 일종에 고백인 셈인데, 그런 이야기를 유독 한 사람에게만 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은 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의 짐을 덜 수는 있겠지만 고백을 이용하는 그런 행위로 인해서 상대는 신뢰보다는 또 다른 버거움으로 괴롭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어쩌면 고백이 아니라 마치 묵혀 두었던 배설물을 쏟아내는 것과 유사하다. 고백은 진실된 속마음이지 배설물은 아니다.


고백을 하는 사람,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 고백을 이용하는 사람,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래도 고백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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