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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장군 Nov 04. 2020

공부만 하느라 배우지 못한 것

뉴질랜드에서 생각을 보내요

딸의 아르바이트 광고하는 뉴질랜드 엄마들

나는 오클랜드 중에서도 동남쪽 메도뱅크(Meadowbank)라는 지역 가까이 살고 있다. 큰 아들 S는 Meadowbank School이라는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S 친구 엄마의 추천으로, 이 지역 엄마들의 커뮤니티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Meadowbank Mums라는 비공개 페이스북 커뮤니티는 내가 본 중 역대급 온라인 공간이다. 우선 모든 분야의 추천 질의응답이, 많게는 하루에도 20개씩 포스팅이 올라온다. 청소도우미, 아이들 미용실, 청소년 자녀 생일선물 아이템 등 정말 사소한 것부터 집수리, 아이의 희귀한 증상에 대한 조언 공유 유청 등 개인에게는 굉장히 급하고 중요하지만 정보를 찾기 어려운 일들까지.

질문이 던져지면, 즉시 활발하고 따뜻하게 댓글이 달린다. 또, 지역에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일들이 생기면 바로 공유된다. 한 번은, 경찰이 어느 도로에 떴다(?)는 글이 올라오자, '약에 취한 코카시안 40대' 때문에 그렇다는 그 도로 거주자들의 제보가 줄을 이었고, 그의 인상착의도 자세히 올라왔다. 실시간 지역언론 및 추천 채널로서 활발히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중 나에게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실 평범한 포스팅이었다. 어떤 엄마가 자기 딸이 만 13살인데, 방학동안 베이비시터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한 광고였다. 벌써 3년 경력(!)이 있다며 필요하면 credential 및 추천서도 공유해줄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모자라, 걔네 엄마가 딸 대신 광고 및 추천까지. 나의 유년시절과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런 포스팅은 아-주 많았다. '너희 집에 소일거리 (잔디깎이, 짐정리 등) 있으면 우리 아이 지금 도울 손 있다.' '경험도 있고 그간 평도 좋았다' 등등.

공부 대신 그럼 뭐?

나는 처음부터 범생이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책을 좋아하고, 계획을 짜고, 이런 저런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공부, 또는 공부계획짜기, 아니면 공부하다 농땡이치며 만화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거의 전부였다. 나 뿐 아니라 내 주변에 그런 애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부가 아니면 뭐 대단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없었다. (집에 항상 도울 일이 있었겠지만 '공부나 하'라며 나를 outsource 하지 않으신 엄마 덕분에, 지금도 나는 똥손..)

그런 나에게 이 어린 시절의 날들이 공부가 아닌 다른 일과로 채워진다는 것, 그리고 그게 권장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선했다. 정확히는, 이런 질문이 들었다. "나는 그 많은 시간동안 뭘 한 거지?' 나는 그냥, 매일매일, 공부를 했었구나.

여기서 '스카이캐슬'을 열광하며 보았었다. 뉴질랜드라는 곳에서 보니, '한국 사회에 공기처럼 흐르는, 공부라는 강력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환기되었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일단 공부를 못한다면 그제서야 그럼 다른 거 뭐할래(뭐 할 수 있니)가 나오는 한국 사회. 공부가 아니어도 다른 수많은 돈벌이 경로가 있고, 무엇을 택하든 터치받지 않으며, 오히려 당장 필요한 생존기술(plumber, builder 등)이 더 선호되기까지 하는 뉴질랜드 사회.

공부 대신 별별 것 다

S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1년 내내 이벤트가 있다는 걸 배웠다. 학교 정원에서 기르는 채소를 수확해서 화덕피자로 구워먹는 날, 동절기/하절기 디스코 파티, 마오리 문화 주간, 중국어 문화주간, 거기에 할로윈 파티  등등.

(어디나 보통) 엄마들이 이런 품이 드는 온갖 사소한 것들을 챙긴다. 위의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이 이벤트들을 어떻게 참여할지, 어떻게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줄 지 고민하고 조언을 구하는 글들이다. 학업 성적이 미진한데 어느 과목을 어떻게 사교육을 시킬지 고민하는 글도 당연히 있지만, 보통은 예체능 특별활동이나, 이런 일련의 이벤트들과 관련된 포스팅들이다.

큰 아들 S가 초대받은 할로윈 레이저건 파티


뉴질랜드에서는 초등학교 때 정말 절대평가만 하고, 학교마다 다른 커리큘럼을 결정해서 가르칠 수 있고, 그건 학부모들 중 선발된 학교이사회의 결정으로 일어난다. 이런 교육 성격의 차이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나라 초등학교도 이제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겉으로만 보면 비슷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만들어질 지에 대한 고민의 영역은 분명히 다르다. 한쪽은 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궁극적으로 좋은 타이틀의 대학, 좋은 연봉을 보장받기를 바란다. 다른 한쪽은 아이가 지금, 올해 보내는 시간을 어떻게 즐겁고 균형있게 그리고 행복한 시민으로 자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부모의 마음은 분명 같겠지만, 지배적인 선택은 그래서 양상이 매우 다르다.

그리고, 공부만 하다 유년을 다 보낸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내 십대는 뭔가 굉장히 재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도 특정 사회에(만) 녹아있던, 당연하지 않은 특징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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