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지원금의 의미
주택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대기업 부영그룹이 사내 직원들에게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아이를 출산하면 출생아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 최초의 사례다.
그간 저출생 복지는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23년 0.7명대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대한민국이 전 세계 역사상 최초·최악의 인구 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도 말이다.
미국 뉴욕타임즈 칼럼은 한국의 저출생을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유럽'보다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도발적 문구로 이목을 끌었을뿐 진단에 대한 해법은 미진했다. 집값은 거론도 안 됐다.
유력지의 칼럼은 한국에 전달됐고 한국 지식인들은 칼럼을 회람하며 저마다의 해법을 제시한다. 누구는 기업가의 정신으로 저출생을 바라보고, 누구는 복지정책가의 정신으로 저출생을 관찰한다. 관찰 빈도는 높아졌으나 저출생 해결은 요원하다. 어떤 해법도 저출생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한다.
원인이 무엇인가. 집값인가? 여성의 사회 진출인가? 지역 소멸인가? 워라밸만 챙기는 업무 태만인가? 장님 코끼리 만지듯 문제를 진단하지만 문제는 복합적이다.
모두 공감하는 건 한국 사회의 풍토가 저출생을 유발했다는 것. '압축 사회'. 한국 사회를 정의 내리면 한국은 압축 사회다. 한국은 성장을 제1 원칙으로 삼고 쉼 없이 달렸다. 다만 급행열차와 같은 속도에 누군가는 구토했다. 들꽃과 나비를 못 보고 지나쳤다. 심호흡할 겨를이 없었다.
과거는 그래도 되었다. 미래가 창창했기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희망을 연료 삼아 달리는 기쁨이 있었다. 다만 이젠 아니다. 달려도 성과는 미진하다. 마음먹고 달려야 제 자리를 지킨다. 죽도록 달려야 성장한다. 대학 진학·취업·내 집 마련·결혼·출생 등 시차는 다르나 언젠가는 체감한다. '너무 지쳤다. 이제 그만 쉬고 싶어.' 심지어 탈진한 젊은이 몇몇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들은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다.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이 0명대로 급락한 시기는 2015년 이후부터다. 왜 이 시점부터 젊은이들이 포기하게 되었을까? 필자도 모른다. 다만 이 시점부터 등장한 단어가 있다. '워라밸', '욜로' 등이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이 단어들이 압축 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을 비추지 않았을까. 아마 이때쯤 다들 지쳤을 터다. 속된 말로 '현타'가 왔다.
19세기 경제학자이자 철학가인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제시한다. 하부구조는 경제·정치·법 등 사회의 근간이 되는 구조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사회·이념 등이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 형성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 사회의 인식은 경제·정치 등 인식의 배경이 되는 물질적 조건으로 형성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상·하부구조에 대한 골자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의 전복·개혁을 통해 상부구조를 바꾸려고 했다. 이른바 공산주의다. 알다시피 결과는 대실패다. 다만 그의 사상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상부구조인 문화를 바꾸려면 법·정치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모든 사회 구성원 간 집단적이고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다른 조건들을 제쳐 두고 끝없이 성장을 추구했던 과거 한국의 '압축 사회'를 존중한다. 다만 현세대의 소명은 성장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는 성장만큼 쉴 공간이 필요하다. 현세대의 목표는 작금의 '경쟁 압력'과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앞선 두 가지 키워드는 한시적인 정책·법률로는 해결이 어렵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밀도 있게 고민해야 한다.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1%대 밖에 안되는 경제 성장률을 달성해 일본에 졌다는 둥,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데도 중대재해법 50인 미만으로 확대하면 기업이 망한다는 둥의 성장주의 논조를 필자는 거부한다. 성장할수록 우리는 다른 것들을 놓칠 것이다. 이제 성장말고 구성원 간 신뢰 회복·협력 도모가 중요하다. 뭉쳐야 산다.
따라서 부영그룹의 파격적인 사내복지책을 환대한다. 정부 말고 개인·기업이 심도 있게 고민한 정책이라 그렇다. 1억원이라는 큰 거액을 기꺼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금액보다 그 이면에 담긴 신뢰 회복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은 현재의 출산율로 저출산 문제가 지속된다면 20년 후 국가 존립의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며 “저출산에는 자녀 양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 그리고 일과 가정생활 양립의 어려움이 큰 이유로 작용하는 만큼 파격적인 출산장려책을 도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저출생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가 닥칠 수 있으니 파격적인 출산장려책을 도입했다? 이 말은 단지 저출생 극복을 위한 한 기업의 시혜적 배려일까? 아니다. 단순한 분배나 시혜가 아니다. 필자는 그의 말을 ''성장'을 위한 선결 조건으로 '분배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이해했다. '기업 등 사회구성원들이 솔선수범하도록 인식을 바꾼다. 이를 통해 성장을 고대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부영그룹이 먼저 대안을 마련했으니 타기업들도 차차 제시할 것이다. 신뢰 회복이 달성되는 그날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