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혼돈의 도시를 떠나며

by 쿠쿠


반년 동안 공간에 정이 들었으면 얼마나 정들었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쫓기듯 아쉬움을 진하게 남기고 방 문을 닫는 순간, 공허한 빛 한줄기가 날 관통하듯 구멍이 생긴 것만 같았다. 언젠가 떠날 줄 알고도 정을 준 이 곳을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줄은 몰랐다. 재앙 혹은 재난 앞의 인간은 이토록 무력함을 어쩌면 태어나 처음 느끼고 있다.


야채 볶음밥, 컬리플라워, 감자, 무화과 처트니, 피망 스프레드를 펴 바른 샌드위치와 감자칩 두 봉지, 견과류, 물 두 통, 친구가 남기고 간 초콜릿을 가방에 욱여넣고 보니, 여덟 시간 여행치 곤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한 것 같아 조금 두고 갈까 싶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다 들고 가자 하며 단호하게 짐을 꾸렸다. 가을, 겨울에 입을 편한 옷가지 대여섯 벌과 속옷, 최소한의 세면도구, 수건 두 장, 카메라, 요가 매트, 침낭과 베개. 백팩 하나면 끝날 거라 착각한 과거의 나를 비웃듯, 거울 속의 나는 마치 축구 전지훈련에 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짐 더미를 메고 있었다.


일곱 시 십이 분 캔버라행 기차에 일찌감치 몸을 싣고도 약 팔 개월간 고운 정, 미운 정들었던 이 곳을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과 나흘 만에 바이러스의 공포로 잠식된 이 도시를 떠나는 게 다행이라는 마음이 아쉬움보다 커서 다행이다. 항상 떠날 땐 아쉬움과 그리움이 범벅되기 마련인데.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 연장을 위한 88일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조금 더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농장이 아닌 산불 복구 봉사 단체에 합류하게 된 것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다고 해야 할지. 중요한 것은 혼란스러웠던 금요일에 이 모든 결정을 빠르게 내리고 기차표를 끊은 결정이, 3개월 뒤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변모시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는 1차 산업에서 일을 해야만 세컨드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 작년 말 엄청난 규모의 산불로 인한 피해가 어마어마한 까닭에 비자 룰이 임시로 변경됐다. 즉슨, 산불 복구 봉사를 해도 세컨드 비자를 주겠다는 것이다.

하루 세 끼를 제공하는 건 모든 캠프가 동일하지만, 대부분은 산속에서 텐트 치고 봉사를 다니는 경우가 많고 극소수의 캠프는 실내에 천막을 쳐 간이 기숙사를 제공해준다. 나는 후자의 캠프에 도착했으니 운이 아주 좋다. 캠핑을 좋아하지만 폭우가 내리던 날 카라반에서조차 잠들 수 없었던 나는, 지붕과 벽, 바닥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다면 기타 조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이러스로부터 단체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도시에서 오는 봉사자를 받지 않는 이 곳에, 나와 S, P, D는 문을 닫고 도착했다. 기차 타고 네 시간, 버스로 네 시간 떨어진 이곳에 도착하니 오후 네시쯤. 말과 양, 호수와 덤불을 헤치며 도착한 이 곳은 도시의 검은색 공기에 익숙한 나에겐 생소하리만치 투명한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관리자에게 업무, 식사 시간, 생활 규칙 등을 안내받은 후 시설을 둘러보는데, 수학여행을 온 것 같기도 하고 극기훈련을 온 것 같기도 한 이 곳이 앞으로 3개월 간 내 터전이 될 것이라는 게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S, P와 공터를 걸으며 서로 도시에서 했던 일, 이 곳에 오게 된 이야기 등을 나누다 보니 곧 여섯 시가 되었고 우리는 이 공동체에서 첫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레몬크림에 끓인 흰살생선과 머스터드 소스, 으깬 감자, 삶은 완두콩과 감자를 정신없이 해치운 뒤, 새로 도착한 우리 넷은 돌연 모두 앞에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고 이윽고 박수갈채를 받은 뒤 푸딩을 후식으로 먹었다. 이 곳에서 주방일을 도맡아 하는 뉴질랜드 출신 부부는 호주의 최남단에 위치한 태스매니아에서 일 년간 여행을 하던 중, 작년 산불 피해를 직접 입은 이웃을 만난 이후 뉴스에서의 충격을 개인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들을 도와야겠단 결심을 한 후 이 봉사단체에 합류하게 되었다 한다. 아이들 넷은 아직도 뉴질랜드에 있다는데, 바이러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임에도 침착하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한 달 뒤면 눈이 오고 겨울이 올 거라는데, 5월의 추위를 어찌 견딜지보단 앞으로 이 곳에서의 시간이 날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에 대해 궁금한 이 곳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