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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익구 Nov 20. 2021

갈밭의 곰배질

  점심을 먹고 논둑에 누우면 티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빛이 그저 서럽기

  갈밭은 우리 집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곳에, 초가 몇 채와 이모작을 하는 작은 논뙈기가 있는 들 가운데의 섬 같은 동네다.

  요즈음같이 이앙기로 모를 내고 콤바인으로 추수를 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그곳에 농사철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나가셨다. 보통은 겨울이 오기 전에 보리갈이를 하고 한겨울이 오기 전 싹이 얼지 않도록 보리밟기를 했다. 우리는 봄보리를 심었다. 다시는 봄이 없을 듯 추웠던 갈밭에도 2월이면 봄물이 오르고 보리 파종을 위해 묵혀둔 거름 더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지난가을 추수 후에 갈아엎어 둔 논은 적당히 말라 있어 보리밭 두둑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씨앗을 뿌리고 두둑 사이의 흙을 삽으로 퍼 적당히 뿌리기도 하고 벼 그루터기에 달라붙은 흙덩어리를 부수면 자연스럽게 씨앗이 덮인다. 흙덩이를 깨는 데는 둥근 나무토막에 자루를 끼운 곰배가 제격이다.

  곰배질에는 어린 나도 한몫을 했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때로는 피가 나는 일도 있었지만 시골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일도 아닐 뿐이며 이미 고사리손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포시라운 말일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논둑에 누우면 티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빛이 그저 서럽기만 했다. 시집간 누나 얼굴, 월남에 간 큰형 생각, 숙제해야 할 것들, 잡동사니 같은 걱정거리도 스쳐 지나가는 한 점 구름을 따라 끝없이 떠내려갔다. 종다리는 또 무슨 슬픈 일이 있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 재끼며 보일락 말락 끝없이 하늘 꼭대기로 치솟아 올랐다. 어느덧 내 마음도 하늘 높이 올라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논둑에 누워 오수에 빠진 아버지의 등 뒤에서 불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언제나 재바른 엄마의 거동 속에 고단한 오후가 시작되지만 나의 어린 시절 갈밭에서의 곰배질은 동화 속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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