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이후 떠오른 단상
이정규 목사와의 대담 후기 두 번째다. 이번엔 대담이 불러일으킨 나의 신앙적 고민을 적었다.
20살, 나의 신앙은 거칠었다.
교회 분열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었다. 2018년, 교회 갈등이 격화하던 시절이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믿음은 나날이 가늘어졌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독서량이 늘었다. 교양·전공 서적을 두루 읽으며 생긴 비판적 사고는 어느새 성경 읽기에도 스며들었다.
성경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두 딸을 내어주는 롯의 행위는 현대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구약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되고 이방 족속의 살해가 정당화되는 장면들도 그렇다.
나는 이러한 의문들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돌이켜보면 해답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분열 속에서 쌓인 감정을 해소하려는 반항에 가까웠다. 반항하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보다 위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선교사를 포함한 CBA 선배들은 위로 대신 훈계를 내밀었다. 성경을 다시 읽으라는 상투적인 대꾸가 전부였다. 위로처럼 보였던 말도 결국 권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도 자기 믿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들은 늘 말한다.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으라고. 그러나 정작 비판적으로 읽고 느낀 것들을 꺼내놓으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허용하는 비판은 처음부터 허용 가능한 선 안에서만 하는 비판이었다. 가르치려는 자세는 여전하고, CBA 청년들의 믿음은 늘 부족하다는 전제도 변함없었다. 결국 나는 꺼내지 않는 편을 택했다. 공동체를 위해서였다. 나의 개성이 몰개성이 돼야 그들이 편안해했으니까.
나는 차라리 솔직한 편이다. 귀찮으면 귀찮다고, 적당히 신과 소통하고 있다고, 믿음이 없다고 늘 고백해왔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이 그들에겐 훈계와 권면의 대상이었다. 말씀 안에 산다면서 정작 낮은 자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부족합니다"를 습관처럼 내뱉으면서도 자신만의 신앙을 뻣뻣하게 지키는 꼴은 변함없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티를 지적하는 태도, 그 자격 없는 지적이 역겨웠다.
성락교회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반이 "왜"라는 질문을 금기시하는 문화다. 의심 없는 믿음을 최우선으로 치고, 질문은 믿음의 연약함으로 판정한다. 과거 성락교회는 여기에 가시적인 이적까지 덧붙여 신앙을 충당하려 했다. 얄팍한 상술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2024년 20대 가나안 성도 비율은 44%에 달한다. 30대는 38%, 40대는 39%다. 한때 교회를 다녔던 청년 상당수가 스스로 엑소더스를 택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 걸까. 정말로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서? 매번 어린아이 취급하며 믿음의 연약함을 타박하고, 알량한 신앙을 내세우며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흡족해하는 모습 때문은 아닐까.
지난달 조사에서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에 달했다. 조사 이래 역대 최고치다. 교인들은 스스로를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종교로 여기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다르다. 타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타성(58%), 권위주의 옹호(43.7%), 폭력적 언어 선동(43.3%) 등이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눈이다.
이쯤 되면 포기라기보다 체념에 가깝다. 나는 그냥 침묵한다. 조용히 교회를 다니며 적당한 친목의 공간으로 삼을 뿐이다. 그렇다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다.
A의 반대는 ANTI-A가 아니다. 직접적인 반대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침묵을 택할 수도, 교회를 떠날 수도, 불복종할 수도 있다. 가나안 성도의 지속적 증가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교회 불신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함께해야만 합니다"라는 말은 권면을 가장한 복종의 요구다. 차라리 "우린 남입니다"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당신을 존중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단독자로서의 신앙을 택했다. 신과 나의 독대가 신앙이다.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적어도 이정규 목사에게 젊은이들이 몰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진정성을 갖췄다. 겉과 속이 같았다. 이정규 목사만도 되지 못한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에선 태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