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서울 미술관은 여행 패키지처럼 표를 판매하기 때문에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의 표만 구매해도 서울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모든 전시를 추가 요금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석파정 인근은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데, 특히 미술관 신관의 2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큼직한 돌덩이는 세월의 풍파에 둥글넓적해졌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야생화는 제 미모를 한껏 뽐낸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석파정의 정경은 그 어떤 유적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아하다. 왜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끌어들이면서까지 탐을 냈었는지 알 만한 절경이다.
서울 미술관의 신관 2층은 고즈넉한 석파정의 풍경을 미세먼지와 더위를 피해 즐길 수 있도록 거대한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고, 신관 1층은 폴 자쿨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화가인 폴 자쿨레는 1899년 도쿄로 이사 온 이래 1960년 사망할 때까지 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는데, 그가 다채로운 화폭에 담아낸 20세기 동양의 모습은 역사를 흑백으로만 접한 21세기 사람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다. 분명 갓과 도포를 입고 있지만, 인물의 깊고 짙은 눈매와 높게 솟은 콧대는 분명 서양인을 연상시키고, 조선에서는 양을 키운 적이 없지만 지팡이를 손에 쥔 산속 청년의 직업은 양치기다. 철저히 타자의 시선에서 근대 조선을 조망했던 폴 자쿨레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새로운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나게 된다.
폴 자쿨레의 그림, <세 명의 한국인들>
신관 지하에는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갱신한 故 김환기 작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추상화를 도구로 한국의 미와 정서를 표현했던 화가로,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회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십만 개의 점 04-VI-73 #316>이 개관 이래 처음으로 관객을 찾는다. 다섯 개의 구심점을 따라 찍힌 수 백개의 점들이 마치 수묵화처럼 번져있는 이 작품에는 작가가 평생에 걸쳐 연구했던 조형언어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십만 개의 점>은 새하얀 조명 아래서 마치 바닥에 비친 그림자마저 하나의 작품인 듯, 고고하게 빛을 발한다. 아직 본관은 발을 들여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전시 몇 개를 관람한 기분이 든다.
김환기 작가의 <십만 개의 점>
신관과 석파정이 전통적 의미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본관은 21세기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본관 3층에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스페인의 다원 예술가, 하비에르 마틴의 <블라인드니스 컬렉션(Blindness Collection)> 전시가 한창이다. 사진 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보고 있노라면 모델의 자극적인 외모 대신 그들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행위 예술이자 설치 예술로서 전시실 한편에 놓여 있는 부스에서 관람객은 직접, 이 의미있는 행위에 동참할 수도 있다. 하비에르가 10년에 걸쳐 보여 준 콜라주와 행위 예술은 신관의 회화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미술의 의미를 확장한다.
하비에르 마틴의 <Blindness Collection>
신관과 석파정, 본관의 2, 3층을 지나면 드디어 본관 1층에서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벌써 지치면 곤란하다. 관람객의 일상을 파고드는 작품들이 광활한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낮-저녁-새벽으로 이어지는 섹션 중 가장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산 섹션은 아무래도 아침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의 저녁과 새벽은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지만, 현대인의 아침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그러나 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황선태 작가의 작품은 쏟아지는 졸음과 습기 차고 비좁은 대중교통 사이에서 마주하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한다. <빛이 드는 공간>은 LED와 드로잉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미술로 분명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주는 오묘한 사실성 때문에 시간이 멈춘 순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이 주는 상상의 여백에는 아침의 따사로운 햇볕 속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가득하다. 비록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하루지만, <빛이 드는 공간>은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새로운 날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는 축복을 상기시킨다.
황선태 작가의 <빛이 드는 공간>
황선태 작가와는 달리, 유고 나카무라의 <Humanity>는 우리가 흔히 '아침' 하면 떠올리는, 일상의 불쾌함을 재치 있는 플래시 영상에 담아냈다. 물리학을 전공한 작가는 마치 로봇처럼 걸어 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절벽을 만나 떨어지거나, 공기의 흐름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모습을 통해,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일상 속 물리학의 법칙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의 부품처럼,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살아갈지언정 세상의 '나'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작가는 영상 속 사람들의 옷 색깔을 달리함으로써 이 진부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놓치지 않는다. <Humanity>를 '좀비들의 행진'쯤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지만, 어쨌거나 세상에 하나뿐인 좀비다.
유고 나카무라의 <Humanity>
이번 전시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반가운 얼굴도 있다. 바로 문제이 작가다. <굿즈모아마트> 전시에서 굿즈로만 만날 수 있었던 문제이 작가의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제이 작가는 복잡한 일상의 배경을 과감히 삭제하고 강조하고 싶은 전경을 오브제로 선택해 간결하게 표현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들은 작가의 다정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한다. 그가 불러주는 이름 속에는 오로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선밖에 없지만, 문제이 작가를 '일상을 채색하는 작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배달의 민족에 관한 얘기는 프리뷰에서도 했었지만, 실제로 전시에서 만난 배달의 민족은 더욱 독특했다. 벽면을 가득 메운 메모장에는 사람들이 그저 사소하게 여길 일상의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전시해놓은 것만 같은 묘한 불편감과 '이것도 예술인가' 싶은 허탈감이 들기도 하지만, 찬찬히 하루하루 달력을 뜯다 보면 12월 31일, '아 나의 일상도 하나의 작품이구나'하는 생각에 미소를 짓게 된다. 본래는 일상 속 서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제작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당신의 하루도 예술'이라는 기분 좋은 메시지가 더 마음에 남은 작품이었다.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사진
사진의 예술성에 대해서 논하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나서야 여행 내내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니 오죽하랴. 영화의 미장센을 논하고, 가끔은 눈길이 가는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해도 여전히 단일 작품으로서 사진이 미술의 영역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나는 그 회의론을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에서 회화와 사진의 경계는 남색과 진파랑의 경계만큼 흐릿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을 보라. 플래시를 만나 산란하는 물방울들의 움직임은 극사실주의 화가가 붓으로 그려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회화적이다. 그는 물에 젖어 미끈거리는 재킷의 질감도 마치 유화처럼 표현했다. 그림이 사진처럼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사진이 그림처럼 보이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물감과 팔레트 없이, 오로지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만으로 탄생한 예술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진을 회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우스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대가의 작품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많아서 '역시 미술은 나랑 안 맞나 보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미술관이라면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다니는 편인데도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전시를 볼 때마다 작품과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나를 가로막는 것 같았다.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는 대중과 작품 사이의 벽을 허물고 일상이 곧 예술이라는 모토를 내세운다. 그러나 소재가 가볍다고 해서 작품 또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색색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예술을 외치고 종국에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전시에서 나는 마르셀 뒤샹을 보았다. 그리고 피카소를 보았고, 폴록을 보았고, 마그리트를 보았다.
한 편의 글에 더 많은 작품을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만큼 볼거리가 많았던,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