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톤 좀 낮춰주실 수 있나요?"
기자로 일하면 기업이나 취재원으로부터 심심치 않게 받는 연락이다. 청탁처럼 보일 수 있다. 다만 식사를 갖거나 홍보성 기사를 내보내는 식으로 껄끄러운 문제를 무마하는 일은 언론계에서 관행으로 여겨진다. 도대체 언론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러한 타협이 성립하는 것일까.
언론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법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법은 거대한 '장검'과 같다. 상대방을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에 매우 조심스럽고 엄격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에 훈련받은 법조인들이 존재하며, 판결의 범위도 한정적이고 세밀하다. 억울한 피해자들 입장에선 법의 세분한 절차와 느린 속도 탓에 기대만큼의 구제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면 언론은 '커터칼'과 같다. 장검보다 훨씬 가볍고 쉽게 휘두를 수 있다. 언뜻 보기엔 피해가 미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커터칼이 '공론장'이라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중의 시선이 모이고 공론화가 이루어지면, 가벼운 커터칼은 단숨에 상대방의 사회적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한다. 법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 빈틈을 메우고 대중의 평가와 여론을 움직여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언론이 가진 힘이다.
이러한 권력을 손에 쥐고 행사하는 이들이 바로 기자다. 기자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해서 쓸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100명 중 5명이 죽었다"는 건조한 팩트를 두고도, "100명 중 5명'이나' 죽었다"라며 사안의 심각성을 과장할 수도 있고, "100명 중 5명'밖에' 안 죽었다"라며 축소할 수도 있다. 무엇을 조명하고 무엇을 가릴지 결정하는 행위가 기자가 휘두르는 권력인 셈이다.
문제는 이 날렵하고 즉각적인 힘 때문에 정치권이나 경제계와 유착이 쉽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기업이나 권력자 입장에서는 느리고 무거운 법적 대응보다, 언론의 펜 끝을 돌려 여론을 무마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방어책이기 때문이다.
특정 기업으로부터 "기사 좀 잘 써주세요"라는 요청을 받거나, 내부 고발자로부터 "이 기업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기자는 이를 어떻게 다룰지 깊은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커터칼의 방향에 따라 수많은 돈이 오가는 거래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무엇을 쥐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기사를 내보낼지 말지 선택하는 행위에 언론의 힘이 있다. 사심 없이 진실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기자의 소명의식과 관행으로 포장된 유착의 유혹 사이에서 언론계와 기자는 매일 시험대에 오른다.
과연 한국 언론은 커터칼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을까. 오늘날 대중의 입에서 '기레기'라는 멸칭이 일상처럼 들리는 것을 보면 언론 권력은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힘을 잃고 무너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보상의 크기와 상관없이 소명감을 바탕으로 밤낮없이 현장을 누비는 양심적인 기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것은 결국 칼 쥔 자의 몫이다. 언론계와 기자는 사심 대신 양심으로, 무엇을 베고 무엇을 남길지 올바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