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검사관, 파리를 달리다]
처음은 언제나 긴장이 된다.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온만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도핑검사 자체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 파리에서 새롭게 사용하고 있는 도핑검사 운영 프로그램인 ‘ComPASS(컴패스)’는 기존에 내가 사용해 오던 프로그램과는 다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약속된 원칙들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시료보관 장소 옵션을 나중으로 선택하는 것이라든지, 검사 종료 후 매니저에게 시료를 전달한다는 옵션에 반드시 체크를 하고 관련 정보를 입력해야만 검사가 마무리가 되는 것 등이 있다. 만약 하나라도 체크를 잘못하거나 누락하게 된다면 검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곧바로 추가보고서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여기에 모인 도핑검사관들 스스로가 자국에서는 소위 에이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일 텐데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입에 내 이름이 오르고 내린다면 이 좁은 도핑검사 업계에서 자신의 경력에 큰 스크래치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에겐 첫날 근무가 다른 어느 날 보다 더 완벽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오후 3시까지 출근하면 되는데도 미리 도착해서 몇 가지 애매한 것들을 확인받은 뒤 나의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12시쯤 숙소에서 나와 메트로를 타려고 했는데 조직위에서 지급해 준 나비고(NAVIGO) 교통카드가 개찰구에서 계속 에러를 일으킨다.
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왠지 싸늘하다.
황급히 안내데스크에 문의를 하려고 갔더니 직원은 없고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승객 몇 명이 줄을 서서 나를 도와준다. 조금 지나자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나 바쁘다며 제대로 설명도 듣지 않고 문을 열어 그냥 통과를 시켜 준다.
마음이 초조하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사람들 속에 섞여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지하철 안에서 만난 자원봉사자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더니 담당부서가 있는 곳을 안다며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 덕분에 새 카드를 다시 발급받고 감사의 표시로 작은 기념핀을 전달했다.
참고로 이번 올림픽에는 수없이 많은 직장인들이 휴가를 내고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점이 매우 이색적이다. 심지어는 영국에서도 오고, 우리나라 유학생들도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 휴가를 내고 교통과 숙박비까지 모두 자기가 부담해 가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동스럽다.
시작이 다소 어수선하긴 했지만 놀란 가슴을 달래기 위해 몸 안에 잔뜩 카페인을 들이붓고는 바로 도핑관리실로 향했다.
다행히 오전 근무를 마친 우리나라 도핑검사관 선생님들을 만나 현장에서 원포인트로 레슨을 받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배정을 받은 검사 또한 모두 상황이 달라서 한국에서 준비해 갔던 다양한 시나리오를 모두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던 프랑스 도핑관리실 매니저가 살며시 다가와 나에게 이번이 몇 번째 올림픽 참가인지를 물어왔다. 동계와 하계를 모두 합쳐 이번이 다섯 번째 올림픽 참가라고 했더니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온다.
자정이 다 돼서야 근무가 종료되었고 마침 미국 시카고에서 온 도핑검사관 다니엘이 나와 같은 숙소여서 함께 지하철을 타고 수다를 떨며 호텔로 복귀했다.
숙소로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우리의 첫 번째 근무를 자축하자며 맥주와 와인 몇 병을 사들고는 로비에 앉아 새벽 1시 반까지 그렇게 우리의 하루를 마셨다.
나의 첫 근무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내 하루를 감사로 이끌어 주신 분들 모두에게 "멕시 보꾸(Merci beaucoup,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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