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3걸음, 겨울에 패디케어를

by K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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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날. 나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즐거운 하루 하나를 정해두고, 그 전까지는 그 날을 생각하며 버티는 날.

나에게는 5월 31일이 그런 날이었다.


지난번 서울에 갈 땐, 친구를 3시간 만나기 위해 유축기, 아이스팩, 젖병을 가방에 챙겼다.

출산 전에는 몰랐다. 모유 수유가 이렇게까지 힘든 일이라는 걸. 젖양도 많지 않았고 자세 잡기도 어려워 직수는 하지 못하고 유축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젖이 돌아 옷이 젖기도 하고, 가슴이 딴딴해져 외출도 쉽지 않았다. 그게 나름의 고생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산후조리원에서 단유하고 나오려 했지만, 엄마가 “아기 50일까지만이라도 면역력 위해 젖을 먹이자”고 설득했다.

그 말에 힘입어 간신히 50일을 넘겼고, 드디어 단유를 했다.

막상 하려니 아기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

원래는 5일 하려던 걸 50일 했으니 많이 한 거 아닌가.

유축할 시간과 에너지를 아기 돌보는 데 쓰자.

그런 합리화 속에서 단유 기념 서울행을 예약해두었던 것이다.


아침 7시 39분 버스를 타고 출발해, 10시에 미용실, 2시엔 이모가 운영하는 피부샵에도 예약을 해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과 미용실 사이, 점심 먹으러 가는 엄마집, 다시 피부샵을 향해 또 걸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며 거의 만걸음을 걸었다.
유모차 없이 이렇게 걷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1년전 강남의 비싼 미용실에 멤버십을 끊었던 날, 미용사에게 “요즘 머리에 기름이 많다”고 말했다.

두피 검사를 했지만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땐 이미 임신했었는데, 내가 몰랐던 거였다.

세종에 살고 임신 이후 컨디션도 급격히 나빠졌고, 굳이 커트만 하자고 강남까지 갈 필요가 없어 그렇게 1년이 지나 재방문하게 됐다.


사실 이번에도 파마를 하러 강남까지 갈지 말지 내적 갈등이 컸다.

엄마는 “이모랑 제일 좋은 약 써서 집에서 해줄게, 왜 돈 들여 멀리 가냐”고 말렸다.

친구 해롤에게 고민을 털자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가. 엄마한테 했다가 망하면, 나중에 아기 볼 때마다 ‘아기 낳고 나서부터는 나 자신을 덜 돌보게 됐구나’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예전처럼 도서관도 다시 다녀. 책 다 안 읽더라도, 빌리고 반납하고 그 과정이 좋잖아.”

맞는 말이었다.

사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면서, 결과물보다는 과정이 더 좋았다.

휴직도 했겠다, 파마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그냥 평범한 파마머리가 되었고.

인턴이 머리 감겨주며 “세종에서 왔다”고 하니, “저도 지방 살아서 그런 고생 잘 안다”고 했다.

차를 권하고, 잡지를 챙겨주고, 앞으로 머리는 어떻게 할 계획인지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들이 오랜만에 나를 챙김받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기에게만 쏟느라 잊고 있던 ‘내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리게 해줬다.

엄마에게는 실제 금액보다 10만 원 낮춰서 말했지만, 그래도 비싸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멤버십이 끝나면 좀 더 저렴한 곳으로 옮기든지, 정말 엄마한테 맡겨볼까 싶기도 하다.

사실 육아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날은 매우 적다.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를 하거나 피부 케어를 받는 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자기만족이다.


몇 년 전 겨울, 친구와 네일샵에 간 적이 있다.

여름도 아닌데, 친구는 패디케어를 받았다.

“샌들 신을 것도 아닌데 왜 해?”

라고 묻자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샤워할 때마다 발 내려다보면 기분이 좋더라고.”

그 친구는 이미, 스스로 만족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거다.


하루 동안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온 뒤, 남편에게 “힘들지 않았어?” 하고 물었다.
“아니? 전혀. 내일도 또 놀다 와도 돼.”
분명 쉽지 않은 하루였을 텐데,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웃으며 말해준 남편에게 정말 고마웠다.


상황이 바뀌고 삶이 버거워질 때에도 나는 나를 잃지 말아야지.

조금씩 나를 위한 즐거운 것들을 하자. 그리고 그런 나를 기꺼이 응원해주는 남편에게 그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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