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문법에 거부하라
인공지능(AI) 발달은 지식 노동자의 전유물이었던 전문직 자격과 대학 학벌을 해체하고 있다. 과도기 가운데, AI 업계는 "단 한명의 천재가 수백만명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전망을 펼치기도 한다.
다만 이 같은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앞서, 우리는 '천재'라는 개념을 엄밀히 정의해야 한다. 천재성에 대한 오독과 맹목은 개인의 가치를 마모하고, 사회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천재라고 불러야 하는가?
천재의 형태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사법고시 등 정량화된 시험을 석권하는 '지능의 효율성'을 갖춘 사람을 천재라 부른다. 또는 세상을 변혁하는 '비범한 사고'를 갖춘 이를 천재성이라고 판단한다. 나아가 탐욕·쾌락 등 인간의 본성을 벗어나 해탈의 세계에 정착한 '정신적 경지'를 이룬 인간을 천재라고 믿는다.
결국 천재라는 개념은 명확히 합의할 수 없는 주관적 가치판단인 셈이다. 물어야 할 것은 천재의 유형들 중 AI 시대에 어떠한 천재가 유효한 천재가 될 수 있는지다.
답은 명확해 보인다. 인센티브 제도로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와, AI가 인류의 평등을 이끌 것이라는 테크노 유토피아적 낙관은 두 번째 유형, 즉 '비범한 사고와 실행력을 갖춘 혁신가'를 유효한 천재로 지목할 것이다.
문제는 낙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약탈을 정당화하는 이 아이러니가 생산성에 기여하지 못하는 인간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혁신가형 인재는 향후 AI 세대에서 '유효한 천재'일 수 있으나,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옳은 천재'일 수 없다.
과거로 시선을 돌리면 천재의 상은 명확한 정치적 궤적을 그린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포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 시대에서, 자본주의는 노동 생산성을 신성시하며 농업적 근면성을 천재의 토양으로 삼았다. 미래의 성과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는 '만족 지연'이 미덕이었던 고도성장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영특함을 바탕으로 누가 더 지독하게 엉덩이 싸움을 버티느냐가 중요했다. 연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에 근거해, 인내는 곧 성과가 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천재는 시스템에 가장 최적화한 부품과 다름없었다.
초침을 더 멀리, 자본주의 이전의 신정일치 사회로 돌리자.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 천재성은 영성의 영역이었다. 신의 질서는 더 깊은 믿음으로 다가간 선지자들을 우상화했고, 그들의 영성(천재성)은 견고한 계급 분리를 정당화하는 신화적 도구가 됐다.
결국 역사에서 천재라는 개념은 한 번도 순수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당대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기획한 지극히 정치적인 산물이었다.
옳은 천재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로 귀결할 수 없다. 견고한 자본주의와 가속화된 AI 발달은 향후 '혁신가적 인재'만이 시대의 정답이라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류 체계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단일한 가치일 뿐, 절대적 정의일 수 없다. 천재에 대한 정의는 풍부하고 불친절해야 한다. 비범함이나 근면, 영성 중 무엇을 천재성이라 정의하든, 그 개별적 정의는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또 누군가는 이 글에서 분류하지 않은 또 다른 유형의 천재를 제시할 수 있다. 이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맹목적 믿음의 거부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쏠림 현상'은 개인을 끊임없이 흔들며 그의 뚜렷한 가치관 형성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문법에 동화하는 순간 개인의 개성은 납작하게 찌그러진다. 뚝심 있게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
타인이 규정한 천재성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의한 천재성을 발굴하는 것. 그리고 뚝심이 부리는 고독한 투쟁의 무게를 마땅히 견디는 것. 역설적으로 그것은 AI 시대에 잡아먹히지 않을 고유성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