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남포교회 목사의 자식 세습을 위한 분리 개척 시도는 다수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40억원이라는 돈 앞에 무너진 박영선 목사를 목격한 우리 신앙인들은 앞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한국 보수신학의 거목이었던 박영선 남포교회 목사가 탐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수십권의 책과 수백만의 유튜브 조회수로 포장했던 그의 영성은, 언론이 비춘 현실 앞에 노욕으로 전락했다.
40억원. 그가 요구한 금액은 대다수 성도들에게 평생을 일해도 모으기 어려운 거금이다. 당초 400억원을 요구했다가 40억원으로 낮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잃어버린 신뢰의 무게는 더욱 무겁다. 그 무게는 고스란히 그를 믿어온 신도들에게 짐이 됐다.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성도들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설교 못하면 자살하겠다." 박 목사의 입에서 나온 이 극단적 발언은 개인의 감정 표출을 넘어선다. 강단에 올라 신의 말씀을 전하던 그는 자기 언어가 지닌 무게와 파급력을 망각했다. 희망과 생명을 전해야 할 목회자가 절망과 위협의 언어를 택했다. 이를 지켜본 성도들의 통탄은 커졌을 것이다.
이솝우화에 로도스 섬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 한 허풍쟁이 선수가 "로도스 섬에서 자기가 올림픽 선수 못지않게 높이 뛴다"고 자랑했다. "다시 로도스 섬에 간다면 내 높이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라며 큰소리도 쳤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여기가 로도스섬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보게나."
박영선 목사는 설교를 위해 자살까지 각오했다고 말했다. 설교를 위해서 땅값 40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목회가 평생 사명이었으니, 목회를 위해 약간의 돈(40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교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그에게 고한다. "여기가 목회 장소다. 여기서 설교하라."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는 예배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같이 말했다. "이 산(그리림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신)에게 예배할 때가 이른다." 이어 "아버지를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장소에만 집착했다. 자기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예배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평생 전해온 그 익숙한 성경 말씀을 정작 자기 삶에서 놓치고 말았다.
철학자 헤겔은 로도스 섬 이솝우화를 '현실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허풍쟁이 선수가 로도스 섬에서만 뛸 수 있다고 말했듯 철학자들 역시 이성의 세계(로도스 섬)에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무력해진다는 의미다. 로도스 섬에 없는 허풍쟁이처럼 현실을 떠난 철학자의 말은 공허하다.
헤겔의 통찰력은 철학이 본질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성을 암시한다. 헤겔은 이 비현실 앞에서 철학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린 슬픔을 담아냈다.
이는 철학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오늘날 기독교가 마주한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수많은 성도들이 신을 믿노라 고백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현실의 논리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성도들은 예배와 헌신을 놓치기 일쑤고, 모범이어야 할 목회자조차 돈 앞에 믿음을 내려놓는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는 결국 현실에서 벗어난 뜬구름 잡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을까.
연이은 목회자들의 탐욕을 목격하면 신앙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들고 만다. 신앙이란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열정을 다해 믿어왔던가. 삶(현실)이란 무엇이길래 이 열정을 단숨에 꺼버리고 마는가.
박 목사의 사례처럼 우리 믿음이 현실 앞에서 그저 무용한 것으로 끝난다면 이는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 나는 박 목사를 책망하지만 그 비난의 손가락은 사실 나 자신을 가리킬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고 현실 속 무너지는 순간이 빈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제공하는 겸손은 현실의 오만과 탐욕 앞에 너무도 쉽게 사라지고 만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us)." 이솝 우화에서 유래한 이 라틴어 경구를 헤겔은 자신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서 절묘하게 비틀었다. "Hic rosa, hic salta! (여기에 장미가 피었다. 여기서 춤추라!)"
헤겔에게 로도스는 갈 수 없는 먼 이상향에 불과했다. 철학자들이 이상에만 매몰된 나머지 정작 발 딛고 선 현실을 외면했다고 봤다. 헤겔은 '장미'를 이성(진리)으로, '십자가'를 고통스러운 현실로 해석하며, 먼 곳이 아닌 '지금 여기, 현실이라는 십자가' 안에서 이성의 장미를 발견하고 춤추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진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분투하는 '역동적인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헤겔의 로도스 섬 재해석은 오늘날 신앙인에게 묵직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신앙은 그저 뜬구름 잡는 위안에 그쳐야 할까? 저 먼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에서 도피해야 할까?
아니다. 신앙은 투쟁이다. 과정이며, 분투다. 매 순간 치열하게 겸손하고, 처절하게 기뻐해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는 하늘을 보느라 땅을 잊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하늘의 뜻을 심기 위해 매 순간 씨름해야 한다. 마땅히 신앙은 현실과 충돌해야 하며, 마땅히 신앙은 갈등 속에 옥신각신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의 진리다. 신앙인이라면 먼 이상향을 바라보다 멈추면 안된다. 계속해서, 투쟁의 걸음을 이어가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진 신앙인들. 먼 하늘을 찾아 헤매지 말자. 바로 여기, 현실이라는 십자가 위에서 피어난 장미(신앙)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신앙의 춤을 추자.
여기 장미가 피었다. 여기서 춤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