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생각 결산] 사랑과 삶과 종교에 대하여

by 몽땅별

새해를 맞이해버렸다. 올해 내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다. 다만 나는 2주간의 짧고 변변찮은 연애를 딱 한 번 겪었다. 그시절 어머니는 강인했을까. 여전히 내게 삶은 버겁고 숨가쁘다.


#사랑에 대하여

요즘 사랑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낭만은 죽고 가성비만 남았다. 결혼은 손익을 따져야 하는 비즈니스다. 아이는 비용이고 배우자는 리스크다. 연애도 두렵다. 공포 마케팅과 통계적 착시는 성별 간 갈등을 부추긴다. 극단주의자에게 남성은 잠재적 살인자고, 여성은 혐오주의자다. 세상을 망치는 것은 바로 이들 일텐데.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랑이 '낭만'인 시절은 최근 1~2세기에 그쳤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까지 사랑은 양가 간의 경제적 결합이자 사회적 지위를 나누는 교환 행위였다. 낭만적 사랑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현대에 발화하면서 맺은 부산물에 그칠지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선행해야 하는 것. 그것은 조건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조건을 본다. 과거의 조건은 혈통과 자산이라는 외재적 가치였다면 오늘날 조건은 외모나 몸매라는 '매력자본'이 대체했을 뿐이다. '자유 연애'라는 서사는 존재하는 걸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근간이 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서사가 제공하는 마케팅에 그칠 수 있다.


역사의 궤적에는 늘 패배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과거의 도태는 '천명(天命)'이나 '출신' 혹은 '신분'이라는 불가피한 변명 뒤에 숨을 수 있는 비극이었다. 반면 모든 개인을 스스로 경영해야 할 '자본'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자본주의는 패배의 책임을 내부로 돌린다.


매력자본을 최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지금, 유전적 추함이나 태생적 한계는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다. 그의 외모나 신체는 관리해야 할 포트폴리오이며-그것이 매력자본의 상품화이기에- 이 상품화 과정에서 낙오자는 마땅히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혀야 한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선택의 권리를 준 듯 했지만, 실제 상품 가치의 입증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했다.


나는 이 현실이 지독히도 싫었다. 연애조차도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상대방을 서열화하며 만나야만 한다는 비극이, 낭만이라는 외피 뒤에 설계된 정교한 자본주의적 구조가, 나와 달리 이 시스템에 충실히 순응하고 있는 타인들이.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나였다. 이 시스템을 저주했지만 결국 나조차도 타인의 외모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부박하고 기만적인 인간이었다.


충실히 적응했던 것 같다. 생물학적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을 힘들게 했고, 연애시장에서 획득한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도망치기도 했다. 돌아보면 나는 고귀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내 그릇의 크기는 그저 한 인간의 몫에 그쳤다. 인간적이었다는 뜻이다.


연애도 결혼도 비움이 선행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원망? 고귀함이 아닌 평범한 나로서의 자각? 그러면서도 아직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철저히 인간적인 나? 결국 아직까지 내가 사랑을 사랑답게 못하는 것은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참 쉽지 않다.


요즘에는 버티고 적응하는 삶에 대해 존경심이 든다.


#삶에 대하여

한국은 늘 바쁘다. 정해진 시기에 맞게 속도를 내야한다. 청소년기는 대학 간판을 위해, 대학생 때는 대기업·전문직을 위해, 취업 후에는 내집장만을 위해 계속 달려야 한다.


오늘날 MZ는 세분화된 경쟁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에는 고시 성공·대기업 입사 등 한방 역전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오늘은 영어유치원을 들어가기 위한 4세고시부터 시작해 7세고시(명문초), 외국어 고·과학 고 입시 시험, 명문대 준비, 취업 등을 이뤄야 한다. 취업 단계는 복잡하다. 서류-인적성-1차면접-2차면접-3차면접 등 공개 채용을 위한 허들이 높아졌다. 인턴제도도 가혹하다. 3개월 전환형 인턴은 고사하고 12개월 내내 지원자를 평가하는 인턴제도가 등장했다.


어렵게 취업해도 긴장은 완화할 수 없다. 기업 신년사는 매년 위기였다. 회사 대표는 호황기에 방심하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불황기에 사즉생의 희생을 요구한다. 도대체 언제쯤 쉴 수 있을련지. 성과 압박과 상사 등 인간관계 스트레스로 마음 속 울화가 치솟는다. 지친 가슴 한 편에 사표를 품고 살지만 퇴사는 쉽지 않다.


불과 몇년 전, 코로나로 유동성이 풍부했던 시기에만 해도 퇴사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여행 유튜버와 자아실현을 꿈꾸고 회사를 박차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의 퇴사는 강제된 퇴장이다. 인공지능(AI) 발달이 가속화하면서 희망퇴직이라는 반강제적 구조조정이 곳곳에 벌어진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경쟁자였던 시절을 지나, 앞으로는 인류가 AI에 의한 전면적 대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끝없는 평가의 굴레와 찰나의 성취 끝에 기다리는 것이 기술에 의한 내쫓김이라니. 인류가 쌓아온 서사와 노동의 가치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경쟁에 지쳐 낙오하는 이들이 많다. AI는 인류의 종말을 가속화한다. 어느새부턴가 우리 사회는 수단(시스템)이 본질(개인)을 지배하고 있다. AI는 인류 종말의 원인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거울이다. 우리는 더 완벽하려다 스스로를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기계를 얻었다. 감정이 없지만 존재 자체가 폭력적인 이 기계는 인간을 비참하게 한다.


플라톤적 사고관이 인류를 망친 게 아닐까. 플라톤은 현실 너머의 '이데아'를 진리의 세계로 오판했다. 이러한 이데아는 인류에게 '완벽한 표준'이라는 신화를 주입했다. 완벽한 표준에 잘 적응하는 사람만이 성공을 누릴 수 있다는 착각. 이 착각 아래 상시적 비교와 서열화된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AI는 경쟁 막바지에 등장한 이데아적 세계관의 대장이다.


우리는 언제쯤 플라톤의 이데아를 버리고 각자의 고유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인류가 플라톤적 이데아를 버리고 각자의 고유성(시뮬라크르)을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고유해진다는 것은 시스템과 구조에서 벗어나 스스로 '측정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자본주의에서 측정 불가능함은 무가치함을 나타낸다. 고유성의 추구는 사회적 자살을 초래하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 밖으로 벗어날 때 실존적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살아야만 한다. 인류의 끝이 AI에 의한 기술적 종말이든, 무한 경쟁으로 초래한 낙오자의 양산이든, 혹은 의미를 구축하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로 귀결되든, 이유를 막론하고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삶이 주는 맹목적인 의지와 박동하는 육체는 기술과 시스템이 침범할 수 없는 인류의 마지막 성지다. 인간과 삶은, 단어 그대로 인간과 삶이기에 그 자체로 존귀하다. '사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값지다.


따라서 다시금, 버티고 적응하는 삶 그 자체에 대해 존경심이 든다.


#종교에 대하여

현대 과학주의 관점에서 종교는 논리를 멈추고 믿음에 귀의하는 비이성적 행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자아를 해체하고 스스로를 절대자에게 귀속시키는 철저한 복종에서 나온다. 율법과 계를 준수하며 세계의 불확실성에 저항하기를 멈춘다. 나를 비우고 믿음으로 대체한다. 이 종교적 반복을 거쳐 인간은 교만한 자아에서 벗어난다. 종교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고 지고의 복락을 체험하게 한다.


살아야만 한다는 각오든, 인간의 추악함과 슬픔이든, 개인의 철학적 투쟁이든, 삶에서 마주하는 허무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철학자가 이 괴로움을 명확히 직시하고도 계속 부조리에 투항하며 사유하는 존재라면, 종교인은 이 고통을 믿음의 손으로 움켜쥐어 신성한 가치로 변화시키는 존재다.


지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고독한 철학자의 태도와 자아를 버림으로써 위대함에 맞닿는 종교의 행위는 인간이 허무에 맞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모두 숭고한 방식이다.


나는 최근 종교적 가치에 더 쏠려있다. 종교가 필연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자비와 겸손, 개인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파편화되고 오만해진 인류를 화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사랑 이면에 숨겨진 현실주의와 기술적 대체(AI)가 초래할 인류의 무가치함을 종교로서 승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맹목적 믿음을 거부한다. 성경 그대로를 믿는 사람들, 자신의 혐오를 종교적 언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사람들, 겸손이 아닌 오만함으로 무장한 사람들. 언제나 극단주의자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


절대자를 그대로 닮기 보단 절대자와 동행하는 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이데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유한 신앙을 갖추는 종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탄생한 가치는 완벽한 적이 없었다. 구약의 신이나 예수, 부처 모두 그들의 서사에서 선민의식과 열등감을 드러냈던 때가 있었다. 절대자의 신화적 완벽성(이데아)에 매몰되어 자신을 삭제하기보다, 그들이 겪었던 갈등과 한계를 응시하며 인간의 굴레를 묵묵히 매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정직한 신앙이다. 그렇게 신앙을 따르며 삶을 아름답게 화하는 것. 이것이 종교가 가져다줄 수 있는 윤리적·실존적 체험이다.


고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겠다. "나 자신이 언제든 얼마든 틀릴 수 있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인간인지라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겠지만 반드시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게 하소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나만의 방식과 관점에 갇혀 타인을 밀어내기보다 사랑과 겸손이라는 복음의 본질 위에 세워 주소서. 당신과 동행하게 하소서."


사랑과 삶이 허무할 지라도, 종교를 통해 넉넉히 버티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시대, 대학 간판과 전문직 자격증의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