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엄마가 되었다.

by K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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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설령 결혼을 하더라도 딩크족으로 살겠노라 마음먹었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고 보니 결혼도 하고 싶고, 아기도 갖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이 쉽게 바뀐 걸 보면, 사실은 결혼도, 아이도 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단지 그 당시의 내 일상과 자유를 포기하기 싫었던 것뿐일지도.

결혼은 꽤 수월했다.

남편도 좋았고, 시댁도 내가 상상했던 ‘시댁’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보다 훨씬 괜찮았다.

결혼식도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남편의 누나가 했던 곳 딱 한 군데만 보고는 홀패키지로 계약. 결혼을 결심한 지 6개월 만에 얼렁뚱땅 결혼해버렸다.

결혼생활도 순탄했다.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코로나를 핑계 삼아 1년 넘게 백수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이직을 하겠노라 선언하고는 수원에서 공주로 이사해버리는 아내를 이해해주는 착한 남편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건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키우는 건 달랐다.

왜 딩크족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출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들었던 어마어마한 분만의 고통을 나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선택적 제왕절개를 택했다.

너무 끔찍한 고통을 상상했던 탓일까, 출산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오케이, 출산은 별로 안 힘들었어. 아기도 너무 예쁘고. 이제 아기만 잘 자라면 되겠지.”

이렇게 쉽게 생각한 게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는 산후조리원 입소 첫날부터 알게 됐다.

내가 입소한 산후조리원은 아기를 대부분 데리고 있다가, 하루에 아침 1시간, 저녁 2시간, 총 3시간 정도 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

그 하루 세 시간이 그렇게 긴장될 줄은 몰랐다.

“엄마는 하루 세 시간 같이 있는 게 뭐가 어렵냐”며

나와 동생 모두 산후조리원은커녕, 이모의 도움 단 3일만 받고 아빠의 도움 없이 혼자서 키우셨다며, 핀잔 섞인 격려를 해주셨다.

아이를 키우기 전엔 몰랐다.

아기가 이렇게 자주 먹고 자야 하는지도 몰랐고, 언제 얼만큼 재워야 하는지가 온전히 부모의 선택이라는 것도 낯설었다.

내가 정한 선택 때문에 아기가 덜 크거나 약해지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기 바빴다.

그런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그런 건 부모의 선택이라기보다, 아기 선택이 95%고, 우리의 선택은 겨우 5%일 거야.”

그쯤, 출산 후 몇 달 만에 엄마 집에 혼자 놀러 갔던 날.

남편이 주말에 아기를 보겠다고 해서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던 중, 우연히 옆집 할머니를 만났다.

“아기는 잘 키우고 있니?”라는 인사에

너무너무 힘들다고 하자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힘든 게 어딨어! 예전엔 밭 매고 농사지으면서도 다 잘 키웠어.

힘든 걸 자꾸 세뇌해서 힘들게 느끼는 거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기를 위해서라도 한 명 더 낳아.

할머니 말이 맞아, 꼭 낳아.”

동네 소아과 선생님도 나의 걱정을 듣고는

“구석기 시대에도 동굴에서 아기들은 잘 자랐어요.

아주 드문 확률 때문에 너무 마음고생하지 마시고, 재밌게 잘 키우세요.”

라고 웃으며 말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육아할 때의 마음가짐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덜 크고 연약한 건… 어쩌면 아기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는 내가 타놓은 분유보다 덜 먹고, 정해놓은 낮잠 시간보다 덜 자더라도 조금은 덜 걱정하려고 노력 중이다.

매 순간 노심초사하는 엄마보다는, 느긋하게 아기를 믿어주는 엄마가 아기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을 거란 믿음으로.

그리고, 매일 글을 쓰고 싶어졌다.

매일 뭔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육아를 하다 보면 어쨌든 매일 걷게 되니까.

분유를 타느라, 아기를 달래느라, 재우느라 걷는 하루.

그래서 걸음수를 기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하루의 걸음마다 떠오른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내가 왜 걸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지나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